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호위 (7)
구슬은 홍가려를 향해 날아왔지만, 청수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돌려드리지요!”
구슬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건드리는 대신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받아냈다.
태극을 그린 팔 궤적 안에 형성된 공력의 그물이 구슬의 궤적을 부드럽게 받아내어 살수들에게 돌려준다.
살수들을 지휘하는 이십구호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내심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비표를 던져 구슬을 요격했다.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허연 연막이 터져나와 시야를 가렸다.
쐐애액!
동시에 연기를 뚫고 날아오는 암기 세례.
진작부터 초감각을 쓰며 살수들을 유심히 지켜봤던 강엽은 한 박자 빨리 한천최심장을 출수했다.
뒤이어 하후진이 일으킨 도풍이 그 너머에 있는 살수들까지 베어버릴 기세로 연막을 갈라버렸다.
콰콰콰콰쾅!
“히이익!”
객잔의 벽면이 터져나가는 굉음에 주방 구석에 숨은 객잔 주인과 점소이가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강엽과 하후진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암기를 쳐낸 청수가 뒤를 힐끔 돌아봤다.
“다친 덴 없습니까?”
“저, 전 괜찮....”
말은 그렇게 해도 홍가려의 목소리는 그녀의 안색만큼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함을 확인한 청수는 안도하며 탁자를 뒤엎어 벽을 세웠다.
무인의 칼을 막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 조그마한 암기 정도는 막아줄 터.
“거기서 나오지 마십시오.”
“...조심하세요!”
청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흑접의 살수들은 객잔의 벽면을 폭발시킨 경파를 피해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이십구호가 흑립 아래로 시퍼런 살기를 토해냈다.
“인정하지. 우리가 안일했다. 고작 여자 한 명 죽이는 거라고 방심했어. ‘이번엔’ 너희가 이겼다.”
“도망칠 셈인가?”
“하하, 무인도 아닌데 임전무퇴를 왜 고집하겠나? 안타깝게도 네놈들까지 죽이기엔 우리 전력이 모자라군. 우린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
“오는 건 마음대로였을지 몰라도 가는 건 아니지.”
“그걸 정하는 건 네놈이 아니야.”
뒷짐을 진 이십구호가 수신호를 보냈다.
흰자위만 남은 살수가 수인(手印)을 맺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살수들의 그림자가 뱀처럼 길어졌다.
-흑암영사술(黑暗影蛇術).
술법으로 일어난 수백 마리의 독사들이 대가리를 뻣뻣이 치켜들고 쉭쉭거리며 바닥을 기어온다.
하후진이 가래침을 퉤 뱉었다.
“쓰벌. 생긴 꼬라지 살벌한 거 보소. 어이, 강엽. 저게 뭔지 알겠냐? 진짜 살아있는 거여?”
“모르겠군. 처음 보는 술법이다.”
강엽이 눈가를 좁혔다. 모산파의 술맥(術脈)과는 궤가 달랐다.
뒤이어 눈짓을 받은 청수도 어깨를 으쓱였다.
“저라고 알겠습니까?”
“이 자식아, 도사 주제에 술법도 몰라? 부적 쓰면서 급급여율령 외치면 되는 거 아냐?”
“편견입니다, 그거. 도사라고 전부 술법에 능통하진 않아요. 무맥과 술맥이 나뉘어져 있단 말입니다. 술법 쓰는 건 어깨 너머로 몇 번 보긴 했는데 전 못 배웠고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베어보지 뭐!”
어차피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없다면, 머리를 비우고 싸우는 게 정답 아니겠는가?
하후진이 대뜸 도풍을 날려 독사 세 마리의 모가지를 뎅겅 날려버렸다. 죽은 독사들이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진다.
“뭐야? 너무 쉽게 뒈지는데?”
“멍청한 놈.”
이십구호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얼마든지 죽여봐라.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네놈들만 힘들어질 테니까.”
“뭔 개소리....”
욕설을 뱉은 하후진이 문득 뇌리를 엄습하는 어지러운 감각에 표정을 굳혔다.
강엽과 청수도 다르지 않았다.
“으윽!”
