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흑접 (3)
“이봐, 무당 말코.”
“...왜요, 방화범.”
“난 이제 때려죽여도 못 싸운다.”
“저도 하얗게 태웠습니다....”
창룡갑이라는 위험한 절기를 쓴 하후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청수도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나마 요상약을 먹고 잠깐이나마 운기한 덕에 간신히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위가 녹는 게 말이 되나?’
시커멓게 타버린 폐허를 둘러본 청수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어설 힘이 없는 것은 불을 끄느라 개고생한 탓이 더 컸다.
굴러다니는 바가지를 주워 발에 땀띠 나도록 열심히 달리며 연못의 물을 길어나른 것이다.
그나마 연못 근처에서 싸워 불이 그렇게 크게 번지지 않은 거지, 만약 타기 좋은 땔감들만 있었다면 진작 불지옥으로 변했으리라.
“후, 그래도 그 자식 말대로 한 자릿수인지 뭐시기 하는 놈을 생포해서 망정이지.”
사지를 대 자로 뻗고 쓰러진 와중에도 하후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강엽이 부탁한 대로 팔호를 붙잡은 것이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온몸에 불이 붙어 참혹한 화상을 입긴 했지만 어쨌든 살려는 드렸으니까.
“음?”
그때 청수가 쓰러진 팔호의 모습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후 도우, 이 인간 웃는데요?”
“냅둬. 살아서 행복한가 보지.”
“...웃는 채로 죽었습니다만.”
“뭣이!?”
하후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 전신을 내달리는 통증에 머리가 새하얘져서 주저앉은 채 덜덜 떨었지만.
하지만 육신의 고통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죽어? 왜 죽어? 내가 그 새끼 살리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왜 죽어!?”
“아니,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팔호와 싸운 건 하후진인데 그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다.
“참, 근데 강 도우가 독단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수들은 여차하면 독단을 깨문다면서요.”
“헉!”
“...까먹으셨군요.”
“아, 안 돼!”
청수가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잡은 채 절규하는 하후진만 봐도 대충 어찌된 일인지 알 만하지 않나.
팔다리를 잘랐으니 도망칠 힘도 없겠다, 본인도 지쳤으니 강엽의 당부를 잊어먹은 것이겠지.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저 새끼를 살리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하후 도우, 살린 거랑 죽이지 않는 것을 착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그렇지! 요상약! 요상약을 먹이면 돼!”
문득 품을 뒤진 하후진은 허한 느낌에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암만 뒤져도 요상약이 없었다.
“서, 설마?”
“그렇게 쥐불놀이를 했는데 요상약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
“뭐, 전 요상약이 남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먹여서 뭐 합니까? 삼도천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데려올 것도 아닌데요.”
“크윽, 요상약이 있는데 왜 먹질 못하니! 어째 운수가 좋다 싶었더만...!”
강엽의 당부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도 쓸데없이 헛심을 썼다는 게 더 뼈아팠다.
엉금엉금 기어가서 죽은 팔호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하후진의 모습에 청수가 한숨을 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라 잃은 사람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하후진은 참으로 추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죽었다고?”
스산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간질인 것은.
어느새 그들이 있는 곳에 온 강엽이 다가와서 죽은 팔호를 툭툭 건드렸다.
“이놈이 한 자릿수지?”
“....”
“....”
지은 죄가 있는 하후진과 청수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행동이 빠른 놈이 살아남을 가망성이 높다는 것을.
하후진에 비해 그나마 덜 지친 청수가 부리나케 손을 들고 이실직고했다.
“하후 도우가 죽였습니다!”
“야, 이 의리 없는 말코 새끼야!”
빽 소리친 하후진이 주먹을 들다 돌연 뒷목을 잡으며 털썩 쓰러졌다.
“기, 기다려, 강엽! 속지 마! 이건 말코의 함정이다!”
“잘들 논다.”
강엽이 두 사람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청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도망친 놈들은 없고?”
“아까 두 놈이 홍 소저가 있는 데로 갔습니다.”
“그놈들은 내가 죽였어.”
“그러면 딱 한 사람이 있군요.”
창룡갑을 제어하느라 정신이 없던 하후진에 비해 청수는 비교적 차분하게 전세를 살필 수 있었다.
“도망친 여인이 있습니다. 다른 자들과 싸우느라 바빠서 쫓지는 못했습니다만....”
“피는?”
청수가 고개를 저었다.
피를 남겨뒀다면 혈종술로 쫓을 수 있을 텐데, 도망친 여자는 일절 흔적을 남겨두지 않았다.
