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61화 (60/450)

11화. 근원 (1)

“이건 자네들 몫일세.”

양평이 수수료를 떼고 받은 삼천육백 냥.

그리고 양평의 금고에서 뜯어낸 오만 냥에 달하는 재물.

장수 분타주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 돈을 강엽과 하후진에게 나눠주었다.

보수로 약속했던 천 냥에서 수수료를 뗀 구백 냥과 같이.

대신이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양평 일행을 처단하느라 분타의 낭인들을 동원했던 비용은 그 자신의 주머니로 충당했다.

“그냥 현물로 가져가겠나, 전표로 가져가겠나? 금원보나 은원보는 처분하기에 따라서 값을 더 받을 수도 있긴 한데....”

“그냥 전표로 받겠소.”

“나도.”

푼돈 몇 푼 더 받자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웠다. 강엽뿐만 아니라 하후진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쩝, 알겠네. 우리 분타 전표가 다 털리겠구만. 한데 성도전장의 전표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으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이 다른 전장의 전표로 때워야 할 듯한데... 괜찮겠나?”

“상관은 없는데 어느 전장이오?”

“장안전장(長安錢莊). 섬서에 있는 장안대상회(長安大商會)가 경영하는 전장이지. 중경에도 지점이 있는 걸로 아네만.”

“아, 난 전부 그걸로 주쇼. 내 돈은 그짝에 맡겨뒀으니까. 성도전장보다 그쪽이 더 편하우.”

“그러고 보니 사자염도 자네는 원래 섬서에서 일했다고 했었군. 그럼 딱 되겠어. 그래도 분타의 전표가 동나긴 하겠지만... 그건 금원보나 은원보로 벌충할 수 있겠지.”

그렇게 강엽은 성도전장의 전표를, 하후진은 장안전장의 전표를 받고 만족했다.

“문제는 이것일세.”

분타주가 꺼낸 것은 열네 점의 청동상이었다.

양평이 구양세가에게 받은 걸로 짐작되는 귀물.

“원래는 스물여덟 점이 있어야 하네. 게다가 비급도 따로 익혀야 하고. 지금 이건 고인이 남긴 유품의 반의 반쪼가리밖에 되지 않아. 한마디로 불완전한 게야.”

하지만 한때 천하에서 창술로 열 손가락에 꼽혔던 절세고수가 남긴 유품이니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기도 애매했다.

“자네들 성명절기가 창술이 아니긴 하지만... 뭐 그래도 가져가겠나?”

“으음, 별로 안 끌리는데. 난 한 우물만 파서.”

하후진의 말에 강엽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자신이야말로 흡혈귀의 능력에 박투술을 비롯한 여러 무공들, 모산파의 술법까지 여러 개의 우물을 한꺼번에 파고 있지 않은가?

“귀영, 자네는 어찌하겠나?”

“일단 가져가겠소.”

“설마 창술을 익히려고?”

하후진이 깜짝 놀랐다.

강엽이 강한 것은 알지만 이제 와서 새로운 무공을 파는 것은 무리였다.

무공이라는 범주에 묶여 있어도 박투술이나 창술은 궤가 전혀 다른 공부였다.

“이제 와서 창술을 익힐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절세고수의 초식을 탐구하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설령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괜찮았다. 애초에 이런 귀물을 얻을 거라 기대도 안 했었고.

“정 쓸모 없으면 나중에 창술을 쓰는 자와 교섭할 때 거래 재료로 써먹으면 된다.”

“절세고수의 유품을 거래재료로 써먹겠다니.”

고인에 대한 존중은 쥐뿔도 안 보이는 태도에 하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분타주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하지만 정말 괜찮겠소? 당신의 말대로 반의 반토막이라도 절세고수의 유품인데 말이오.”

“에잉, 내가 그런 걸 가져서 어디다 써먹겠나? 대신 우리 분타에 일손이 부족하면 도와줬으면 싶구먼.”

양평이 죽어 절정고수가 없으니 장수 분타의 위상은 한동안 많이 낮아질 것이다.

분타에서 은천패가 갖는 무게는 그토록 무거웠다.

은근한 눈길을 보내는 분타주를 향해 강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거리가 괜찮으면.”