세 사람의 뒤에 있는 홍가려는 현기증이 나는지 머리를 잡고 괴로워한다.
강엽이 즉시 호두알만한 구슬을 던지자 얼떨결에 받은 청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뭡니까?”
“피독주다. 홍가려 입에 물려!”
일전에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고 조영옥에게 받은 최상품의 피독주.
지금까진 갖고 다니기만 할 뿐 쓸모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쓸 일이 생긴 것이다.
청수가 홍가려에게 피독주를 물리는 동안 독사들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거리를 좁혀왔다.
다시 한번 도풍을 날려 접근을 저지한 하후진이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젠장, 하여튼 살수 새끼들은...!”
세 사람이야 공력으로 어떻게든 독을 억누를 수 있다 쳐도 홍가려는 그럴 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아예 무공을 익히지 못한 객잔 주인과 점소이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말이다.
“어디 버텨봐라. 네놈들 정도라면 살 수 있겠지.”
이십구호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살수들이 독사들 한가운데 연막탄을 던져 터뜨렸다.
연막을 뚫고 나온 독사들이 일행을 에워쌀 기세로 접근하자 일행은 낭패감을 느꼈다.
강엽은 장력으로 독사들을 날려보냈다. 독사들이 죽어서 독연으로 변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중하게.
하지만 공력이 닿은 즉시 펑펑 터져나가며 독연을 내뿜었다.
‘조금만 충격받아도 죽는 건가?’
독연과 연막이 뒤섞여 뚫고 가는 건 무리였다. 뚫고 가더라도 살수들이 다른 함정을 팠을지도 모르고.
‘이게 될지 모르겠는데....’
양손에 태극반의 경파를 운용, 흡자결의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멀리 있는 독사들까지 독연으로 변해서 양 손목에 두른 태극반의 경파로 빨려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청수와 하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여?”
“강 도우, 그건...!”
청수는 한눈에 태극반의 묘용을 꿰뚫어봤다.
그렇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엽의 태극반은 무당 무공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미 독자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순환의 이치를 따르면서도 공력의 운행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저게 가능하다고?’
얼핏 보면 공력을 그냥 빠르게 회전시킬 뿐이지만, 그 안에 개별적인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깥의 독연을 빨아들이되 온전히 그 안에서만 순환하도록 세밀하게 조절하고 있는 것.
본디 공기의 흐름을 따라 퍼져나가는 독연을 단 한 줌도 흘리지 않고 빨아들여 한 점에 수렴한다.
이윽고 손목을 회전하는 독연이 강엽의 장심 앞에서 똘똘 뭉쳐 구체를 이루는 광경 앞에선 청수와 하후진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강엽은 독연을 빨아들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일정한 흐름 안에 가둬두고 있었던 것이다.
공력을 얼마나 세밀하게 운용해야 저런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정작 놀랄 만한 위업을 달성한 당사자는 여전히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수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강엽은 놈들이 순순히 물러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숨은 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청수, 홍가려는?”
“여, 여기 있어요.”
엎어진 탁자에서 홍가려가 주춤주춤 기어나왔다. 다행히 강엽이 준 피독주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이젠 당신도 알겠지? 당신이 어디로 가든 흑접이 쫓아올 거다. 사천을 벗어나도 소용없어.”
물론 술법이 효용을 미치는 거리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세상 끝까지 도망치면 흑접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인정할게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홍가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애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도망친 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다니?
그 사이 주방에 들어간 하후진이 기진맥진한 객잔 주인과 점소이를 꺼내왔다.
홍가려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가 이쪽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들이 끔찍한 일을 겪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폐를 끼쳤어요.”
“아, 아닙니다요.”
객잔 주인이 황망하게 손사래를 쳤다.
물론 객잔이 망가진 건 통탄할 노릇이었지만 무림인들의 싸움에서 목숨을 건진 게 어디겠나.
홍가려가 패물을 꺼내 건넸다.
“약소하지만 객잔을 수리하는 데 써주세요.”
“어이쿠, 이건....”
“혹시 부족한가요?”
“아, 아닙니다. 충분합지요!”