* * *
한바탕 촌극을 벌인 두 사람은 어떻게 팔호와 만났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적들의 속을 긁는 능력은 뛰어날지언정 말재주가 없는 하후진을 대신해서 청수가 차분히 설명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저간의 사정을 들은 강엽은 그럭저럭 이해했다.
칠호가 혼자 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이쪽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팔호는 벌레를 다루는 술법으로 보표들과 낭인들의 발을 묶고, 본인은 살수들을 이끌고 청수와 하후진을 막아섰다.
그러면서 난장을 피운 틈을 타서 칠호가 홍가려를 몰래 암살하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을 터.
“첩자를 통하지 않고선 짤 수 없는 계획인데.”
“첩자?”
“동선이 효율적이야. 물론 누구 하나 붙잡아서 즉석에서 심문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주먹구구식이고. 한 자릿수라면 그러진 않겠지. 어쩌면 도망쳤다는 여자가 첩자일지도 모르겠어.”
“뭐, 아무튼 우린 최선을 다했다.”
“....”
빤한 시선을 받은 하후진도 변명할 말이 궁색한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강엽은 이제 와서 두 사람을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됐다. 죽었다면 할 수 없지.”
팔호가 독단을 깨물도록 놔둔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실책이지만, 두 사람 모두 죽을 고생을 하며 싸웠으니까.
그 역시 흑접이 두 사람을 막기 위해 이토록 많은 살수들을 동원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근데 넌 어떻게 됐냐?”
“난 잡았지.”
“젠장, 역시 그런가.”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잡았다는 말을 들으니 입맛이 썼다. 청수와 하후진이 아쉬워했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나도 죽을 뻔했고.”
특히 마지막에 칠호가 보여준 동귀어진의 한 수는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그게 심장이나 머리에 꽂혔다면....
‘심장은 그렇다 쳐도 머리가 박살나면 위험해.’
어쩌면 재생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흑접에 쳐들어가는 건 문제 없을 거다. 의뢰도 어떻게든 될 것 같거든.”
물론 사원루주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토벌이 실패했을 때 흑접의 분노를 감당할 위험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홍가려는 아니지.”
이미 흑접의 표적이 된 그녀는 무서울 게 없었다.
의뢰에 막대한 돈이 든다지만 어차피 죽으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이 아닌가?
“허참, 통 큰 여자일세. 몇 명이나 고용할지 몰라도 돈이 무진장 많이 깨질 텐데.”
하후진이 혀를 내둘렀다. 그와 강엽을 고용하는 데만 해도 은전 일만 냥은 우습게 깨진다.
다른 은패급 낭인들까지 고용하면 의뢰비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텐데 그걸 다 감당하겠다고?
“아마 재산이 거덜나겠지.”
다만 워낙 쌓아놓은 명망이 높으니 잠깐 알거지가 되어도 다시 부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그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뒤 사원루주가 새로운 의뢰를 맡긴 것이다.
* * *
백팔십이호는 살아남았다.
팔호가 죽기 전에 남긴 명령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서 총단에 사실을 알려라.’
어차피 그녀의 무공은 싸움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전령으로 써먹고자 했던 것이다.
백팔십이호는 명령대로 도망쳐서 저잣거리에 숨었다.
다행히 추격자는 붙지 않았다.
‘그놈들도 지쳤겠지.’
혹시 남아있었다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나 팔호의 명령을 거부할 순 없는 노릇.
일이 끝난 뒤 합류하기로 한 지점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칠호는 오지 않았다. 십오호와 십육호 역시 소식이 끊겼다.
문득 백팔십이호는 깨달았다.
‘암살은 완전히 실패했구나.’
흑접의 한 자릿수가 두 명이나 동원된 작전이 처참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하는 수 없이 합류 지점을 떠나려고 할 때, 백팔십이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어?”
어두운 달밤 아래, 흑포를 나부끼는 청년이 어깨 위로 기절한 여인을 짊어지고 가고 있었다.
거리가 꽤 있긴 하지만 청년의 인상착의가 낯익었다.
청년이 어깨에 짊어진 여인 역시.
‘저건 귀영과 칠호님?’
총단에 실패 사실을 보고하라는 팔호의 명령이 귓가에 아른거렸지만, 칠호를 두고 갈 순 없었다.
운 좋게 칠호를 살려서 데려간다면 포상은 받지 못해도 문책은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어.’
십여 장 뒤에서 기척과 소리를 죽인 채 뒤를 밟았다.
