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호위 (3)
대문 앞에 진을 친 손님들이 성토하자 녹색 무복을 입은 사원루의 보표들이 난색을 드러냈다.
그냥 손님들이라면 힘으로 내쫓았겠지만, 중경에서 힘깨나 쓴다는 부유한 사람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면 답도 없었다.
“말들 해보란 말이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내 한 달 전부터 귀빈을 모시기 위해 예약을 해놨건만!”
“송구합니다. 본루의 내밀한 사정 때문이니....”
“이런 답답한 인사를 봤나! 그게 뭐냔 말이다! 아니, 됐다. 내 직접 루주를 봐야겠다!”
직접 루주를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을 호위하는 무사들도 덩달아 눈알을 부라리자 총관과 보표들은 위축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지키기 위해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팽팽히 맞섰다.
“이, 이...! 네놈들이 정녕 치도곤을 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뭣들 하느냐, 당장 저자의 무릎을 꿇리지 않고!”
값비싼 비단 장삼을 입은 자가 손가락으로 총관을 가리키자 그를 지키는 호위무사들이 나섰다.
자연히 보표들도 발작하듯 총관의 앞을 막아섰고....
“비켜.”
“그쪽이나 물러나시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채채채채챙!
양측의 무사들이 칼을 빼들자 들끓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그것은 폭풍전야의 고요였다.
누군가 칼을 휘두르는 순간, 유혈이 낭자하리라는 전조.
“긴말하지 않겠다. 당장 루주를 데려와라!”
“진정해주십시오, 대인. 추후 루주께서 설명해주실 터이니...!”
“난 지금 당장 들어야겠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팽팽히 당겨졌을 때, 강엽을 비롯한 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고루거각에 올라간 것이다.
하후진이 강엽을 돌아봤다.
“어떻게 생각하냐?”
“글쎄.”
강엽도 아직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사원루 앞에 모여있는 자들의 행색만 봐도 저들이 소위 높으신 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겠다.
다들 사원루의 일방적인 처사로 인해 일정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에 심대한 상처를 입었다.
사원루가 사업을 하루이틀 해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어지럽혀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소문나면 안 좋은 일이 생겼나 본데.... 하지만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순 없겠지.”
지금 해명하든 추후에 해명하든 결국 소문은 나게 되어 있다.
청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누군가가 나오는 것 같은데요.”
사원루의 대문이 열리면서 비단 궁장을 입은 서른 중반의 고아한 미인이 나왔다.
“사원루주 손가향입니다. 본루에 찾아와주신 귀빈들께 피해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루주로서 깊은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하자 난장을 피우던 손님들도 조금 진정하는 분위기였다.
가장 앞장섰던 비단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언성을 높였다.
“손 루주, 여기 계신 분들은 중경의 큰손이시네. 이번 일을 납득이 가게 해명해야 할 것이야!”
“우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이는 손님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본루에 흑접(黑蝶)의 예고장이 날아왔습니다.”
흑접이라는 말에 군웅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우 대인이라 불린 중년인도 당황했다.
“흑접이라니... 혹시 살수들 말인가? 대관절 누가 흑접의 표적이 되었단 말인가?”
“본루를 대표하는 예인인 홍가려입니다.”
“해어화가...!”
우 대인뿐 아니라 군웅들도 탄식하듯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사원루주가 말했다.
“누가 어떤 연유로 홍가려를 죽이려고 사주했는지는 모릅니다. 하나 한 시진 전에 홍가려의 방에서 흑접의 예고장이 발견됐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원루주가 높이 치켜든 손엔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검은색 쇳조각이 들려 있었다.
장인이 정성을 들여 세공한 노리개처럼 유려하고 섬세한 검은 나비의 모양이었다.
“흑접! 진짜 흑접이다!”
“해어화가 흑접의 표적이 되다니!”
충격적인 소식에 사원루 앞에 모인 군웅들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전각들에서 흥미진진하게 관망하고 있는 구경꾼들까지 덩달아 떠들썩하게 소리쳤다.