* * *

그렇게 의뢰 한 방으로 이만팔천 냥에 달하는 거금을 벌고 덤으로 동천패 승급까지 앞둔 현재.

강엽은 지하에 있는 연공실에 박혀 있었다.

장경에게는 앞으로 보름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해둔 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은 강엽이 천천히 혈공진기를 운기하며 숨을 골랐다.

강호에 발을 담근 뒤로 늘 새로운 경험을 맞닥뜨렸지만, 이제부터 할 일은 미지의 영역이다.

어쩌면 단순히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넘어 목숨을 담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세상엔 위험을 감수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보물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운기 삼매경에 빠진 강엽은 자신의 의식이 깊은 수렁을 지나 어디론가 가는 것을 알았다.

더 깊숙하게, 자신의 근원을 향해 나아간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그곳엔 연공실과는 사뭇 다른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것은 똑같지만, 사방이 뻥 뚫린 개활지였다.

무엇보다....

‘피냄새.’

흡혈귀의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코끝을 찌르는 자욱한 피냄새.

하마터면 사방에서 진동하는 황홀한 냄새에 자제심을 무너뜨리고 이성을 굴복시키려고 들었지만, 강엽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피도 아니고, 고작 환영 따위에 굴복하는 것은 쪽팔리지 않은가?

그러던 중에 강엽은 별안간 자신이 돌덩이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소했다.

“이렇게 보니 꼭 무인도 같은데.”

왜냐하면 돌덩이 아래쪽의 바닥은 죄다 핏물로 찰박거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기름 먹인 가죽신을 신은 덕에 발이 젖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진 않군. 내 안에 이딴 게 있는 게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기에, 강엽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덤덤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옛날에 이 정도 피냄새를 맡았으면 기절했을 텐데... 나도 참 많이 바뀌었어.’

몇 번 팔다리를 움직여보고 이 장소에서도 혈공진기나 흡혈귀의 능력이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진조의 세상에 들어갔을 때처럼 현실로 느껴졌다.

‘다행히 감각이나 내공은 그대로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문득 강엽은 핏물의 수위가 점점 깊어지는 것을 알고 신색을 굳혔다.

발목 아래 자박하게 깔렸던 핏물이 이젠 발목을 덮을 정도로 깊어진 것이다.

그나마 처음 눈을 떴던 돌덩이처럼 디딤돌이 군데군데 있어 자맥질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짜 문제는 핏물이 깊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 있는 수많은 기척들.

“어쩐지 쉽지 않을 것 같더라니.”

쓴웃음을 흘린 강엽이 용천혈로 진기를 보내며 껑충 뛰어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 처음보다 높이 있는 디딤돌에 착지하자 핏물에 거품이 피어올랐다.

수면 아래를 헤엄쳤던 것들이 일제히 튀어나오며 돌덩이를 짚고 올라왔던 것.

“크르르륵!”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진조의 세상에서 만났던 괴물들.

일찍이 진혈강림대법의 제물이 되었지만 흡혈귀가 되지 못한 괴물들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서걱!

그리고 머리가 잘려나가 죽었다.

“예전이었으면 너희가 꽤 위협적이었겠지만....”

말끝을 흐린 강엽은 손톱을 휘둘러서 나머지 괴물들을 눈 깜짝할 새에 참살해버렸다.

크고 작은 육편과 피가 후두둑 떨어지더니, 희끄무레한 기운이 흘러나와 일부는 하늘로 올라가고 일부는 강엽의 몸에 스며들었다.

혼백(魂魄). 귀천하는 것은 혼이고, 강엽의 몸에 스며든 것은 백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원.’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는 그가 흡혈귀가 되었을 때 같이 사라졌을 괴물들이, 어떤 이유인지 일부가 살아남아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캬아!”

“사아아아...!”

몇 놈을 죽인 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괴성이 메아리치며 괴물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다.

“아무래도 너희들을 다 죽이면서 저 앞까지 가야 하는 모양이군.”

자연히 진조의 세상에 떨어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는 달리 괴물들이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강엽 역시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다.

디딤돌에서 디딤돌로 바람처럼 표홀하게 뛰어오르면서 근처에 있는 괴물들을 끌어들여 일거에 처리한다.

괴물마다 개체 차이가 있어 강한 괴물들은 조풍이나 일권을 맞고도 견뎌냈지만, 이어지는 공격까진 막지 못했다.