그렇게 골목을 돌았을 땐 아무도 없었다.
“알아서 제 발로 걸어와주는군.”
“헉!”
등 뒤에 닿은 섬뜩한 느낌에 그녀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강엽은 진작에 미행을 눈치채고 암신으로 그녀의 감각을 속이고 배후를 점했던 것이다.
소스라치면서도 그녀는 잽싸게 연막탄을 터뜨렸다.
살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
촤아악!
하지만 날카로운 경파가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큽...!”
백팔십이호는 아릿한 통증을 참으며 땅을 박차고 뛰었다. 이젠 칠호를 살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공명심을 버린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제발 쫓아오지 마라!’
그녀의 바람대로 강엽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튄 피를 응시할 뿐이었다.
* * *
칠호는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으윽....”
골이 지끈거린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붙잡은 그녀는 한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구겼다.
‘부목?’
그뿐만이 아니다.
큼지막한 구속구가 발목을 옥죄였는데, 그것은 사슬과 연결되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이깟 구속구 따위 얼마든지 자르고 빠져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상 때문에 공력을 일으키면 단전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으윽, 여긴 대체 어디야? 난 어떻게 된 거지?’
밤눈이 좋지 않았다면 한 치 앞도 구분하지 못할 칠흑같은 어둠 속. 야명주나 호롱불이 있으면 좀 나을 텐데 그런 것 따윈 없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그그긍...!
갑자기 천장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내려왔다.
“깨어났군.”
낯익은 목소리에 칠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계단을 내려온 강엽이 의자를 가져와서 그 위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칠호를 내려다보던 강엽이 불쑥 물었다.
“살고 싶나?”
“하, 죽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어?”
“정보만 말하면 살려준다.”
“소용없는 짓이야. 우리는....”
“금제에 걸려 있지. 이십구호라는 놈을 통해 겪어봐서 알아.”
“역시 네가 이십구호를 죽였구나.”
정황상 그럴 거라고 짐작했지만, 역시 강엽이 이십구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금제가 발동된 것이다.
“실수였지. 술법에 금제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거든. 그래도 덕분에 실마리를 잡았지만.”
“실마리라니 그게 무슨?”
“그건 알 바 없고. 협력할 건지 거부할 건지만 말해라. 협력하면 금제를 풀어주지.”
“...뭘 알고 싶은데?”
“흑접의 총단이 있는 곳. 흑접주 포함 흑접의 상위 서열들에 대한 정보.”
“하핫, 내가 배신할 것 같아?”
“할 것 같은데.”
“뭐?”
“아니라면 날 보자마자 혀부터 깨물었겠지. 나와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제안을 들을 용의가 있어서 아닌가?”
“...!”
칠호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 말한 대로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흑접은 조직에 목숨을 바치라고 세뇌하듯 가르치지만, 그 효과는 영원하지 않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굵어진 상위 서열들은 세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단지 머릿속에 새겨진 금제 때문에 감히 배신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를 뿐.
강엽의 말처럼 금제를 풀 수 있다면, 그래서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면....
“물론 네가 어디 가서도 나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도록 나름의 조치를 해두겠지만, 그것만 빼면 널 자유롭게 풀어준다고 약속하지.”
기실 백팔십이호를 그냥 보내준 시점에서 칠호의 협력은 그렇게까지 절실하진 않다.
다만 백팔십이호가 이대로 총단에 돌아갈 건지 모르거니와, 돌아간다고 해도 칠호를 통해 내부의 정보를 알아두는 편이 유리할 터.
“킥, 웃기네. 아주 지랄났어. 나 같은 살수년을 그냥 풀어주겠다고?”
“난 협객이 아니거든.”
홍가려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으나, 소위 올바른 길만을 고집하기 위해 결과를 내버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하물며 그게 자신의 생존과 직결됐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다시 살수짓을 할지, 다른 일을 할지는 네가 정해라. 재수 없이 객사하면 네 팔자겠지. 내가 거기까지 책임질 이유가 있나?”
“.......”
“생각할 시간을 주지.”
강엽이 의자를 치우고 일어나자 칠호가 급히 물었다.
“자, 잠깐! 어디 가는데!?”
“부엌에.”
“엉?”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지금도 밥 짓다 내려온 거다. 타기 전에 불 꺼야 해.”
칠호는 어이가 없어 강엽을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남은 생사가 걸린 결정을 내리는 판국인데 이게 무슨...!
하지만 그녀의 위장은 참으로 솔직했다.
꼬르륵!
“...밥 좀 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