누군가는 흑접의 잔혹성을 떠들었고, 누군가는 흑접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주워 섬겼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든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흑접의 표적이 된 이상 홍가려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 * *
세 사람은 청송객잔에 돌아왔다.
의뢰고 나발이고 사원루가 문을 닫았는데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셋 모두 흑접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갔다.
“뭐야. 세 놈이 왜 같이 찾아와? 사원루 간다면서?”
식당에 있던 낭인들도 강엽과 하후진과 함께 들어온 청수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강엽은 그들의 시선을 싹 무시하고 말했다.
“사원루 문 닫았다.”
“엥? 왜?”
“흑접이 왔다던데.”
“흑접?”
“흑접이 뭐지?”
세 사람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장경만 뚫어지게 쳐다보자 장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니들이 무슨 학생이냐?”
“흑접은 살수단체요.”
세 사람의 앞에 찻잔을 놓은 전강이 말했다.
강엽이 물었다.
“그건 아까 사람들 말을 주워 들어서 대충 알겠는데... 정확히 어떤 놈들입니까?”
이번엔 장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흑접은 사천에서 가장 은밀한 살문(殺門)이야. 좀 정신 나간 놈들인데, 표적을 죽이기 전에 검은 나비 모양의 조각을 보내서 살행을 예고해.”
“왜 그런 짓을 하는 겁니까?”
청수의 물음이었다.
잠시 그를 힐끔거린 장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긴. 그래야 누구 짓인지 알 거 아냐?”
사실 흑접뿐 아니라 많은 살문들이 그런 식으로 표식을 남겨두었다. 다만 흑접은 여타 살문들과 달리 살행 전에 예고장을 보낼 뿐.
“사실 살수로선 해선 안 될 짓이긴 해. 내가 널 죽이러 갈 거라고 알려주는 꼴인데.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고. 너희가 흑접의 예고장을 받으면 뭘 하겠어?”
“어... 장문인께 달려가서 나쁜 놈들이 저 괴롭히니 혼내달라고 하지 않을까요?”
“....”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서 농담 좀....”
“그게 누구 때문인데.”
“예?”
“...아니, 됐다. 보아하니 댁도 좀... 그런 과 같은데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야지. 니들이 같이 다니는 이유를 알겠다. 잘 어울리네.”
차마 말은 안 했지만 강엽과 하후진이 장경의 시선을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날 이놈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난 이 녀석들과 다르거든!”
장경이 보기엔 셋 다 미친놈이었다.
하나는 어둠의 자식 같은 미친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아가 비대한 미친놈이었으니까.
그때 강엽이 물었다.
“예고장을 보낸다면 상대가 대비할 텐데. 그럼 실패할 확률도 높지 않나?”
“원래라면 그래야지. 하지만 흑접의 표적이 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어. 예고장을 받고 나서 모두 이레 안에 죽었거든. 도망치든, 칼잡이들을 준비하든.”
미리 예고장을 보내는 미친 짓을 하고도 모든 살행을 성공시켰다는 점이 흑접의 무서움이었다.
“그 미친 짓이, 오히려 사람들이 흑접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된 거지. 네가 뭘 하든 넌 우리 손에 뒈질 운명이다, 그런 뜻이야.”
“그럼 홍가려라는 여자는 죽겠군?”
“그렇겠지. 중경제일미녀가 꽃다운 나이에 죽다니 안타깝구만.”
장경이 쯧쯧 혀를 찼다.
“뭐, 사원루가 가만히 있진 않겠지. 홍가려가 벌어다주는 돈이 얼마인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던가.
장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녹색 무복을 입은 사원루의 보표들이 주변을 살피며 들어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장경과 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선두에 선 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경 분타주가 누구십니까?”
“나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흰 사원루에서 나왔습니다.”
“그건 옷만 봐도 알겠는데, 그짝이 여긴 웬일로 온 거요?”
“루주께서 오실 겁니다.”
“사원루주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보표가 주변을 둘러보며 넌지시 물었다.
