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처단(3)
강엽은 미리 준비한 양피지에 양평의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피를 이용해서 대상을 추격하는 혈종술의 술법.
하후진이 양평을 죽인다면 이걸 쓸 필요가 없겠지만, 목재를 많이 쓴 백산각에서는 하후진이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혼자 싸운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불을 싸지르면 천하에 다시 없을 멍청이지.’
새대가리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터.
혈종술이 문제 없이 발동된 것을 확인한 강엽은 호리병에 남을 피를 목구멍에 털었다.
구양익의 피를 마신 덕에 당분간은 피를 마실 필요가 없지만, 손에 들어온 피를 내버릴 생각은 없다.
그렇게 안쪽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강엽은 나름대로 할 일을 찾았다.
‘분타주도 제보자는 모른다고 했었다.’
상식적으로 한 분타를 책임지는 분타주가 제보자의 말만 믿고 은천패 낭인의 집에 쳐들어갈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강행했던 까닭은 간단했다. 일단 양평이 이중의뢰를 받은 정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집을 지키는 사람들을 죄다 몰살시킨 놈들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비록 낭인으로 영락했지만 양평은 으리으리한 장원에서 하인들과 시비들을 거느리며 살았다.
그리고 제보자는 양평의 집에 살던 사람들을, 남녀노소 막론하고 잔인하게 몰살시켰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분타주 역시 이게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짐작하고 양평의 집에 쳐들어갔던 것이다.
금고를 따는 게 조금 힘들긴 했지만, 지키는 사람도 없으니 힘으로 부쉈다고 했던가.
“이걸 차도살인지계라고 한다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풍을 날렸다.
촤아악!
빛살이 번뜩이면서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그러자 그 안에서 몇 개의 인영이 벼락처럼 튀어올라 담벼락과 건물 지붕에 올라섰다.
“구양세가의 암검들.”
강엽이 어둠 속에서 나온 복면인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제보자의 정체는 구양세가의 암검들이었다.
* * *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뇌물을 주고받은 당사자 말고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는가?
“낭인전을 이용해서 양평을 처리할 셈이었나? 아니면 그 반대인가? 양평을 이용해서 나랑 하후진을 처리할 셈이었나?”
“.......”
복면인들은 침묵했지만, 강엽은 그들의 당혹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그럼 다음 질문. 대체 뭔 생각으로 양평의 집에 살던 사람들을 죽인 거냐? 그들이 양평을 위해 일한다고 죄를 지은 건 아닐 텐데.”
“...우리는 도구다. 도구는 판단하지 않는다. 주인의 명령을 수행할 뿐. 그자들이 무고하고 말고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고맙다.”
“뭐?”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은 덕분에... 나중에 구양세가랑 싸우면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을 것 같거든.”
“...쳐라!”
원래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암검들은 주저없이 달려들었다.
뼛속에 뿌리를 내린 충성심이 상대가 누구든 목숨을 아끼지 말고 싸울 것을 종용한다.
자신들은 열 명이 넘으니 포위하면 강엽을 죽일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다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걸 시험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강엽이 지닌 힘이 무공만이 아니라는 것을.
-휘이익!
난데없이 울린 한 줄기 휘파람.
내공이 실린 소성(小聲)이 고막을 강타한 순간, 몸을 날린 암검들은 심령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크헉!”
“머, 머리가...!”
누군가는 귀를 틀어막고, 누군가는 머리채까지 쥐어뜯으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경험 많은 암검들만이 사태를 깨닫고 사색이 됐다.
“사술인가!?”
강엽이 사술 같은 은신술을 쓴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술을 쓸 줄이야?
강엽은 부정하지 않았다.
‘망혼소(亡魂嘯).’
소리로 이어지는 모산파의 술법.
-휘이이이이익!
“끄아아아악!”
귀에서 피가 흐르거나 피를 토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으윽! 제, 젠장! 이문혈(耳門穴)! 이문혈에 공력을 집중해라! 청각을 보호해!”
“한참 늦었어. 하려면 진작 했어야지.”