사실 부족해도 충분하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무서운 무림인들 앞에선 사기를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엽은 홍가려의 행동으로 그녀의 결심을 짐작했다.
“돌아갈 건가?”
홍가려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망친 지 하루도 안 돼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체념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
“젠장, 억울해서 미치겠어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죽이겠다고 살수가 찾아온다면 말이다.
하후진이 머리 위로 깍지를 끼며 물었다.
“원수진 사람은 없고? 댁 정도면 여기저기 적이 많을 것 같은데. 댁이 사원루에 벌어다주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면서. 경쟁하는 입장에선 무진장 거슬릴걸?”
“.......”
말이 없는 것을 보면 홍가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웠다.
“...사실 비슷한 일을 예전에도 겪었어요.”
중경제일미로 명성을 누린 만큼 불편한 일도 많았다.
비단 경쟁 기루에서만 그녀를 노린 게 아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낸 자들이 사람을 보내 납치하려고 했던 일도 종종 있었으니까.
지금까진 사원루주가 붙여준 호위들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흑접은 격이 다른 위협이었다.
“당신 정도면 벌 만큼 벌지 않았나? 그렇게 시달렸으면 그만둘 생각도 해봤을 텐데?”
“뭐, 전혀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래도 지금의 삶을 싫어하진 않아요. 금을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요.”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라고 하겠나.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 강엽이 일행을 돌아봤다.
“너흰 날 밝으면 배 타고 중경에 돌아가라.”
“넌 안 갈 것처럼 얘기한다?”
“난 따로 할 일이 있거든.”
하후진이 날려버린 객잔 벽면으로 다가간 강엽이 허리를 숙여 바닥을 쓸었다.
워낙 넓은 범위를 한꺼번에 날려버렸기 때문에 흑접의 살수들도 완벽히 피하진 못했다. 경상이지만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것이다.
손끝으로 피를 찍은 강엽이 말했다.
“놈들을 쫓을 거다.”
놈들이 술법으로 홍가려를 쫓아왔듯, 이젠 그가 술법으로 놈들을 쫓을 차례였다.
* * *
“놈들이 포구로 갔다.”
“행선지도 알아냈나?”
“중경으로 가는 배를 알아보더군.”
“그렇군.”
“이젠 어떡할 거지?”
“으음.”
이십구호는 말없이 침음했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지금 가진 전력만으로는 절정고수 세 명의 방비를 뚫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심차게 썼던 흑암영사술 역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신중하게 접근한 다음에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암습했어야 했는데.”
예를 들어 홍가려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접근해서 흑암영사술을 썼다면 어찌 되었을까?
절정고수 세 명이 있던 만큼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은 못해도 어젯밤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인정하지. 하지만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총단에 증원을 요청하기만 하면....”
“한 자릿수 번호가 와야 한다.”
“....”
이십구호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흑접에서는 번호가 서열과 실력을 의미했다. 이십구호는 스물아홉 번째로 높은 서열.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야. 한 명이라면 모를까, 세 명이면 우리끼리 해치울 수 없어. 한 자릿수 번호가 둘 이상은 나서야....”
“입 닥쳐라, 삼십삼호!”
삼십삼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서열 차이가 얼마 안 나고 술법을 쓸 줄 아는 귀한 전력으로 대접받기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지만,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엄연히 이십구호였다.
어떤 불만을 품었든 이십구호가 까라면 군말없이 까야 하는 처지.
상위 서열들끼리 다툴 기미를 보이자 흠칫 놀란 하급 살수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달은 이십구호가 한숨을 쏟아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위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우리끼리 성공해야 한다. 너도 윗놈들에게 공을 빼앗기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하지만....”
항변하려고 한 삼십삼호가 돌연 가슴을 관통하는 격통을 느끼고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손을 창처럼 모은 관수가 등짝을 관통해서 가슴 앞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이게 뭔...!”
이십구호는 동료의 참상에 경악했다.
다른 살수들도 어떤 조짐도 없이 삼십삼호의 뒤에서 툭 튀어나온 적의 모습에 혼란에 빠졌다.
“얘기 잘 들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 한 자릿수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은데.”
강엽의 입가를 타고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