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62화 (61/450)
  • 11화. 근원 (2)

    [시험에 들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그리 원한다면 들어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진조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비어버린 오른 발목과 왼팔이 피와 살 대신 혈공진기로 메워졌다.

    “당신은 재생력을 못 쓰나?”

    [조금은 쓸 수 있다. 하나 잃어버린 부분은 네게 준 것. 다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는 거나 다름없지.]

    “혈공진기로 잃어버린 부분을 대체한 것은....”

    [진기를 유형화한 게다. 무림인들이 강기(罡氣)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강기....”

    검기나 권기 이상의 경지로, 비급에서 그런 게 있다고만 알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내공만 많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를 인지하고 다루는 감각이 고차원적인 경지에 도달해야 얻을 수 있느니라.]

    “역시 당신은 고수였군.”

    [그렇다.]

    “그럼 왜....”

    [왜 너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강엽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 이런 식으로 가르침을 줄 거였다면 왜 지금껏 가만 있었는지 궁금했다.

    “난 당신이 내게 무공을 전수하지 않은 게 당신의 무공이 낡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짐의 무공이 낡은 건 사실이다.]

    진조가 살았던 시절은 막 무림이 태동한 시기였다.

    당시의 무림은 무의 숲라기보다는 요람이었다. 고수가 많지 않았고, 무학의 수준도 변변치 않았다.

    [물론 그동안 쇠락한 무맥도 있었겠지.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발전했을 터.]

    달마가 역근경과 세수경을 전파하면서 중원 무림은 일대 부흥기를 맞이했고, 각 무맥의 종사들과 수많은 무림인들이 누천년간 무공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게 가르침을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설령 낡은 무학을 물려받았어도 네 재능이라면 뜯어고쳐서라도 고수가 되었겠지. 짐이 가르침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현실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

    [네 기감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진혈강림대법을 덧씌운 내면의 심상 공간을 인식하지 못했을 게다. 가르침을 내리고자 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게지.]

    하지만 절정고수인 구양익의 피를 마시면서 강엽의 기감은 극도로 민감해졌다.

    그 덕에 진조가 심어놓은 진혈강림대법의 잔재를 인식한 것이다.

    “그럼 내가 원래부터 무림인이었다면....”

    [가르침을 내리는 시기가 지금보다 빨랐을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가르침을 내렸거나.]

    한마디로 이제야 자격을 거머쥐었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혼자서 부딪치고 깨지고 궁구하는 동안 너의 무공관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니까. 그건 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자들은 얻지 못하는 자산이다.]

    그것은 진조의 영성을 물려받으면서, 그리고 진혈강림대법으로 희생된 괴물들이 남긴 백(魄)이 강엽의 재능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강엽이 그저 그런 범재로 남았다면 반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만한 경지에 오르진 못했을 터.

    [하지만 이제 넌 짐의 앞에 섰다. 그러니 이제부터 가르쳐주마.]

    “무공을?”

    [원한다면 그것도 가르쳐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네가 배워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바로 흡혈귀의 능력을 제대로 쓰는 법이지.]

    “그 말은... 이제껏 내가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강엽은 다른 건 몰라도 저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여태껏 초감각이나 암신을 알차게 써먹었으니까.

    진조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일단 덤벼라. 짐과의 싸움이 시련이자 가르침이 될 것인즉.]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불구의 몸이라고 한들 강기를 다루는 초고수와 싸움이 성립될 리가 없지 않은가.

    흡혈귀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술사로서도 아득한 경지에 오른 자와 공방을 겨룰 수나 있을까?

    [오,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렴 짐이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까. 네 수준에 맞춰 상대해주마. 암신 말고는 어떠한 능력도 쓰지 않겠다. 강기도, 술법도 쓰지 않겠노라.]

    “그렇다면야....”

    물론 결손된 육신을 강기로 때우긴 했다만,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나.

    ‘좋아. 어떻게든 한방 먹여주마.’

    자신의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은 원수를 향해 원한을 불태우며 강엽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귀신같이 사라졌다.

    * * *

    강엽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느려.]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투아아앙!

    장대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크억!”

    통렬한 발길질에 걷어차인 강엽이 십여 장이나 튕겨나가며 폐허에 처박혔다.

    “쿨럭! 이런 젠장...!”

    진조와 달리 강엽에겐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망혼소를 퍼붓고, 암신을 써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다음 사각에서 기습했다.

    당연히 진조 역시 암신을 쓸 가능성에 대비했는데....

    ‘역으로 허점을 찔렸어.’

