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66화 (65/450)
  • 12화. 호위 (4)

    장경의 예상대로 사원루주는 호위를 맡기기 위해 온 것이었다. 보표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흑접을 막기 불안했던 것이다.

    사원루주는 의뢰비뿐만 아니라 어떻게 호위를 할 건지도 의논을 거듭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원루를 떠나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는 게 정답일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장경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흑접은 집요한 놈들이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해어화를 쫓으려고 하겠지요. 게다가 잠시 몸을 숨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 년만 잠적하면 되지 않을까요?”

    홍가려가 없으면 매출에 심대한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이고 사원루의 명성도 예전만 못해질 것이다.

    하지만 홍가려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장경이 고개를 저었다.

    “몇 년 전에 낭인전 성도 분타가 흑접의 예고장을 받은 사람을 호위한 적이 있습니다. 호위 대상은 중소상단의 상단주였지요. 겁에 질린 의뢰인은 가산을 정리하고 식구들만 챙겨서 산동성으로 피신하려고 했습니다. 혹시 몰라서 온 식구가 인피면구까지 썼습니다만....”

    “성공했나요?”

    “아뇨. 실패했습니다.”

    산동은커녕 사천을 벗어나기도 전에 온 식구가 흑접에게 쫓겨서 전멸했다.

    “당시 현장엔 흑접의 표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요? 인피면구까지 썼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성도 분타는 처음엔 내부에서 정보가 샌 게 아닌가 의심했었지요.”

    “처음에 의심했었다는 건... 그 이유가 아니라는 거군요.”

    “진실이 어떤지는 모릅니다. 적어도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됐다는 정황은 없었습니다. 한데 다른 사례를 알아보니 흑접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 모두가 죽었더군요. 흑접을 피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말입니다.”

    “그럴 수가....”

    몇 번은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어떻게 단 한 명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단 말인가?

    “흑접이 어떤 방식을 썼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다만 추종향 같은 게 아닐까 의심할 뿐.”

    “그럼 방법이 없단 뜻인가요?”

    “자성검호(紫晟劍豪)라는 고수가 있었습니다.”

    “들어본 것 같군요.”

    “그럴 겁니다. 몇 년 전까지는 사천을 대표하는 검호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그 역시 흑접의 예고장을 받고 죽었지만, 그전에 세 차례나 흑접을 물리쳤습니다.”

    “정면으로 맞서자는 건가요? 귀영이나 사자염도 같은 낭인들이 강한 건 알겠지만....”

    “어디에 숨든 흑접이 쫓아온다면, 차라리 사원루에서 싸우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놈들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요.”

    “....”

    “물론 결정은 루주의 몫입니다.”

    장경이 깍지를 낀 채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존중하겠다는 것처럼.

    사원루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장 분타주의 의견을 따르겠어요.”

    * * *

    하후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우리 분타주 참 대단한데. 일이 남는 낭인들을 모조리 사원루 경호에 때려박다니.”

    은패급 낭인들은 물론 일거리가 없어 노는 동패급 낭인들까지 모조리 동원한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댁까지 올 줄은 몰랐구만. 우리처럼 돈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

    청수 역시 그들과 합류한 것이다.

    “흠흠, 죄없는 여인이 흉살(凶殺)을 당할 수 있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오호라.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시지. 정말 아무런 사심도 없으신가?”

    “그러는 하후 도우는 어떻습니까?”

    “나야 절세미녀 보고 싶지.”

    지나치게 솔직한 하후진이었다.

    ‘미친놈이 두 배로 늘어나다니....’

    자신 역시 똑같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던 강엽은 일행이 아닌 척 강호적 거리두기를 했다.

    “어허, 이놈이 어딜 내빼려고!”

    “맞습니다, 강 도우! 강 도우도 사내 아닙니까? 우리와 함께 마음을 터놓고 말씀해보시죠.”

    슬그머니 내빼려는 강엽의 어깨를 좌우에서 잡은 하후진와 청수가 은근한 압박을 보내왔다.

    강엽은 기도 차지 않았다.

    “이 미친놈들이... 전생에 미녀 못 봐서 뒈진 것도 아니고 왜 이리 여자 얼굴에 집착해?”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천삼미라고요, 사천삼미!”

    “조영옥도 사천삼미라면서. 비무대회에서 조영옥 봤을 거 아냐.”

    “멀리서 대충 본 게 전부입니다. 준우승 상금도 태화문의 무인이 대신 줬고요.”

    당시엔 강엽에게 통렬한 한 방을 얻어맞고 정신을 잃어 조영옥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하후진이 뭔가 생각났는지 혀를 내둘렀다.

    “생각해보니까 이놈은 비무대회 끝난 뒤에 그 여자랑 만난 적이 있었네.”

    “예에?”

    청수는 조천방과의 싸움엔 참가하지 않은지라 내막을 몰랐다. 하후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이놈이 단 둘이서 그 여자와 만난 적이 있거든. 뭔 얘기를 나누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별 얘기 하지도 않았어. 그보다....”

    강엽이 고개를 들었다.

    사원루의 보표들이 물샐 틈 없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강엽 일행이 들어서자 어젯밤 청송객잔을 찾아왔던 보표대주가 포권을 쥐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 같이 오셨군요.”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수다. 한데 이렇게 하면 손님은 못 오지 않수?”

    “예. 당분간은 영업을 못 하게 됐습니다.”

    보표대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흑접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손실을 떠안게 됐지만, 오히려 세간의 이목은 사원루에 집중되었다.

