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호위 (12)
백팔십이호의 무공은 뛰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무재는 다른 살수들에게 크게 못 미친다.
무림 고수를 암살하는 살행엔 도저히 못 써먹을 정도였기에, 원래는 자격 미달로 처분됐을 운명.
대신 그녀는 인피면구 제작과 역용술의 재주를 갖고 있었다.
또한 집단에 잠입해서 정보를 빼내는 데도 능했다.
몇 년간 그녀를 눈여겨존 흑접은 백팔십이호를 처분하는 대신 간자로 암약하며 조직에 헌신할 기회를 주었다.
‘사원루에 잠입하라.’
만약 사원루가 시비들을 모집했다면 한결 수월했으리라.
하지만 알아본 결과 인맥이 없다면 사원루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중경에 온 첫날부터 사원루 근처의 다루에 자릴 잡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신분, 체형, 표정, 심지어 걷는 자세까지.
사원루의 시비들은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휴가를 받고 밖으로 나오곤 했다.
백팔십이호는 자신과 체형이 가장 비슷한 시비를 골라서 납치, 그녀를 모처로 끌고 가서 고문했다.
그러면서 이름과 가족 관계, 사원루 내의 인간관계 등 필요한 정보들을 쏙쏙 빼먹었다.
이후 홍가려에 대한 정보까지 알아낸 뒤에 시비를 죽이고, 얼굴 가죽을 뜯어 인피면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직의 명에 따라 홍가려가 부재한 틈을 타서 몰래 그녀의 방에 들어가 예고장을 두고 왔다.
‘그냥 내가 방에 몰래 숨어있다 자고 있을 때 조용히 죽이면 안 되나? 꼭 예고장을 보내야 해?’
그녀가 보기엔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어쩌겠나. 조직이 까라면 까야 하는 말단인 것을.
선배들은 흑접의 예고장 자체가 조직의 악명을 드높이는 수단이며 다른 살문과 차별화되는 홍보 전략이라는 둥 뭔가 그럴듯한 개소리를 지껄였지만, 백팔십이호는 일을 참 어렵게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나마 예고장을 만지면 ‘천리추영법(千里追影法)’이라는 술법이 발동되어 표적이 어디로 도망치든 쫓을 수 있다는 게 위안일까.
어쨌든 예고장을 배달한 뒤에도 사원루를 떠나지 않고 동태를 지켜본 그녀는, 이후로도 혼란한 틈을 타서 동료들에게 정보를 보내는 등 소임을 다했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원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다 됐습니다.]
[이음새는... 좋아, 문제없고.]
차라리 인피면구를 하나 더 만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인피면구를 만드는 공정은 복잡한 데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생피가 썩지 않도록 약에 담가 방부 처리를 하고, 그걸 햇볕에 말리고, 다시 약에 담근 뒤 햇볕에 말리고....
지금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근데 옷이 좀 많이 끼네. 특히 가슴이. 그래도 허리는 넉넉해서 다행인가....]
[....]
[뭐, 붕대로 압박하면 좀 낫겠지.]
칠호의 말에 백팔십이호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우울한 감정을 느꼈지만 속으로 꾹 삼켰다.
하늘같은 한 자릿수 앞에서 그녀 같은 말단이 감히 볼멘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지 않은가?
미리 챙긴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전 가보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그래. 조심해서 가렴.]
들어오는 것 못지 않게 나가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제 살 길은 만들어놓았다.
백팔십이호가 사라진 뒤 그녀로 위장한 칠호는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질색했다.
‘쓰읍, 하필이면 변소에서 만나자고 해가지고.’
위장 신분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숙지했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얌전히 시비 노릇이나 하며 지내야 하리라.
* * *
사원루의 시비들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청소나 빨래 등 허드렛일을 하며, 다른 하나는 예인들을 시중들며 편의를 봐주었다.
어느 쪽이 더 힘들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일견 후자가 더 편할 것 같아도 어떤 상전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랐으니까. 성미가 까탈스러운 상전을 만나면 일이 고달파졌다.
그러나 전자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뭐 힘 쓰는 거야 별거 아닌데....’
어렸을 적부터 지옥같은 수련을 버텼던 칠호였다.
