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71화 (70/450)
  • 12화. 호위 (9)

    “대단하군.”

    강엽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구타했음에도 이십구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강엽을 신랄하게 비웃었다.

    “키킥... 이깟 거... 간지럽지도 않다.”

    “당연히 안 간지럽겠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처맞았는데 간지러우면 맛이 간 거 아닌가?”

    얼마나 처맞았는지 얼굴이 만두처럼 불어터져서 원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열 손가락은 이리저리 분질러졌고, 팔목과 무릎 관절도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 있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충격으로 졸도하거나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신이 되었음에도 이십구호의 의지는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았다.

    “흐흐, 네놈 고문은 별로라고. 헛수고니까 포기해라.”

    고문은 의외로 섬세한 기술이다.

    입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면서도 목숨을 해치면 안 된다.

    다짜고짜 병신을 만드는 건 하수나 할 짓이다.

    고통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옥죄여야 마음을 꺾을 수 있는 법.

    강엽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내가 너무 초보적이었어. 분근착골(分筋錯骨)을 배웠다면 알차게 써먹었을 텐데.”

    근육을 끊고 뼈를 분리하는 분근착골은 극소수의 문파들만 가진 비전이었기에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근착골이라는 말에 잠시 긴장했던 이십구호도 강엽이 그걸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만 앞니가 부러져서 발음은 좀 샜다.

    “그냥 헛심 쓰지 말고... 그냥 죽여.”

    “왜 그렇게까지 하지?”

    “뭐?”

    “왜 그렇게 흑접에 충성하냐고. 목숨을 걸 만한 조직은 아닌 것 같은데.”

    앞서 죽은 살수들과는 다르다.

    다른 놈들은 어떤지 몰라도 이십구호는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부하들을 버리면서까지 자기 목숨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생존욕구가 투철한 놈이었다.

    한데 손가락이 부러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흐흐... 왜일 것 같으냐?”

    “글쎄, 조직의 살수가 배신했을 경우를 대비한 조치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

    “독단이 있긴 하지만, 그건 고문당할 것을 대비해서 편히 죽으라고 준 것 같고.”

    이십구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강엽의 말이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조치가 뭔지는 몰라도 아마 굉장히 강력하고 즉발적인가 본데.”

    이십구호가 맹목적으로 흑접에 충성한다고 보기엔, 죽은 삼십삼호와의 대화만 떠올려봐도 어폐가 있었다.

    맹목적으로 충성했다면 자기 보전보다는 임무 완수를 중시했을 테고, 삼십삼호의 말마따나 한 자릿수 번호에게 일을 맡겼을 테니까.

    하지만 공을 빼앗기기 싫다고 거부한다면, 이는 조직보다는 개인을 중시한 게 아닌가?

    “너처럼 자기 자신을 중시하는 놈이 막상 목숨이 경각에 달할 땐 입을 다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강엽은 곧 나름의 답을 내놨다.

    “금제술(禁制術)인가?”

    모산파의 비급에도 적혀있는 술법이었다.

    종류는 다르겠지만 이십구호의 몸에 새겨진 것도 아마 비슷한 종류의 술법일 터.

    만일 흑룡교의 술법이 살수들에게 걸려있고, 그들이 배신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하는 즉시 발동하게끔 되어 있다면?

    그 고통이 고문에 비교할 수 없이 끔찍해서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라면?

    ‘그럼 입을 다물 만한데... 잠깐.’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흑접의 살수들이 망혼소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눈에 밟혔다.

    그때는 망혼소가 더 강하게 작용했나 보다 하고 넘겼지만, 만약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면....

    ‘술법끼리 충돌했을 가능성도 있겠어.’

    이십구호가 금제 때문에 정보를 누설할 수 없는 거라면 심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망혼소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것은 가치가 있을 터.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강엽은 이십구호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다.

    이미 열 손가락은 물론 팔과 다리까지 아작난 이십구호는 대항할 수 없었다.

    “흐, 소용없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비릿하게 입가를 들어올린 이십구호가 강엽의 수고를 비웃었을 때.