무력화된 암검들은 도마에 오른 생선과 다를 바 없는 신세.
비명과 신음이 흐르는 골목에 홀로 오연하게 선 강엽이 암검들의 명줄을 차례차례 끊기 시작했다.
‘그나마 주민은 없어서 망정이지.’
싸움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장수 분타주는 반경 삼십 장 안의 주민들에게 돈을 쥐여줘서 피신시켰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망혼소를 실전에서 써먹겠다는 발상 자체를 못했을 것이다.
넓은 범위를 타격하기 때문에 적아를 가리지 않는 게 이 술법의 최대 단점이었으니까.
‘이렇게 된 거 피나 담아야겠군.’
그러려던 강엽은 문득 이쪽으로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고 멈칫했다.
기어이 백산각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양평이 그가 있는 골목으로 달려온 것이다.
뒤늦게 강엽을 발견한 양평이 망연자실했다.
“이런, 하필이면...!”
“당신도 참 어지간히 운이 없는걸.”
어디로 도망치든 혈종술로 금방 쫓아갔겠지만, 이렇게 되면 도망칠 구석도 없었다.
강엽이 양평의 뒤쪽에서 악귀처럼 쫓아오는 하후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봐, 새대가리!”
“시끄러! 누가 새대가리라는 거냐!?”
화는 강엽에게 내지만 칼날은 양평에게 휘둘렀다.
푸른 창염에 휘감긴 도격이 골목을 가득 채울 기세로 몰아치자 양평도 막기 급급해졌다.
게다가 등 뒤엔 강엽까지 있었다.
강엽은 끼어들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양평에게는 엄청난 압박이었다.
‘제기랄! 이놈들을 뿌리쳐야 하는데...!’
수족처럼 부렸던 낭인들도 궤멸했다. 이제는 돈이나 청동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을 건사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지 못했다.
양평이 창으로 막기에 급급해하는 척하면서 퇴로를 모색하자 하후진이 벌컥 화를 냈다.
“이 새끼야! 어딜 도망가려고 들어!?”
그때 강엽이 놀리듯이 물었다.
“정말 안 끼어들어도 되나?”
그 말에 경기가 들린 듯이 소스라린 양평이 하후진의 도격을 가까스로 막고는 뒤로 쭉 밀려났다.
바로 강엽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건드리지 마!”
“좋아. 마음대로 싸워봐라.”
정말로 강엽은 양평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는 데만 주력했다.
당연히 양평은 믿지 않았지만, 강엽까지 끼어들면 정말로 답이 없었기에 저 말이 진실이기를 바라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투아앙!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양평이 내심 신음을 삼켰다.
나름 지난 전쟁에서 하후진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음에도 직접 상대해보니 상상했던 이상으로 창염의 힘이 무서웠다.
호신기를 둘렀음에도 미치도록 뜨거웠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이 익어버리는 듯한 기분.
하지만 양평 역시 은천패에 오른 절정고수였다.
하후진의 도격에 실린 역이용한 움직임으로 창대를 회전시키면서 연격을 날렸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창대로 인해 흡사 소나기 같은 창격이 쏟아지자 하후진의 손발도 바빠졌다.
양평은 그 와중에도 창대의 간격을 조절하며 거리감을 유동적으로 바꾸고 있었는데, 지근거리에서 창대를 긁으며 회전력을 가미했다.
이후 어떤 원리인지 창대를 눕히듯이 당기자 투로가 물 흐르듯 연결되었고,
쐐애애액!
일도양단의 기세를 머금은 창격이 하후진의 정수리를 내쳐왔다.
간발의 차로 몸을 틀어 피한 하후진이 창염을 두른 도격을 휘두르자 양평은 창대로 받아냈다.
그의 창대가 백련정강으로 만들어진 데다 탄자결(彈字訣)의 내공을 운용했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콰앙!
정면에서 흘리기엔 너무 막강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경파를 맞고 날아간 양평이 남의 집 담벼락에 부딪치며 기왓장을 깨부쉈다.
“끄응!”
등을 관통하는 충격에 양평이 고통스러워했다.
