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호위 (8)
‘어떻게 이런 일이?’
이십구호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숨은 장소는 산세가 험한 임봉산(臨峰山)에서도 으슥한 곳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안개가 짙고, 흔적도 남겨두지 않았는데 어떻게 찾아왔단 말인가?
반면 강엽은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나 좋은 짓만 골라서 하지?’
살수들 딴엔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었으리라.
뿔뿔이 흩어져서 야산에 숨는다면 추종술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단지 강엽이 혈종술이라는 개세적인 술법을 쓰는 덕에 그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을 따름.
오히려 살수들로선 본의 아니게 강엽이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준 격이었다.
동이 터서 천시를 얻진 못했으나 어둡고 안개가 짙은 산에 들어와서 지리를 얻은 셈.
‘아니, 천시도 얻은 셈인가?’
동이 트기 전에 산에 들어와서 응달만 찾아다녔으니 말이다.
물론 우거진 나뭇잎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피부를 아프게 했지만, 고통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혈종술로 살수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엽은 암신을 써서 은신했다.
그리고 놈들의 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들었다.
흑접 내부의 서열, 놈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등등.
앞으로 알아야 할 정보는 두 가지였다.
“제안하지.”
“뭣이?”
“흑접주를 포함한 상위 서열에 대한 정보, 그리고 총단에 대한 정보를 내놔라. 그럼 이 자리에선 그냥 보내주마.”
“헛소리를.”
이십구호가 깔보듯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속으로는 살아남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놈의 제안은 일고할 가치도 없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승산은 거의 없다.’
삼십삼호가 멀쩡했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유일한 술사인 삼십삼호가 죽은 이상 가망이 없었다.
이십구호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하급 살수들을 던져주고 목숨을 보전하여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
부하들을 다 죽이고 혼자 살아남으면 문책을 받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살아서 이 소식을 전해야 하니까.
강엽을 포위한 부하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춘 그가 기습처럼 외쳤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것이 흑접의 정신이지!”
그 외침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흑접의 살수들이 일제히 강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정작 부하들을 독전한 이십구호는 누군가 옷깃을 잡아당긴 것마냥 뒤로 쭉 밀려났다.
“하하! 네가 택한 싸움이다, 귀영! 악으로 깡으로 버텨봐라!”
이십구호가 내빼자 살수들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이어갔다.
살수라고 해서 무조건 협봉검이나 암기만 쓰는 것은 아니지만, 방해물이 많은 주변 지형을 고려해서 작은 병장기를 썼다.
가장 먼저 쇄도한 것은 초승달을 닮은 두 칼날을 합쳐서 만든 계조월(鷄爪鉞)이었다.
칼날 양옆으로 또 다른 칼날이 황소의 뿔마냥 이어진 구조.
쉬아앙!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살수가 양손의 계조월을 교차하듯 휘둘렀다.
하나를 막으면 하나는 못 막는다.
뒤로 피할 수밖에 없는데, 등 뒤에선 세 갈래의 칼날을 지닌 필가차(筆架叉)가 날아오고 있었다.
극독을 발라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칼날.
강엽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교차한 두 살수가 양손에 든 병장기로 강엽을 찌르고 베었다.
이내 그들의 눈이 쥐방울 만하게 커졌다. 베었는데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그들의 귓가로 동료들의 전음이 들려왔다.
[머리 위다!]
[등 뒤다!]
서로 다른 내용에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강엽의 위치를 알려준 살수들도 혼란스러웠다.
강엽이 둘로 나뉘었기 때문.
“어억!”
사실 둘 다 허상이었다.
우드득!
강엽의 손이 가장 멀리 떨어졌던 살수의 머리를 잡아 몸 안에 억지로 욱여넣는다.
자기 몸통에 머리가 파묻힌 살수는 부러진 목뼈가 장기를 찌르며 숨이 끊겼다.
시체를 내던진 강엽이 장내를 쭉 둘러봤다.
“세 놈... 아니, 네 놈 남았나?”
도망친 이십구호까지 합치면 네 명.
강엽이 굳어진 살수들을 향해 입가를 들어올렸다.
