13화. 흑접 (6)
‘아미파.’
중원 불산(佛山)의 성지이자 구파의 일좌.
강호 무림에서 구파의 이름값은 어마어마하다.
특히 아미는 같은 구파인 청성, 팔가인 당문과 더불어 사천을 삼분하는 대문파.
호사가들은 사천 무림이라는 거대한 향로를 떠받드는 삼발이 중 하나라고 부를 정도였다.
수십 년 전에 태화문이 급부상하면서 사천삼패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역사나 명성은 아직 사천삼패를 넘지 못하는 것이 사실.
사천삼패가 수백 년간 사천 무림에 드리운 존재감은 가히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토록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친 사천삼패가 막상 속세의 일에 개입한 적은 드물다.
아미와 청성은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고선 산문을 나서지 않고, 당문은 폐쇄적인 가풍으로 인해 가문과 관련 없는 일엔 나서지 않는다.
가끔 표주나 만행(萬行)을 나온 제자들이 강호사에 족적을 남길지언정 본산 차원에서 나서는 일은 근 수십 년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선 게 무림맹의 맹방으로 흑룡교 토벌전에 참여한 거였으니....’
이후 사천으로 도망친 흑룡교의 잔당을 토벌하는 일도 도맡긴 했지만, 그조차 굵직한 마인들을 처리하는 일 말고는 거의 나서지 않았다.
흑접이 흑룡교의 비술을 받아들였다고 하나 아미의 본산제자들이 산문을 내려오다니?
‘혹시 제자가 살해당했나?’
흑접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미의 제자를 죽일 리 없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
청수도 처음엔 출신을 숨기지 않았나.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별로 없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에서 활동하는 흑접이 아미의 무공을 모를 리가 없으리라.
설령 만행을 나와 신분을 숨겼어도 무공을 견식했다면 알아봤을 가능성이 컸다.
청성이나 당문이 나서지 않은 상황에서 아미만 홀로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엽이 말없이 시선을 던지자 앞서 발언을 했던 젊은 비구니가 합장을 했다.
“아미의 혜심(蕙心)이라 합니다.”
낭인전에 들어온 이상은 손님의 신분이니, 먼저 예를 차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걸까.
“낭인전의 강엽이오.”
강엽은 태연하게 화답했지만 속으론 놀랐다.
‘일대제자라니.’
사천삼패는 요주의 대상인 만큼 명성이 퍼진 고수들에 대한 정보는 모아두었다.
혜자 항렬은 장문인과 장로들 아래 일대제자들.
특히 혜심이라는 법명을 쓰는 젊은 여무인은 같은 배분의 아미 제자들 중에선 가장 유명했다.
“소창후(小槍后)...!”
강엽 대신 칠호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혜자 항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재를 지녔으며 차후 아미를 대표할 무인으로 점쳐지는 여무인.
홍가려가 경국지색의 용모로 태화문의 조영옥이나 당문의 독묘화와 함께 사천삼미로 꼽힌다면, 소창후는 사천을 대표하는 젊은 여류고수로서 조영옥, 독묘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후기지수였다.
‘배분만 보면 대문파의 중견 고수급이지만.’
나이는 이십대 중반이니 후기지수가 맞지만, 배분과 실력은 어지간한 중견 고수들을 능가한다.
초음으로 소창후의 단전을 살핀 강엽은 오리알만한 기운이 단전에 들어찬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한 무공 경지를 가늠하진 못해도, 내공만 보면 하후진이나 청수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청수와 붙는다면 볼 만하겠어.’
청수 역시 무당제일검의 제자로서 동년배에서는 당적할 적수가 드문 절정고수.
소창후와 겨룬다면 좋은 승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문제는 접객실 안에 있는 사람이군.’
아미 제일의 기재라 불리는 소창후가 호종하는 사람.
기감을 일깨워도 딱히 걸리는 게 없는 걸로 봐선 기파를 완벽하게 갈무리한 것이리라.
“출입을 허락받았소만.”