몸통이 갈리는 것은 면했지만 잠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놓칠 하후진이 아니었다.
“죽엇!”
양평이 일어설 틈을 주지 않고 절초를 날려온다.
대경한 양평이 다릿심만으로 펄쩍 뛰어오르며 피하지 않았다면 몸통이 갈가리 찢겨나갔을 터.
“좀 작작하고 뒈져라!”
“누가 할 소릴!”
양평이 노성을 토하며 맞섰다.
* * *
강엽은 감탄했다.
“대단한데.”
하후진이 강하다는 거야 잘 알고 있었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는 양평의 무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탐관오리 출신답지 않게 양평은 무공만은 진지하게 갈고 닦았던 것이다.
‘하긴 탐관오리가 꼭 게으르란 법은 없지. 게을렀다면 은천패가 되지도 못했을 테고.’
단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노력했을 뿐.
그 대가로 지켜야 할 자들을 내버렸던 죄가, 잊고 있었던 과거가 양평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곧 결판이 나겠어.’
원래대로라면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백중세의 싸움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상황이 양평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후진을 이겨도 강엽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내공을 아끼는 것이다.
처음만 해도 날카로운 역습으로 우세를 쥔 적이 있었지만, 한번 크게 뒤집힌 이후로는 그러지를 못했다.
반면 뒤를 생각하지 않았던 하후진은 그야말로 단전을 걸레처럼 쥐어짜며 절초를 펼쳤고 말이다.
비등비등하게 이어갔던 싸움에서 그 차이는 승패를 가르기에 충분했다.
결국 오십여 초가 지난 끝에 하후진의 도격이 창대를 분질러버리고 양평의 옆구리를 깊숙이 갈라버리고 말았다.
“......!”
양평은 죽음을 직감했다.
원래부터 승산이 없던 싸움이기는 했다.
하후진 혼자라면 모를까, 강엽까지 연이어 상대한다면 이길 턱이 없지 않은가?
해서 하후진을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심산이었다.
혈종술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강엽을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끄윽! 아, 안 돼! 나, 난... 살아야...!”
내장이 반쯤 흘러내리는데도 양평은 살겠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땅을 기어다니면서 등 뒤에서 다가오는 옛날의 은원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발악했다.
그가 기어다니는 길 위로 붉은 혈선이 실타래처럼 남았다.
“나는, 끅! 양가의 후손이다! 결코, 여기서 죽어서는...!”
천하를 주름잡는 절세고수가 되어 자신을 방계라고 무시했던 적통들을 눌러주고 모두의 우러름을 받고 싶었다.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살아남아야....
“어휴, 진짜 추하게 발버둥친다.”
하후진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양평을 비웃었다.
“사, 살려다오.”
“미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내가 널 왜 살려줘?”
“내가... 쿨럭! 잘못했다. 아아, 나, 난 여기서 죽어선 안 돼...! 가문에 돌아가서 적통들을....”
“끝까지 이기적인 새끼네, 이거.”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린 하후진이 칼자루를 역수로 쥐고 양평의 등을 내리찍었다.
“그냥 닥치고 뒈져. 듣기 싫으니까.”
양평이 어떤 야망을 품었는지, 그가 왜 자신의 고향에서 악행을 벌였는지 관심 없다.
어떤 사정이 있든 놈은 죽어 마땅한 쓰레기였으니까.
그렇게 과거의 은원을 마무리한 하후진이 묘한 여운에 잠겨 한숨을 내쉬자 강엽이 다가왔다.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글쎄다. 축하받을 일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이 시체들은 뭐여? 누굴 잡아 족친 거야?”
“구양세가의 암검들이다.”
“엥? 그놈들이 왜 여기서 나와?”
“놈들이 제보자였다. 우리끼리 싸움을 붙여서 살아남은 놈을 처리하려던 계획 같던데. 누가 이기든 만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허, 음흉한 새끼들이네.”
어쨌든 양평도, 구양세가의 암검들도 죽었으니 끝난 셈이었다.
하후진이 양평의 수급을 잘라버리며 말했다.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