철이 들기도 전에 두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히며 살아왔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며 살수 비기를 익혔고, 경쟁이라는 명목으로 함께 수련한 동기를 죽였다.
그 시절에 비하면 허드렛일을 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까짓 게 뭐라고 앓는 시늉을 하겠나.
분명히 그럴진대....
“너, 여기 먼지 묻은 거 안 보여? 내가 제대로 닦으라고 했어, 안 했어?”
“예, 하셨지요.”
“근데 이게 제대로 한 거니?”
손끝에 묻은 먼지를 들이밀며 비아냥거리는 시비의 모습에 칠호는 혀를 내둘렀다.
먼지가 많이 쌓인 것도 아니고, 서랍장 아래 구석진 곳에 조금 있는 걸로 꼬투리를 잡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같은 일이 며칠간 계속 반복되니 옴팡지게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어휴, 빡친다고 이것들을 쥐어팰 수도 없고.’
똑같은 시비인 주제에 몇 년 먼저 들어왔답시고 선배 행세를 하며 군기를 잡는다.
본인들도 지금 상황이 짜증나니 만만한 사람을 골라 갈구는 것이다.
애당초 이런 상황을 만든 게 흑접이니 칠호가 당하는 건 자업자득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것들은 평소에도 이랬을 거야.’
백팔십이호도 말했다. 기껏 체형이 비슷한 사람을 골라서 위장했더니 다른 시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예사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헐뜯고 망신을 주기까지.
‘이 잡것들아. 동료가 혼나면 좀 도와달라고.’
누구도 나설 생각을 못했가. 칠호를 갈구는 시비들은 가장 오래된 고참이었던 것이다.
“너 진짜 구제불능이구나. 칠칠맞기만 하고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아니면 우리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건가? 우리들 엿 먹어보라고?”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칠호가 사과해도 시비들은 화를 냈다. 칠호가 건성으로 사과한다고 여긴 것이다.
기어이 손찌검이 날아왔다.
‘피해야 하나?’
순간 칠호는 고민했다. 저걸 피하면 더 길길이 날뛸 텐데.
하지만 자칫 손톱에 걸리면 애써 마련한 인피면구가 찢겨질 수도 있었다.
이내 결심을 내린 칠호가 화들짝 놀란 시늉을 하며 손찌검을 피하자 시비의 낯짝이 일그러졌다.
“이년이 보자보자하니까... 이젠 피해?”
다른 시비들까지 덩달아 표정이 굳어졌다.
차라리 한 대 맞아줬으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텐데, 칠호가 피해버리는 바람에 일이 더 커졌다.
칠호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썅, 이십구호랑 삼십삼호 그 새끼들이 똑바로 처신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는데.’
묵묵히 굴욕을 감내하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살수들에게 쌍욕을 박을 때였다.
“거기까지만 하시오.”
“...무사님들이 여긴 웬일로?”
시비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스무 명쯤 되는 보표들과 낭인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녀들의 입김이 먹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시비들을 대할 때뿐이었다.
그럼에도 한 시비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무사님들이 참견하실 일이....”
“소저, 우리가 한가한 줄 아시오?”
“...네?”
“우린 일하러 왔소. 한데 우리가 소저들의 눈치를 보고 있어야겠냐는 말이오.”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건진 시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대표로 나선 보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린 점검을 하러 왔소. 그러니 소저들은 저쪽에 한 줄로 서주시오. 허락받지 않고 입을 여는 사람은 불복하는 걸로 알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하겠소.”
시비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지시를 따라 쭈뼛쭈뼛 섰다.
멀쩡히 일을 하고 있던 시비들까지 영문도 모른 채 불려나왔다.
‘갑자기 뭔 뜬금없는 점검이야?’
칠호도 의아하기는 매한가지.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괜찮아. 의심받을 일 따윈 없어.’
그녀는 백팔십이호 못지않은 변장의 귀재였다.
백팔십이호가 표본을 보여준 덕에 말투나 목소리, 심지어 걷는 자세까지 똑같이 따라했다.
함께 살고 있는 시비들까지 그녀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지 않나?
“걱정하지 마시오. 평범한 점검이니까. 이미 다른 곳도 지나쳤으니 긴장할 것 없소.”