    -휘이이이익!

    고막을 때린 한 줄기 휘파람이 심령을 흔들었다.

    “흐읍!”

    이십구호의 동공이 커졌다.

    안구가 터질 듯이 충혈되며 시퍼렇게 멍든 이마 위로 핏줄까지 삐죽 불거졌다.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십구호의 모습에도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무언가 반응이 나올 때까지 계속 망혼소를 퍼붓고 또 퍼부었다.

    “끄으윽! 네놈...!”

    “안 되지, 넌 계속 들어야 해.”

    뻐억!

    이십구호가 공력을 끌어올려 청각을 보호하려 하자 신발 앞코가 가차없이 명치에 꽂힌다.

    “우웩!”

    허리가 새우처럼 꺾인 채 속을 게워내는 이십구호의 귓가로 망혼소가 퍼부어졌다.

    손가락을 부러뜨려도 너끈히 버텼던 놈이 이제 와서 사지를 비틀며 새된 비명을 지른다.

    심령이 흔들리자 단단한 이성도 덩달아 흔들리는 것.

    “끄르르륵! 주, 죽여...!”

    고막이 터진 귓구멍은 물론 칠공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나와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

    하지만 이십구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붙잡으려고 했다.

    쇠심줄처럼 질긴 의지에 감탄하면서도 강엽은 망혼소의 위력을 재차 끌어올리고, 초음의 파동을 이십구호의 체내로 침투시켰다.

    굳이 이 시점에서 초음을 쓴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초음 자체로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나, 초음의 파동이 장기와 혈도의 외벽에서 반사되면서 오감이나 기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을 주었던 것이다.

    반사된 파동을 받아들인 강엽은 이십구호의 체내를 손금 보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놈의 단전이 얼마나 큰지, 공력이 어떤 식으로 움트고 있는지, 오장육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당연히 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여튼 암신 이상으로 사기적인 능력이야.’

    강엽이 혀를 내둘렀다.

    암신이 회피와 기만에 특화된 능력이라면, 초음은 그보다 한발 앞서나간다.

    공력의 흐름을 파악하여 적이 어느 부위로 어떻게 공격할지 한 박자 앞서 예측할 수 있는 능력.

    여기에 흡혈귀의 초감각과 강엽이 지닌 통찰력이 합쳐지면, 전투 상황에서는 가히 예지나 다름없다.

    이 능력 덕에 강엽은 이십구호가 필살의 한 수를 숨기고 쇄도했던 것도 사전에 파악했고....

    “역시 머리에 금제를 해뒀군.”

    지금처럼 망혼소에 자극받은 금제가 폭주하는 것도 일목요연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낙인처럼 새겨진 술법의 기운이 헐거워지면서 척수를 통해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끄윽! 어, 어째서...!?”

    이십구호 역시 금제가 발동된 것을 느꼈다.

    여태껏 모진 고문을 버틴 게 무색하게도 폭주할 조짐이 보이자 절망감이 찾아왔다.

    “어억...! 끼익...!”

    이어지는 광경엔 강엽도 말문이 막혔다.

    근육이 경직되고 뼈가 으스러지더니, 오장육부마저 조각조각나는 게 아닌가?

    이십구호가 피거품을 물며 강엽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으나, 그 손마저 뒤틀리고 찌그러져서 내부로 수축되고 있었다.

    마치 제 몸에 잡아먹히는 듯한 참상.

    이윽고 온몸의 피와 체액, 이름 모를 찌꺼기들까지 쥐어짜낸 이십구호는 제 몸통만한 공처럼 구겨진 채 피웅덩이에 나뒹굴었다.

    적의 죽음에 익숙한 강엽도 아연해지는 무참한 죽음이었다.

    ‘이게 흑룡교의 술법....’

    왜 흑룡교가 마교로 불렸는지 알 만했다.

    ‘살수들에게 모두 이런 조치를 했다면 배신은 꿈도 못 꾸겠군.’