“네. 알고 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공손하게 물러나면서도 소창후는 칠호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경거망동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
구파의 본산 제자, 그것도 장문인에게 사사해서 소창후라는 위명을 얻은 고수의 기세는 내상을 입은 칠호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다.
창을 겨누지 않아도 그녀가 익힌 복호항마창(伏虎降魔槍)의 기질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칠호는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하면서도 앙칼지게 눈썹을 치켜떴다.
“뭐, 뭐야?”
“....”
소창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칠호의 존재를 불편해한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다.
그때 강엽이 사이에 끼어들어 나직이 경고했다.
“이 여자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소. 그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굳이 뒷말을 건네진 않았지만, 영민한 사람이라면 이면에 있는 속뜻을 짐작할 터.
소창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무어라 항변하는 대신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때 접객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장경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기싸움은 그쯤 하고 빨랑 들어와. 손님 기다리신다.”
“그럼.”
소창후를 지나친 강엽이 접객실로 들어가자 칠호도 서둘러서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강엽 역시 이채를 띠었다.
‘강하다.’
굳이 초음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막 일어난 저 중년의 비구니야말로 아미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합장한 비구니가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의 혜정이라고 합니다, 강 시주.”
“혜정 사태는 강호에서 난풍혜검(亂風慧劍)이라 불리는 분이야. 너도 들어봤지?”
사태(師太)는 나이 지긋한 비구니를 높여 부르는 말로, 법력이 높은 승려를 대사라고 존칭하는 것과 비슷했다.
소창후가 호위로 나선 데서 미루어 헤아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었다.
소창후의 앞에선 빳빳하게 굴었던 칠호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졌다.
“강엽이라고 합니다, 사태.”
소림에 십팔나한이 있고, 화산에 매화검수가 있듯이 아미파엔 복호십승(伏虎十僧)이 있다.
소창후가 복호십승의 말석이라면 난풍혜검은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
‘낭인전으로 치면 금패급이군.’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초음을 써본 강엽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공은 나랑 막상막하.’
흡혈을 비롯한 각종 기연으로 인해 강엽의 내공은 백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난풍혜검의 내공은 강엽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강엽이 놀란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상중하 세 단전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호흡에 따라 교류... 아니, 공명하는 건가?’
사람의 단전은 하나가 아니다.
흔히 정기신(精氣神)이 깃들어있다 하여 백회와 중단, 기해를 상중하 삼단전이라 일컫는다.
지금까지 초음으로 관찰해본 결과, 딱히 무림 고수가 아니더라도 삼단전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풍혜검처럼 삼단전이 공명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하단전과 중단전에 비해 상단전의 공명은 다소 희박한 감이 있지만, 초음의 능력을 깨달은 이후 살펴본 고수들에 한해서는 처음 보는 사례였다.
‘정기신의 공명... 그렇군. 삼화취정(三花聚頂)이 이런 경지였나.’
흔히 초절정의 고수들은 운기조식을 할 때 세 장의 꽃잎이 피어난다고 하여 삼화쥐정이라 일컫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현상일 뿐.
온갖 서책에서도 삼화취정에 대해선 두루뭉술하게만 설명하여 잘 와닿지 않았는데, 초음으로 난풍혜검을 살펴보니 대번에 그 뜻이 와닿았다.
삼화취정을 목전에 둔 고수와의 만남으로 강엽은 삼화취정의 경지를 고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기연이었다.
* * *
기묘한 자리 배석이었다.
길쭉한 직사각형의 탁자의 사면에 배석한 네 사람이 각기 서로를 마주 보는 형국.
주인된 도리로 상석에 앉은 장경이 칠호를 마주 보고 있었고, 강엽과 난풍혜검이 마주 보고 있었다.
주로 발언하는 사람은 강엽과 난풍혜검이었으며, 장경은 두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이었다.
칠호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심문당하는 처지인 것이다.
강엽은 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사실 아미파가 올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내가 설명하는 게 좋겠는데.”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경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장경의 말은 이랬다.