보표들과 낭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시비들이 살고 있는 전각을 뒤지기 시작했다.
몇몇 시비들이 수치심에 떨긴 했지만, 옷장처럼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뒤지는 일은 없었다.
‘침입자가 숨어들기 좋은 곳만 찾네. 하는 짓만 보면 점검이 맞긴 한데....’
보표들의 얼굴에도 마지못해 한다는 티가 났다.
그때였다.
‘어?’
칠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카만 흑색 장포를 입은 청년.
다소 마르고,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를 지닌 청년이 대청에 올라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칠호는 청년이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귀영, 저 인간이 왜 여기서 나와?’
강엽에 대해 알 만큼은 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파란을 일으킨 신진고수. 기이하리만치 밤에만 일하기를 고집한다고 하던가.
사원루에서도 밤에만 일하는데, 웬일로 점심 나절이 다 된 시간에 보표들과 함께 온 것이다.
칠호는 뿌연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 탓에 좀 흐릿한 것은 신경 쓰지 못했다. 원래 중경의 날씨는 연중 햇볕이 쨍쨍한 날이 드물었다.
칠호가 의구심을 품는 사이 강엽은 시비들을 불러다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있었다.
뻔한 얘기들이었다. 밤에 혼자 다니지 말라느니, 혹여나 수상한 사람을 보면 보표들이나 낭인들에게 즉시 알려달라고 하는 말들.
그때 시비 중 한 명이 칠호를 흘겨보면서 강엽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년이?’
칠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일전에 그녀가 홀로 밖에 나갔던 것을 강엽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던 것이다.
그때 나간 것은 그녀가 아니라 백팔십이호였지만, 두 사람이 다른 인물임을 알지 못한 시비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
한 방에서 같이 묵으니 우연히 드나드는 것을 봤거나 침상이 빈 것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대강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린 강엽이 칠호에게 다가왔다.
칠호가 짐짓 두려운 척 주춤거렸다.
“무, 무사님?”
“밤에 혼자 나간 적이 있다고?”
“...배가 아파서 뒷간에 갔습니다. 순찰을 돌던 보표님들께서 확인해주실 거예요.”
“그래?”
강엽이 눈길을 돌리자 보표들이 나와서 그녀의 말이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칠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날 백팔십이호가 보표들과 마주쳤던 게 이런 행운으로 돌아올 줄이야?
“미안하군. 형식적인 확인이니 긴장하지 마라.”
“아....”
내심 칠호가 곤경을 겪기를 바랐던 시비들은 그녀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아쉬워했다.
‘작전 시작되면 저것들부터 족칠까?’
칠호가 입맛을 다셨다. 홍가려를 죽일 때까진 자중하라고 당부했던 팔호의 말만 아니었어도 멱을 땄을 텐데.
그때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강엽이 기습처럼 질문을 던졌다.
“괴롭힘을 당했던 것 같은데.”
“네?”
“아닌가?”
“아, 그, 그게....”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다. 마침 시비가 필요했거든. 사원루가 붙여준 시비가 일을 영 못해서 말이야.”
뜻밖의 제안에 칠호는 물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비들까지 깜짝 놀랐다.
칠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뭔데. 왜 이러는 건데?’
켕기는 게 많은 그녀는 강엽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순히 동정심에 호의를 베푸는 걸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걸까?
‘눈깔 보니 음심을 품은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진 않았다. 백팔십이호가 만든 인피면구는 전문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했으니까.
칠호는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비들에게 갈굼당하는 건 짜증날 뿐 괴로운 건 아니었다.
결행 날짜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 굳이 강엽을 따라가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고.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서툴러서 무사님께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방금 전에 혼난 것도 실수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야.”
강엽이 너무 시원하게 물러나자 칠호는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별다른 뜻이 없는 순수한 호의였던 걸까?
“그럼 난 가보겠다.”
“네, 살펴가셔요.”
칠호는 생각지도 못했다. 강엽과 마주친 시점에서 이미 변수가 생겼다는 것을.
흑접에서 한 자릿수에 오른 그녀도 초음의 파동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단전을 더듬어 내공 수위까지 파악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찾았다.’
등을 돌린 강엽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기가 배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