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흑접 (5)
삶을 지배했던 금제가 사라졌다.
금제가 풀리자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은 칠호는 깨어나자마자 그 사실을 실감했다.
온몸이 땀에 절어 질척거리는데도 시원하고 홀가분한 기분.
흑접의 살수가 된 이후부터 누군가 자신을 쭉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그녀는, 더 이상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금제에서 풀려났다고 완전히 자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네 말대로 흑접은 검각에 있어.”
살아남으려면 몸담았던 조직을 배신해야 한다.
그것은 흑접이 충성을 바칠 만한 조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쉬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칠호가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리자 강엽이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젠장, 내가 배신한 걸 알면 흑접이 날 죽일 거야.”
자의적으로 배신했다면 망설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강엽이 내민 당근과 채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흑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들의 보복이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나 거절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으면 지금 죽겠지.”
원활한 협조를 위해 금제를 풀어주고 상처를 치료해주긴 했지만, 강엽은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 칠호의 턱을 반강제로 들어올려 시선을 맞춘 다음, 서로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나지막이 속삭인다.
“한낱 살수 따위가 불쌍해서 봐줄 만큼 내 감정은 싸구려가 아니야. 명심해라. 네 목숨이 붙어있는 건 네 머릿속에 있는 정보 때문이다.”
“...크, 크읍!”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해.”
“아, 알겠으니 이것 좀...!”
마치 맹수의 아가리가 목덜미를 물고 있는 것 같은 공포에 칠호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흑접이 두렵지만, 강엽도 두려웠다. 그러나 흑접은 멀고 강엽은 바로 앞에 있었다.
‘이 새끼는 괴물이야.’
흑접주와 두 노괴가 괴물이라 한들, 치명상조차 스스로 재생해버리는 강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강엽이 흡혈하는 광경까진 못 봤지만, 재생력만으로도 칠호는 그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무공에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는 불사의 괴물.
아니, 어쩌면 무공 수위와 상관없이 이 괴물이 죽자 살자 나오면 흑접의 누구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칠호는 애써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대답했다.
“흑접은....”
강엽은 흘러나온 정보를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정리했다.
흑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수단으로 스스로를 지키는지, 구성원이 몇 명인지, 흑접주를 위시한 상위 서열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중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흥미를 끄는 정보도 있었다.
“흑접이 한번 궤멸했다?”
“몇 년 전에. 자성검호라는 고수가 있었는데....”
“대충 안다. 흑접이 세 번이나 실패하고 네 번째 되어서야 죽였다고 하던데.”
“다섯 번이야.”
“음?”
“그전에 네 번이나 싸웠어. 상위 서열 중 절반 가량이 몰살당하고, 은퇴한 늙은이들이랑 접주가 나서고 나서야 간신히 죽였어. 그것도 함정을 파고 산공독과 극독을 썼고. 그랬는데도 당시 동원된 살수들이 전멸할 뻔했어.”
“자성검호가 그리 강했나?”
“난 작전에 참가하지 않아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초절정의 고수였다나 봐.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스러운 일이지.”
“으음, 네 말대로라면... 흑접의 실제 전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실제로 그래.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때 입은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했어.”
혼자 싸웠는데도 흑접주가 포함된 흑접의 전력을 거의 궤멸시켰다니. 새삼 자성검호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뒤로 접주는 반쯤 칩거했어. 지금도 노친네들에게 조직을 맡겨놓고 본인은 폐관 중이야.”
“내상을 다스리나? 아무리 내상이 깊어도 몇 년이나 요양하는 건 좀 이상한데.”
“정확한 이유는 몰라. 노친네들만 알걸.”
상위 서열조차 전부 알진 못한다. 특히 흑접주에 대한 정보는 두 노괴가 철저히 통제했다.
유리알 같은 시선이 향하자 칠호는 흠칫 굳어졌지만, 자기는 진실만 얘기했다는 듯이 어금니를 꽉 물고 강엽을 쏘아봤다.
대충 열을 셀 때쯤에야 강엽이 말했다.
“좋아. 믿어준다.”
“하아, 내가 아는 건 전부 말했어.”
“한 가지만 더. 그 장로라는 늙은이가 금제가 발동되면 즉시 알게 된다고?”
“그래. 이십구호가 죽은 것도 그래서 안 거야.”
“금제가 풀린 것도 알까?”
“어?”
칠호가 눈을 껌뻑거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불과 얼마 전까진 금제를 풀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지 않았던가.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금제가 풀린 걸 알았다면 어떤 생각부터 떠올릴까?”
“.......”
칠호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몰라서가 아니라,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
“네가 배신하지 않을까 걱정되겠지.”
기실 장로는 금제가 풀렸다는 것은 몰랐지만, 두 사람 입장에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했다.
“머리를 굴릴 줄 알면 자신들의 정보가 넘어갔다고 생각할 테고. 나 같으면 홍가려를 죽이는 것보다 우릴 죽이는 걸 우선할 것 같은데.”
“자, 잠깐! 난 그렇다 쳐도 넌 어떻게 알고!?”
“살수 한 명이 내가 널 데려가는 걸 봤거든. 여자인데 키는 너랑 비슷할 거다.”
“백팔십이호가 살아있다고?”
칠호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사원루를 습격한 살수들 중 가장 무공이 약해서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건만.
‘아니지, 이 괴물이 그냥 보내줄 리가 없는데?’
아예 까맣게 몰랐다면 모를까, 백팔십이호를 자신을 봤다는 것을 아는데 그냥 보내준다고?
‘아, 혹시 일부러 보내주고, 사람을 시켜 미행해서... 총단 위치를 그렇게 알아낸 건가?’