양손에 낀 용린투 위로 맺힌 검붉은 기운.

권기(拳氣)가 이성을 잃은 괴물들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며 그 너머까지 관통했다.

-휘이익!

“키아악!”

망혼소에 타격을 받은 괴물들이 비틀거린다.

강엽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톱을 휘두르자 괴물들의 몸뚱이가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그런 식으로 디딤돌을 종횡무진 오가며 괴물들을 해치우자, 머지않아 뭍이 나타났다.

“케엑!”

미간에 손톱이 박힌 괴물의 머리가 날아가는 것을 끝으로 괴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족히 이백을 넘은 괴물을 죽인 강엽은 영혼이 충만해지는 듯한 감각에 만족감보다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러나 괴물이 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자들을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닐 터.

비록 그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희미한 빛자락이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다.

무너진 폐허 위에 있는 빛바랜 옥좌.

그곳엔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자가 있었다.

일 장에 달하는 장대한 거구.

[왔구나, 후계자야.]

오른팔을 포함해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목내이가 옥좌에 앉은 채 입꼬리를 당겨서 웃고 있었다.

강엽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조....”

* * *

강엽은 놀라지 않았다.

“그렇군.”

오히려 반대였다. 스스로도 신기하리만치 침착했다.

“어쩐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니... 그게 당신 때문이었나.”

가벼운 마음으로는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당신은 죽은 줄 알았는데.”

[짐은 죽었다. 네가 보고 있는 건 그때 봤던 짐의 잔재... 즉 찌꺼기 같은 게다.]

“무슨 말이지?”

[대충 분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설 속 손오공이 머리털로 분신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짐은 네가 봤던 진조가 남긴 의념이지만, 진짜 진조는 아니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진짜 당신은 죽었다?”

[그렇다.]

“그럼 여긴 어디고,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지난날 진혈강림대법으로 만든 짐의 세상을 네 심상에 덮어씌운 것이다. 이 장소는 너의 내면이자 과거 짐의 세상이었던 곳. 더불어 짐이 이 자리에 못 박힌 이유는 후계자의 시련과 성장을 위해서이니라.]

“....”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느냐? 짐의 일부를 취해야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너 자신만 모를 뿐이지, 이미 넌 짐의 일부를 취했느니라. 암신과 재생력, 초감각 등을 가져갔을 때 말이다.]

진조가 팔뚝 아래로 뚝 잘려나간 왼팔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왼팔뿐만 아니라 한쪽 눈과 귀, 그리고 오른쪽의 발목까지 잃어버린 불구의 육신.

[네가 강해질수록 짐은 육신의 일부를 잃는다. 말하자면 짐은 네가 아직 갖지 못한 흡혈귀의 힘인 게지.]

“내가 흡혈귀로서 완전해지면 당신도 사라진다는 건가?”

[정확하다. 그러니 짐을 보고 싶지 않으면 하루 빨리 강해져서 더 많은 능력을 가져가거라.]

“그것 참 마음에 드는 말인걸. 할 수 있다면 당신 면상부터 없애고 싶은데.”

[클클, 한동안 못 본 사이에 많이 건방져졌어. 예전에 만났을 때는 지금보단 고분고분했는데... 좀 강해졌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졌느냐?]

“누구 덕분에 인생이 망가졌거든. 불만이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 후계자로 알아보든가?”

[쯧, 한마디를 안 지는군. 좋다. 마음대로 하거라. 짐은 관대하니 그 정도 무례쯤은 너그러이 용서해주겠노라.]

“머리 벗겨진 고자 새끼.”

[뭣이?]

“마음대로 하라며. 그래서 마음대로 지껄인 건데 뭐 문제라도?”

[.......]

“당신이 머리가 벗겨진 것도 사실이고, 그쪽이 볼품없이 쪼그라든 것도 사실인데. 제발 부탁이니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옷을 입어라. 보기 심히 괴롭다.”

[후....]

“열 받나 보군. 괜찮다. 열 받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이게 다 하후진 탓이다. 근묵자흑이라고, 거친 놈과 어울리다 보니 자신도 영향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됐고. 어떤 능력을 줄 수 있는지, 시련이 뭔지나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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