“입은 하나면 충분해. 빨리 항복하는 놈만 살 거다.”
“....”
살수들의 눈빛이 식었다.
이십구호가 자신들을 사석으로 썼다는 갈 알지만, 두 눈은 강엽에 대한 살심으로 차갑게 번들거린다.
‘구양세가의 암검들과 비슷한 부류인가?’
스스로를 가문의 도구라고 칭했던 암검들처럼 흑접의 살수들도 감정을 거세당한 것이리라.
“항복하기 싫으면 됐다. 잡은 다음에 물어보지.”
강엽이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휘리릭!
“흡...!”
동굴 안에 메아리치는 휘파람.
망혼소의 술법은 단순히 청력을 흔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심령을 할퀴었다.
그런 그들의 귀로 다시 한번 망혼소가 강타했다.
-휘이이이이익!
“으윽!”
살수들의 휘청거리는 사이 앞으로 뛰어든 강엽이 살수의 안면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아름드리나무에 찍어버렸다.
“그럼 이제 세 명 남았... 응?”
강엽이 말하다 말고 흠칫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살수들이 눈깔이 허옇게 뒤집힌 채 쓰러져서 게거품을 물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예상보다 심각한데.’
구양세가의 암검들과 싸웠을 때는 더 오랫동안 망혼소를 유지했다.
한데 구양세가의 암검들은 바닥을 뒹굴고 고통스러워할지언정 이토록 심하진 않았다.
흑접의 살수들이 암검들보다 약해서 더 잘 먹혔던 걸까?
‘모르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강엽은 살수들의 마혈을 찍고 병장기와 독을 수거했다.
말로는 한 명만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정보를 교차 검증하려면 입이 많을수록 좋았다.
이제 남은 것은 도망친 이십구호뿐.
강엽이 의념을 담은 초음의 파동을 멀리 멀리 내뿜었다.
-도망치는 인간을 잡아라.
일전에 처음 썼을 때보다 훨씬 깔끔한 의념.
흡혈귀의 부름이 산자락을 타고 멀리 뻗어나갔다.
그리고....
푸드덕!
날개 가진 짐승들이 응답했다.
* * *
이십구호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부하들까지 버리고 간 이상 반드시 살아남아 흑접에 강엽에 대해 보고해야 했다.
강엽이 흑접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만 보고하면 정상을 참작받을 수 있을 터.
애초에 흑접의 비밀이 탄로난 게 그의 실수 때문이었지만 이십구호는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번에야말로 강엽과 홍가려를 해치우리라!
‘돌아가면 놈에 대해 모조리 파헤쳐야겠군.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려.’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치솟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뿌리가 있는 법.
강엽의 지난 행적은 물론, 그가 어떻게 낭인전에 다다랐는지 그 과정을 조사하면 사문이나 출신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 이 빚은 반드시 갚아주마!’
이십구호는 빠르게 도망치면서도 혹여 강엽이 쫓아올까 봐 흔적을 최대한 감춰두었다.
그렇게 울창한 숲속을 주파하고 있을 때였다.
끼익!
별안간 거슬리는 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원숭이인가 보군.’
산에 올랐을 때도 원숭이를 몇 마리나 봤기 때문에 이십구호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박쥐?”
끼이익!
동굴에 있어야 할 박쥐가 나무 사이를 날며 그를 쫓아왔던 것이다.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좌우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박쥐들이 날아왔다.
‘박쥐들이 왜 여기서 나와?’
지금이 밤도 아니고, 동굴에 들어온 것도 아니거늘.
상리를 벗어난 박쥐들의 출현에 의구심이 든 것도 잠시였다. 이십구호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박쥐들이 적의를 갖고 그를 쫓아오고 있다는 예감.
‘설마?’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맞는 법이었다.
캬악!
박쥐들이 그의 얼굴로 들이닥친 것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감히 그의 살갗을 할퀴고 눈알을 쪼아먹으려고 했다.
“이... 하찮은 미물들 주제에!”
퍼억!
주먹에 맞은 박쥐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미동하지 않았다.
박쥐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더욱 미쳐 날뛰었다.
“거치적거리지 말고 비켜라!”