    현재 중경 제일의 화제는 누가 뭐라 해도 사원루와 홍가려, 흑접의 예고장이었다.

    “쯧, 구경 났나. 다들 이쪽만 뚫어지게 보는구만.”

    하후진이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혀를 찼다. 주루나 다루의 난간에 자리를 잡은 손님들이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음, 저희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저분들은 흥밋거리로만 여기는군요.”

    청수가 도호를 읊으면서 사태를 조금 가볍게 여겼던 자신의 마음을 책망했다.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강엽이 물었다.

    “우리가 할 일은?”

    “세 분은 각자 다른 지점에 배치되어 경계를 서주셔야 하오. 안내는....”

    하지만 보표대주의 말은 끊겼다.

    쪽문을 열고 헐레벌떡 달려온 보표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딴에는 작게 말했지만 청각이 뛰어난 일행은 바로 앞에서 하는 소리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홍가려가 사라졌다고?”

    “그, 그렇소.”

    보표대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보표들이 사원루의 담장을 사방으로 에워쌌는데 어떻게 사라졌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만약 홍가려가 잘못된다면 전적으로 그의 책임인 만큼 찾지 못한다면 목숨을 내놔야 했다.

    * * *

    “너희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사원루주의 살기 어린 눈빛을 받은 시비들은 동장군을 만난 것마냥 가늘게 떨었다.

    사원루의 예인들은 지체높은 집안의 규수처럼 시비들의 시중을 받았다. 홍가려처럼 사원루를 대표하는 예인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데 그녀들 중 누구도 홍가려가 실종됐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야!?”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뺨을 얻어맞은 시비들이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음에도 사원루주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흑접의 살수들이 쳐들어와서 홍가려를 납치한 거라면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으리라.

    아니, 화는 났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시비들에게 화풀이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호, 홍 소저께서 아프다고 누우셔서... 번잡스러운 건 싫으니 한 명만 병간호를 하라고 하셨는데, 저희가 미음을 가져갔을 땐 이미....”

    병간호를 위해 남은 시비는 겉옷이 벗겨진 채 침상 위에 잠들어 있었다.

    사원루주가 장탄식을 토했다.

    “이 바보같은 녀석...!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홍가려는 자신으로 인해 사원루에 피해를 입힐 수 없다는 쪽지를 남기고 잠적했다.

    “너희는 뭘 했지?”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보표들 역시 만약을 대비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하도록 주변을 단단히 경계했다.

    하지만 바깥만 경계했을 뿐, 설마 홍가려가 시비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홍가려는 자신과 체구가 비슷한 시비를 고르고, 화장까지 완벽하게 해서 속여넘긴 것이다.

    사원루주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어넘길 때, 보표대주가 찾아와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루주님. 소인의 불찰입니다.”

    “됐어. 보아하니 그 애가 작정하고 나간 것 같은데. 대신 그 애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야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귀영과 사자염도가 무당의 청수 도장과 함께 왔습니다.”

    “그들이 지금 사태를 알고 있어?”

    “그렇습니다.”

    하필 홍가려가 잠적했을 때 찾아온 것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사원루주는 잠시 막막해졌을 때, 보표대주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루주님, 귀영이 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홍 소저의 피만 있으면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나?”

    “예. 자신만의 비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듣자하니 오래된 피라도 상관없다고....”

    “으음.”

    사원루주가 턱을 매만졌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이대로 사람을 풀어 수색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흑접이 이 사태를 안다면 홍가려의 목숨은 더욱 위험해진다.

    “근데 여기 있지도 않은 애의 피를 무슨 수로 구해?”

    “저, 루주님....”

    그때 시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사원루주와 보표대주의 눈길을 받은 시비는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용기를 냈다.

    “오래된 피라도 괜찮다면 있긴 한데요....”

    * * *

    강엽이 피가 묻은 헝겊을 매만졌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갈변했지만, 적당히 물을 적신다면 혈종술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효과는 많이 떨어지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무래도 신선한 피로 혈종술을 쓰는 게 효과가 더 오래갈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피에 물을 섞어봤자 효과는 한 시진도 못 간다.

    “정말 그걸로 찾을 수 있다고?”

    하후진과 청수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호 무림에 여러 신비가 있다지만 피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술법이라니?

    아니, 그보다 강엽이 술법을 쓸 줄 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피가 너무 오래됐어.”

    헝겊에 묻은 피는 어젯밤 흑접의 예고장이 날아왔을 때, 홍가려가 손가락을 베였기 때문이었다.

    날개 부분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흑접을 잡은 순간 저도 모르게 살갗을 베였던 것이다.

    “그래도 뭐라도 해보는 게 낫겠지.”

    강엽이 갈변한 피를 물에 적셔 양피지에 문지르고, 그 위에 자신의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려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흐릿하지만 두 개의 혈점이 양피지 위에 떠올랐다.

    “되, 된 건가?”

    “그래. 좀 흐릿하긴 하지만... 가운데가 내가 있는 위치고, 다른 혈점이 홍가려가 있는 곳이다.”

    혈점은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충 거리를 가늠해본 강엽이 혀를 찼다.

    “그새 멀리도 갔군.”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호인들처럼 강해지기 위해서 익힌 게 아니라 몸매를 가꾸기 위해 익힌 것이지만, 어쨌든 홍가려는 무공을 익힌 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비를 기절시키거나 보표들의 감시망을 피해서 도망칠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이 정도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어. 효과가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찾아야겠지.”

    혈점은 당장이라도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서둘러 쫓지 않는다면 허무하게 놓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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