    사로잡은 다른 살수들도 마찬가지일 터.

    다만 살수들의 몸에 걸린 금제가 망혼소에 반응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상당한 수확이었다.

    금제의 발동과 결과까지 낱낱이 확인한 덕분에 금제가 어떤 원리로 발동하는지 대충 감을 잡았으니.

    하필이면 머리에 새겨진 데다, 워낙 복잡하게 얽힌 탓에 당장 금제를 푸는 것은 무리지만, 그 과정을 역산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강엽은 시체조차 온전히 남겨두지 못한 이십구호를 씁쓸하게 바라보다 물주머니를 들었다.

    놈의 비참한 죽음과는 별개로, 어쨌든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피를 마셔야만 했으니까.

    * * *

    머리가 혀옇게 샌 노파가 걷고 있었다.

    등이 굽은 탓에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파는 적어도 겉으로 봤을 땐 특별할 게 없었다.

    좌우에 협봉검을 찬 흑의인들이 호종하는 것만 빼면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노파였다.

    하지만 노파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살기를 마주한다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갈 것이다.

    노파를 맞이하는 흑의인들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장로 어르신을 뵙습니다.”

    “총관은 있는가?”

    “예, 바로 아뢰겠습니다.”

    하지만 흑의인들이 안에 기별을 하기 전에 문 안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라고 하도록.”

    흑의인들이 공손히 문을 열자 노파가 호종하는 자들을 놔둔 채 홀로 들어갔다.

    그곳엔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 노인이 있었다.

    노파가 들어왔음에도 시선 한번 주지 않은 노인이 무언가를 끄적이며 물었다.

    “공사다망하신 누님께서 누추한 곳까진 무슨 일이시오?”

    “금제가 발동했느니라.”

    “....”

    노인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붓을 놀리며 물었다.

    “죽은 놈이 누구요?”

    “이십구호라 불리는 아이다.”

    “중경제일미를 암살하는 일에 투입된 놈이구먼. 성격은 급해도 임무에 실패한 적은 없는 녀석인데....”

    흑접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두 사람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노파는 살수들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가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머리 노인은 암살 의뢰를 알선하고 각 살수들에게 일을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다.

    뺨을 긁적거린 대머리 노인이 물었다.

    “접주께선 알고 계시오?”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럼 내가 말씀드리겠소. 그게 모양새가 좋겠지. 한데 다른 놈들은 금제가 발동되지 않았소?”

    “발동되진 않았으나 끈이 떨어진 것은 느껴진다.”

    “전멸했다는 말이구려. 삼십삼호도 보냈는데 설마 실패할 줄은 몰랐는데... 자존심이 상하는구만.”

    “다음엔 한 자릿수를 보내야 할 게다.”

    “허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인데.”

    “놈, 자성검호의 일을 잊은 것이냐!”

    준엄한 꾸짖음에 대머리 노인이 움찔 떨었다.

    자성검호의 암살은 조직의 명운을 걸었던 작전이었다. 자성검호 하나를 해치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살수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한 자릿수 번호를 비롯한 수십의 살수들을 투입했는데도 해치우지 못해서 일선에서 물러난 그들과 흑접주까지 나서고 나서야 자성검호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대머리 노인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하지만 표적은 힘없는 계집년에 지나지 않소. 한 자릿수를 투입하는 것은 낭비외다. 이런 일까지 한 자릿수 애들한테 주면 밑의 애들한테 어떻게 경험을 쌓게 해주겠소?”

    “쯧쯧,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십구호와 삼십삼호가 당했다. 애매하게 전력을 투입할 바엔 확실한 손패를 쓰는 게 낫다. 필시 무시할 수 없는 고수가 표적을 지키고 있을 게야.”

    “...끄응, 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 어쩌겠소. 하나 일단 어찌 실패했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요. 그래야 정확한 전력을 보낼 수 있을 것 아니오.”

    “그렇게 하거라.”

    노파도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한 자릿수의 번호들이 흑접의 총단을 빠져나가 중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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