양손에 들린 소도가 신들린 듯 춤출 때마다 박쥐들이 피를 뿜으며 철푸덕 나자빠진다.
이십구호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제길, 그놈이 쫓아올 텐데...!’
만약 강엽이 쫓아온다면 박쥐의 시체가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십구호는 부하들이 강엽을 오래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홍가려만 죽일 생각으로 데려온 하급 살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박쥐들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것마냥 자신들이 죽든 말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이십구호가 쉴 새 없이 칼을 휘둘러도 수십 마리나 되는 박쥐들을 감당할 순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처가 늘어난다.
결국 이십구호는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을 꺾어 이리저리 도망쳤다.
어느 순간 이십구호의 걸음이 멈추었다.
“말도 안 돼....”
한 줌의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우거진 숲 속.
수많은 박쥐들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이십구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십구호를 절망케 한 것은 한낱 박쥐들에게 몰이사냥을 당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두꺼운 소나무 앞에 기댄 강엽의 모습.
어둠 속에서 유난히 창백하게 보이는 얼굴엔 나른한 권태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바닥 위에선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박쥐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놀고 있다.
박쥐의 머리를 쓰다듬은 강엽이 나직이 물었다.
“몰이사냥에 당한 소감이 어때?”
“흐, 흐흐....”
입술을 비집고 나온 메마른 웃음.
부하들을 버리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는데, 그 선택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사문이 안 알려진 이유가 있었군. 사마외도의 종자여서 알릴 수 없었던 거야.”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완전히 정답은 아니지만 이십구호는 진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뭐라고?”
“흑접은 흑룡교의 후예일 텐데.”
“...!”
이십구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워낙 미세한 변화였지만 어둠 속에서 감각이 극대화되는 강엽의 눈엔 그 변화가 훤히 보였다.
“아, 후예라고 하긴 좀 그런가? 너흰 흑룡교가 망한 뒤에 그놈들 비술을 일부 손에 넣은 거니까.”
흑룡교가 멸문한 뒤 그들이 지닌 괴공절학들도 함께 사라졌다.
하나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암시장을 통해 음지로 흘러들어갔으니까.
어떤 것들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장경은 정보상인을 통해 몇 가지 소문을 접했다.
‘흑접도 그중 하나였지.’
흑접이 흑룡교의 비술을 손에 넣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수십 년 전만 해도 평범한 살문에 불과했던 흑접은 흑룡교의 멸문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장경의 의뢰를 받은 정보상인은 흑룡교의 비술을 습득한 걸로 짐작되는 개인이나 조직을 조사했고, 몇몇 살행에서 술법을 쓴 흑접을 후보로 점찍었다.
“반응을 보니 정답인 것 같군.”
“죽엇!”
이십구호가 암기를 내던졌다.
손바닥에서 노닐던 박쥐를 내보낸 강엽이 용린투로 암기를 막았다.
동시에 이십구호의 신형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그가 쥔 소도에 흐릿한 기운이 떠올랐다. 뚜렷한 도기가 강엽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방심하고 있겠지. 그 방심을 이용해주마!’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살수의 소양.
강엽이 도기를 막거나 피한다면 반대쪽 손에 숨겨둔 송곳이 강엽의 목줄에 꽂힐 것이다.
하지만 강엽은 피하거나 막지도 않고 도기가 맺힌 칼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무슨 짓을...!’
도기에 베인 허상이 흩어지듯 사라진다. 그리고....
빠악!
“꺼윽!”
이십구호는 영문을 깨닫기도 전에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땅바닥에 안면을 처박은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은 강엽이 손을 넣어 턱을 강제로 벌렸다.
“살수들은 잡힐 걸 대비해서 멀쩡한 어금니를 빼고 그 자리에 독단을 넣고 다닌다지. 네 부하들 독단은 찾았는데, 넌 어떨까?”
“자, 자으만!”
“찾았다. 이건가 보군.”
가차없이 독단을 뽑아내자 이십구호는 흡사 생니가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에 까무러쳤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심문하기 전에 일단 좀 처맞고 시작하자.”
한동안 어두컴컴한 숲 속에선 찰진 구타음과 신음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