    기감으로 실체를 인지하고 대비했거늘, 반대 방향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옆구리를 맞고 날아갔다.

    ‘지금껏 나랑 싸운 놈들이 다 이런 기분이었군.’

    본의 아니게 자아성찰을 한 강엽이 혀를 찼다.

    어쨌거나 호신기를 단단히 두른 덕에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자존심은 있는 대로 구겨진 상황.

    [암신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이유를 아느냐?]

    “뛰어난 고수라면 기감으로 허상과 실체의 간극을 파악해서 대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강엽은 대응하지 못했다.

    때리기 직전에 암신을 펼쳤다든가 하는 얕은 수작에 당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복기해본 강엽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내 기감을 속인 건가?”

    [정답이다.]

    “그게 된다고?”

    [인간의 오감을 속일 수 있는데 기감을 속이지 못할 것은 무엇이냐?]

    “그야....”

    반박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에.

    [애송이, 네놈은 너무 정직하게 싸운다.]

    만약 이제껏 강엽과 싸운 적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복장이 터졌을 소리였다.

    강엽이 정직하게 싸웠다면 그들은 그 정직한 수에 걸려 박살이 났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흡혈귀로 살며 수많은 싸움을 치른 진조에게 있어 강엽이 암신을 쓰는 방식은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네놈은 능력을 너무 주어진 그대로만 쓴다. 초식에 허초와 변초가 있듯 암신도 응용하기에 따라 활동도가 무궁무진한 것을.]

    “보신경과 섞어서 썼는데?”

    [쯧쯧, 그걸로는 부족하니 하는 말이다.]

    진조가 다시 덤비라는 손짓을 보냈다.

    강엽은 지금까지 품었던 생각과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꾸며 다시 달려들었다.

    ‘시각과 청각은 없는 셈친다.’

    온몸의 신경을 기감에 집중했다.

    꽈아앙!

    [호오.]

    진조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좀 낫군. 하지만 여전히 늦다.]

    반응 속도가 늦어서 또 다시 일격을 허용했다.

    다행히 아까처럼 정타를 맞진 않았다. 어깨를 들이밀어 일격의 위력이 극대화되는 것을 저지했고, 어설프게나마 태극반을 펼쳐서 피해를 줄였다.

    그럼에도 완전히 막지는 못해서 몇 번이나 땅을 구른 끝에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호신기가 찢어진 것은 물론, 어깨 삼각근이 파열되고 쇄골이 부러져서 살갗을 뚫고 나왔다.

    “크읍...!”

    맨손으로 부러진 뼈를 맞추니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강엽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감내했다.

    [어떻게 한 건지 알아보겠느냐?]

    “...공력을 분산시켜 내 기감을 비틀었군. 내가 속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크하하!]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 광소야말로 강엽이 정답을 맞혔음을 방증하는 증거이리라.

    한동안 껄껄 웃은 진조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다시 덤비거라. 짐과 수싸움을 할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느냐? 다행히 재생력이 있으니 험하게 굴려도 죽진 않겠구나.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마음 놓고 팰 수 있으니 선재(善哉)로다!]

    “빌어먹을.”

    강엽은 지옥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진조의 말마따나 공방을 나눌 수준이 될 때까지는 처맞고 또 처맞을 모양이었다.

    * * *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강엽은 여전히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진조가 강엽의 수준에 맞춰 싸웠는데도 그랬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어. 암신을 쓰는 능력은 나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도무지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내서 수싸움을 걸었음에도 진조는 언제나 한 수를 앞서나갔던 것이다.

    [좋구나! 이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그의 가르침은 단순히 암신을 씀에 있어 상대를 속이는 방법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순간에 여러 개의 허상이 각각 개별적인 초식을 취하며 동시에 달려든다.

    ‘실체는 하나, 나머지는 허상.’

    하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허상은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기감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무공으로 한꺼번에 쓸어버리거나, 실체를 잡아야만 할 터.

    쿠웅!

    강엽이 진각을 밟자 공력 파동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그냥 충격만 준 게 아니다. 공력을 매질로 삼아 기감을 끌어올려 실체와 허상을 구분한다.

    “찾았다.”

    실체를 잡아낸 강엽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진조가 그랬듯 그 역시 공력을 미끼처럼 뿌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권기가 어린 일권이 진조의 허리를 친다.

    진조가 예상했다는 듯이 허리를 비틀며 팔뚝을 후려치는 것을 태극반의 경파로 상쇄, 흩어지듯 사라진 뒤 반격했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요 며칠 암신을 쓰는 요령에 숙달됐음에도 불구하고 진조와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망혼소는 먹히지 않고, 무공 역시 몇몇 초식으로 운 좋게 의표를 찌른 것을 빼면 먹히지 않는 실정.