강엽이 칠호를 사로잡은 이후에 그는 사전에 협의한 대로 흑접에게 원한이 있는 무림 문파를 찾아갔다.
“무턱대고 힘을 빌려달라고 하진 못했어. 흑접에 암살 의뢰를 한 게 꼭 외부인이라는 법은 없잖냐.”
문파의 내부자가 흑접에 청부살인을 넣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장경은 흑접의 살행으로 내부자가 이득을 본 사례는 철저히 배제했다.
“그중에서도 힘이 될 만한 문파들을 추렸는데, 딱 하나가 남더란 말이지.”
“어디지?”
“금정표국(金頂鏢局). 사천에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표국이야.”
아미산의 금정봉에서 이름을 따온 표국이었다.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수십 년 전 아미파에게 은혜를 입은 조상이 표국의 간판을 바꾼 것이다.
이후 매년 막대한 공양미를 시주하며 집안의 딸은 모두 아미파의 속가제자로 보냈는데, 몇 달 전 흑접에 의해 국주 내외가 참변을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표행을 갔던 국주의 아들과 아미의 속가제자로 들어갔던 딸밖에 없었지.”
국주에겐 아들이 하나뿐이었고, 오랫동안 경험을 쌓으며 후계자로 인정받았기에 국주의 아들이 암살을 의뢰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니까 반색하던데... 근데 국주가 죽고 나서 표국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더라고. 외부에선 표국을 흔들고 있고, 내부에선 표두들이 이탈하는 걸 막느라 고생하는 모양이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지 않나? 흑접을 토벌하면 국주의 권위가 설 텐데.”
“나도 그렇게 구워삶았지.”
장경이 킬킬거렸다.
고래로부터 젊은 군주가 왕권을 공고히 다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원정으로 군공을 쌓는 것이었다.
살부의 원수를 쓰러트리는 것만큼 확실하게 국주의 권위를 다질 수 있는 기회가 어딨단 말인가.
“뭐, 늙은 가신들은 표국의 혼란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말로 반대를 했지만 말이야. 잘못하면 표국이 송두리째 날아갈지도 모르니 걱정스러웠겠지.”
그중 한 명이 아미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간 국주의 누이를 찾아가서 설득했던 것이다.
오라비의 무모한 행동을 말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찾아간 것이겠지만 기대는 배신당했다.
국주의 누이는 사문의 존장들에게 달려가 부모의 죽음을 눈물로 호소했던 것이다.
“사실은 나도 아미파가 산문을 나올 줄은 몰랐어. 금정표국만 끌어들이면 만족이었는데 말이야.”
“그 뒤는 빈니가 이어서 설명해도 될는지요? 그리고 저분 시주에게 몇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강엽이 선뜻 허락하자 난풍혜검은 감사의 인사를 보내면서 칠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요하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시선을 받은 칠호가 목을 꿀꺽 움직였다.
“시주는 흑접의 한 자릿수라고 들었습니다. 몇 번째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 일곱 번째예요.”
소창후를 대할 때와는 달리 조신한 태도였다. 난풍혜검이 먼저 예의를 차린 것도 있지만, 삼화취정의 영역에 발을 걸친 고수의 존재감이 그리 만든 것이다.
“그렇군요. 하면, 누가 금정표국의 국주님 내외를 찾아갔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그...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다른 새... 아니, 상위 서열들 의뢰를 다 알지는 못하거든요. 상위 서열들은 몇 명 빼고는 다 사이가 안 좋기도 하고....”
때 아닌 변명에 강엽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상위 서열들 중엔 친구 없다는 말이잖냐?”
“아, 아니거든!? 야, 친구가 없다니! 그냥 그 자식들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서 친하게 안 지내는 거라고!”
“그럼 하급 살수들 중엔 친하게 지내는 사람 있고?”
“어....”
“쯧쯧.”
강엽이 알 만하다는 듯이 혀를 차자 칠호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굴욕을 감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