완벽하게 오해였지만 혈종술에 대해 모르는 칠호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강엽 역시 진실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금제가 풀린 건 몰랐어도 내가 널 데려갔다는 건 알았을 거다. 금제가 발동된 것까지 알았다면 내가 흑접을 캐낸다는 것도 눈치챘을 테고.”
“어... 아, 아마도?”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아직까진 소수의 관련자들만 알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흑접 토벌에 대한 소문이 날 터.
흑접 역시 촉각을 곤두세운 만큼 이쪽의 소문을 면밀히 수집하고 있을 테니, 머지않아 소문을 접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흑접이 사실을 알고 방비를 단단히 굳히면 놈들의 본진에 쳐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였다.
‘미리 의뢰를 받아둬서 망정이지.’
그가 칠호에게 정보를 뽑아내는 동안 장경은 물밑에서 여러 낭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다른 낭인전 분타에 외주를 돌리는 한편 흑접에 원한이 있는 문파를 찾아가서 은밀히 제안한 것.
칠호에게서 정보를 뽑지 못한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겠지만, 장경은 성공할 거라 믿은 것이다.
이젠 강엽이 그 믿음에 보답할 차례였다.
* * *
강엽은 청송객잔을 찾아갔다.
혼자는 아니었다. 칠호를 데려갔으니까.
그녀가 입던 야행복은 다 찢겨 헤졌기에 적당히 구한 무복 위에 피풍의와 죽립을 쓴 행색이었다.
“도망치면 재미없을 거다.”
“아, 도망 안 쳐! 내가 미쳤어!?”
요상약을 먹고 꾸준히 운기한 덕에 호전되긴 했어도 경공을 쓸 만큼은 아니었다. 걸을 때마다 둔중한 통증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죽고 싶진 않았던 칠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얌전히 청송객잔에 들어갔다.
흑접의 살수인 그녀도 낭인전에 들어와본 것은 처음인지라 안쪽을 신기하게 둘러보았다.
“새, 생각보단 별거 없네.”
“어서 오시오, 강 무사.”
홀로 음식을 나르던 전강은 강엽의 뒤편에 엉거주춤 선 칠호를 보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지난 며칠간 강엽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장경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쪽 소저도 환영하겠소. 낭인전은 그 사람이 누구든 손님이라면 내치는 법이 없으니.”
“...이 덩치는 뭐야?”
칠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강은 아무런 기세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객잔의 점소이요.”
칠호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저기 있는 낭인들보다 더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한이 고작 점소이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전강은 굳이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지 강엽을 돌아보았다.
“장 분타주는 손님들과 함께 있소.”
“기다려야겠군요.”
“음, 잠깐 기다려주시오. 강 무사와도 관련이 있는 손님들이라서. 분타주에게 말하리다.”
“누굽니까?”
“그게....”
전강은 주변을 곁눈질했다.
강엽이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이쪽을 신경 쓰는 낭인들을 다분히 신경 쓰는 기색. 손님들의 신분 자체가 비밀이라는 뜻이었다.
[손님들은....]
전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은 강엽은 표정이 굳어졌다.
전강이 올라간 뒤 적당히 빈 자리를 찾아서 앉자 칠호도 얼떨결에 맞은편에 앉았다.
“...아까 전음으로 들은 거지? 혹시 지금 하려는 일과 관련이 있는 손님이야?”
“좀 있으면 알 거다.”
불친절한 대답에 칠호는 내심 구시렁거리면서도 강엽을 자극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따라 마셨다.
오른팔이 부러져서 부목을 댔지만 양손잡이인 그녀는 왼손도 오른손만큼 잘 쓸 수 있었다.
강엽은 강엽대로 예상치 못한 출현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장경이 흑접과 원수진 문파들을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도 위층에 있는 자들에 대해선 전혀 듣지 못했다.
사천 무림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장경이 일부러 빼먹었을 리는 만무.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나, 그들과 얽히는 것은 장경도 전혀 상정하지 못한 사태였을 가능성이 컸다.
“강 무사.”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때 전강이 돌아왔다.
“손님들께서 허락하셨소.”
“알겠습니다. 한데....”
강엽이 칠호를 힐끔거리자 전강이 쓰게 웃었다.
“저 소저도 꼭 데려오라고 하셨소. 장 분타주도 허락했고 말이오.”
“씁, 나도 가라고? 대체 누구길래....”
칠호가 오만상을 썼다. 강엽의 안색이 굳은 걸로 봐선 범상치 않은 손님들일 텐데, 누군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엽은 굳이 설명하는 않고 일어났다.
“여기서 말해주긴 그렇고, 가면 알 거다.”
전음으로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칠호가 방정맞게 떠들면 식당에 있는 낭인들이 전부 알지 않겠나.
강엽이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자 칠호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서도 순순히 따라왔다. 삼층 계단까지 올랐을 무렵에야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쯤 되면 말해줘도 되잖아. 누가 찾아왔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직접 봐라.”
강엽이 위쪽을 힐끔거리자, 그를 따라서 고개를 든 칠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상으로 기감이 둔탁해진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뜻밖이군요.”
한 줄기 맑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흑접의 한 자릿수가 여인일 줄이야. 하긴, 여인이라 하여 살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요.”
그곳엔 검과 창을 패용한 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칠호가 놀란 이유는 상대가 여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원이 승복을 입은 비구니였기 때문이다.
드넓은 강호 무림에서도 비구니들의 문파는 극히 드물다. 사천에 한정하면 오직 하나뿐이었다.
흑접도 두려워하는 백도 정파의 아홉 기둥.
칠호의 눈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 아미파가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