“루주께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시길 원합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위층에 접객실이 있수다. 한데 사원루주는 언제 오는 거요?”
“지금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곱게 차려입은 사원루주가 보표들을 대동하고 들어오자 칙칙한 장내가 일순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급하게 온 사람일수록 돈을 많이 뜯을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장경은 넉넉한 미소를 머금었다.
“흠흠, 아닙니다. 중경에 명성 자자한 사원루주를 뵈어 영광입니다. 사원루의 일은 들었습니다. 유감이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본루의 일을 들으셨다고요?”
“아... 그게, 제가 아는 놈들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혹시 저분들이신가요?”
장경의 눈길이 탁자 앞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을 향한 것을 눈치챈 사원루주가 물었다.
하후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수다. 간만에 사원루에서 여기 이놈들이랑 놀려고 했는데, 그쪽 가게가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됐수다.”
“아... 본루에 오신 손님이셨군요. 그 일은 루주루서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하핫, 아닙니다! 흑접이 위협하는데 당연히 문을 닫아야지요!”
장경이 손사래를 치며 위층으로 가자고 말하려던 때, 사원루주가 눈을 반짝였다.
“이제 보니 사자염도 하후 공자셨군요?”
“날 아쇼?”
“오실 때마다 최상급 검남춘인 천익노호(天益老号)를 열 병씩 드셨지요. 악공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은전을 나눠주시기도 했고요. 호협한 풍모가 참으로 사내대장부답다면서 우리 아이들이 많이 감탄했답니다.”
“하하핫! 역시 사원루의 미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참된 사내를 알아보다니!”
하후진이 무릎을 치며 짐짓 호탕하게 웃자 사원루주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강엽을 포함한 다른 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병신 같은 호구를 봤나?’
상대가 호구짓해서 고맙다고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헤벌쭉거리다니?
“한데 하후 공자께서 같이 오실 분들이라면... 필시 범상한 분들이 아니겠군요.”
“하핫, 나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한 친구들이지. 이 친구는 귀영이라 불리는 놈이고... 또 이쪽은 무당 제자 청수인데 별호가... 뭐였더라?”
“선풍룡 청수라고 합니다, 루주.”
청수가 우수에 찬 표정으로 근엄한 무당 도사를 연기하는 모습에 강엽은 얼굴을 쓸었다.
‘왜 내 주변엔 이런 놈들밖에 없는 거지?’
사실 흡혈귀는 미친놈들만 끌어모으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난 간다.”
강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차피 동천패와 흑룡교에 대한 정보는 챙겼다. 후자는 집에 가서 살펴보면....
“잠깐만요.”
나가려는 강엽을 사원루주가 잡았다.
“귀영의 이름은 저도 몇 번 들어봤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지금 하고 계신 의뢰가 있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있....”
“아뇨, 없습니다!”
“...?”
강엽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매섭게 노려보자 장경이 재빨리 와서 귓가에 소곤거렸다.
“야, 야. 이건 기회야. 저 여자가 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중경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라고.”
“그래서 의뢰를 받자고?”
“뻔하지. 홍가려 지켜달라는 의뢰 아니겠냐?”
“흑접인지 뭔지가 노린 사람들은 죄다 죽었다며. 딱히 나라고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하는데.”
“조건을 걸어야지. 의뢰를 성공하지 못해도 완수금의 절반은 내놓으라고. 그럼 마냥 손해는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네가 할 만한 고액 의뢰가 없어.”
“청수에 대한 건은?”
“지금 그게 중요하냐? 그 건은 잊어. 이렇게 된 김에 저 친구도 끌어들려야지. 실력 있는 친구가 많을수록 좋잖아. 무고한 여인을 지키는 일이면 거절하진 않을 거야. 설득은 내가 해볼 테니까.”
“...뭐, 네가 알아서 해라.”
강엽이 하후진과 청수를 곁눈질하며 떨떠름해했다.
생각해보니 중경제일미녀를 볼 기회를 시커먼 사내새끼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