    그럼에도 어떻게든 한방 먹이겠다는 포부로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기회는 딱 한 번밖에 없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암신을 펼친 진조가 어둠과 한 몸이 되어 배후를 잡고 일수(一手)를 찌른다.

    똑같이 암신을 전개한 강엽이 일장을 치켜들고....

    [호오, 벌써 깨달았느냐?]

    동시에 진조의 좌우 양면으로 달려들었다.

    마침내 강엽은 진조처럼 여러 개의 허상을 겹치듯 만들어내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아직은 달랑 두 개밖에 못 만들지만 말이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이걸로는 어림도...!]

    가소롭다는 듯이 호선을 그린 진조의 눈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씰룩거렸다.

    강엽은 단순히 허상을 만든 게 아니었다. 좌우의 허상을 중심으로 각각 흡자결의 공력을 운용했다.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공력 파동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맞물리며 흡착력을 발생시킨 것.

    비록 눈 깜짝할 시간이라고 해도, 좌우 반신이 사로잡혀 옴짝달싹못하는 진조는 바로 정면에서 튀어나온 강엽의 일장을 막지 못했다.

    십이성의 공력을 담은 한천최심장.

    침투에 특화된 장력이, 진조가 두른 호신기를 관통하고 복부에 때려박힌다.

    [......!]

    꽈아아아아앙!

    파편이 튀고 흙먼지가 일었다.

    흙먼지를 뚫고 나와 바닥을 몇 번 튕긴 강엽이 한 됫박이나 되는 피를 토했다.

    “우웨엑!”

    그렇게 한동안 피를 토한 강엽이 반쯤 망가진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이런 괴물 같은 작자 같으니...!”

    일장을 먹였다 싶은 순간 바로 반격이 날아왔던 것이다.

    스쳤는데도 광대뼈가 박살나고 안구가 터져서 피와 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흡혈귀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치명상.

    재생력을 집중해서 상처를 없앤 강엽이 부들거리는 무릎을 억지로 펴고 일어나서 저편을 노려봤다.

    흙먼지가 걷히면서 진조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역시 강엽에게 반격을 가하긴 했지만 호신기가 찢겨나간 여파를 온몸으로 감당했던 것이다.

    [허어, 설마 그런 수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하마터면 약속을 어기고 강기를 쓸 뻔했군.]

    아무리 그가 내공을 제한한 채 싸움에 임했다고 해도 놀라웠다.

    좌우에서 흡자결의 공력 파동을 일으켜서 팔다리를 붙잡다니?

    [인정하마. 짐이 한방 먹었다.]

    “고작 한방밖에 못 먹인 거지.”

    [끌끌, 욕심부리지 말거라. 너는 짐의 예상을 가뿐히 넘었느니라. 이만하면 시험은 통과했다고 봐도 되겠어.]

    “....”

    [그래, 어떤 능력을 원하느냐?]

    “뭐?”

    [말하지 않았느냐. 짐의 육신을 가져감으로써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물론 아무거나 가져갈 수는 없지만, 어딜 가져가느냐에 따라 능력이 갈린다.]

    “잘됐군. 안 그래도 싸울 때마다 당신 사타구니 보느라 짜증났는데. 이번 기회에 그 징그러운 걸 없애서 정말 고자로....”

    [참고로 짐의 육신을 짜내서 피를 마시면 된다.]

    “....”

    [크흠, 짐의 사타구니를 가져가겠다면 말리진 않으마. 정력에 관한 능력도 있으니까. 소피 보는 거 말고는 쓸모도 없는 네놈 물건도 쓸 데가 생길....]

    “필요 없어. 꺼져.”

    강엽이 빠득 이를 갈았다.

    저걸 쥐어짜느니 그냥 자살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농담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타구니를 내주겠느냐? 그리고 육신을 쥐어짤 필요도 없다.]

    찰나 진조의 양팔과 몸통 일부가 통째로 피안개로 변하더니 강엽의 모공을 통해 체내로 흡수되었다.

    “이건....”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그냥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아서 말이다. 짐이 생각할 때 이 능력이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할 것 같구나. 암신 이상으로 응용할 구석이 많은 능력이니.]

    머릿속으로 알지 못했던 지식이 흘러들어온다.

    강엽은 자신의 안에 새로운 힘이 깨어났음을 알고 전율했다.

    [그 능력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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