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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59화 (58/450)
  • 10화. 처단 (2)

    아침 일찍 출발했던 양평 일행은 꼬박 이틀이 걸린 끝에 장수현에 도착했다.

    도보로만 이동했다면 하루는 더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관도를 걷던 중에 표국의 짐마차를 얻어타서 편하게 왔다.

    “바로 집에 가실 겁니까?”

    “아니, 백산각(栢山閣)부터 들르자.”

    낭인전 분타의 형태는 지역마다 다르다.

    중경 분타가 청송객잔이라는 이름으로 객잔 장사를 겸하고 있다면, 장수 분타는 백산각이라는 이름으로 주루 장사를 겸하고 있었다.

    “너희가 따로따로 날 찾아오는 것보다는 다 같이 한꺼번에 찾는 게 덜 번거롭지.”

    엄밀히 말해서 양평 외의 낭인들은 조천방에 고용된 몸이 아니었다.

    양평이 조천방에게 고용되어 의뢰비를 받으면 휘하의 낭인들에게 일부를 떼어주는 식.

    양평이 그러자고 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만큼 나중으로 미루자고 말하는 낭인은 없었다.

    그렇게 백산각의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낭인들이 양평을 알아보고 숨을 죽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천패는 낭인전 전체를 놓고 봐도 매우 귀하니까. 은천패가 없는 분타도 부지기수였다. 장수 분타도 양평 이전엔 은천패가 없었다.

    “어서 오게. 대승을 거뒀단 소식은 들었네.”

    애꾸눈의 노인, 장수 분타주가 껄껄 웃으며 맞아주었다.

    본래는 그도 낭인이었지만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되자 현역에서 은퇴하고 분타주가 되었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소?”

    “불행하게도 없었네. 있었다면 자네에게 좀 해결해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말이야.”

    “하하, 큰 건을 하나 해서 그런지 일생각은 없소이다.”

    “그렇구만. 저짝에서 술이나 들게. 의뢰비 챙겨서 올 테니까.”

    “죽엽청이나 주시오.”

    “그러지. 손님 받아라, 이놈아!”

    분타주가 돈을 찾으러 간 사이 점소이가 사람 숫자에 맞춰 술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내왔다.

    양평은 별 생각없이 술을 잔에 따르다가 점소이의 눈매가 잘게 경련하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뭔가 실수라도 한 것마냥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일이 있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평소보다 긴장한 것 같아서. 분타주에게 혼났느냐는 말이다.”

    “그게....”

    점소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양평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분타주한테 혼쭐이 났다면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지 않겠나.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타주에게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거라. 그럼 용서해주실 게다.”

    양평은 자신의 말에 실소했다.

    분타주에게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구하라니, 한 푼의 진심도 담기지 않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끝까지 사람 좋은 모습을 연기하며 점소이를 격려했다.

    “그,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아, 잠깐.”

    양평이 붙잡자 점소이가 움찔 떨었다.

    “아무래도 출출하군. 화과(火鍋)도 내오거라. 전병이랑 만두, 오리고기랑 단단면도.”

    “아, 알겠습니다.”

    점소이를 보낸 양평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이쪽을 힐끔거리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낭인이라는 것들이 겁만 많아가지고.’

    하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도 자신의 권위를 넘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분타주가 늦는 것 같습니다, 형님.”

    “전표를 세느라 그렇겠지. 늙은이가 안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니 너희가 이해해라.”

    악의적인 농담에 낭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주인장이 올라왔다.

    “늦어서 미안하군. 전표가 워낙 많아서.”

    그 말에 몇몇 낭인들이 다시금 웃음을 흘렸지만, 양평은 시치미를 뚝 떼고 전표를 셌다.

    “정확하군.”

    “그럼 이제 말 좀 해보게.”

    “무슨 말 말이오?”

    “다들 궁금해하거든. 소문은 행상인들을 통해 들었지만 그치들이 얼마나 자세히 알겠나? 모름지기 전장에 있던 사람만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법 아닌가?”

    “흠, 뭐 별거 없는데....”

    양평이 떨떠름해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부하 녀석을 통해 무용담을 떠벌렸을 텐데, 이번엔 딱히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

    “귀영이라는 이름이 들리던데.”

    “...그 친구 말이군.”

    순간 양평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지만, 곧 사람 좋게 웃었다.

    “대단한 친구이기는 했지.”

    절반은 진심이었다.

    만약 강엽이 몇몇 고수들을 쓰러트리지 않았다면 거룡방이 조천방을 꺾고 승리를 거머쥐었으리라.

    ‘오히려 그 친구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거룡방이 이겼다면 낭인전의 의뢰비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천방이 이겼기에 의뢰비를 받고, 이중의뢰로 받기로 한 완수금까지 챙길 수 있게 됐다.

    아직 완수금은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양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금을 뜯어낼 작정이었다.

    “그 친구가 낭인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등급이 낮긴 한데, 머지않아 은천패가 될지도 모르겠소.”

    “부럽군.”

    “음?”

    “흑풍사우가 은퇴한 뒤로 분타주들 사이에선 중경 분타가 약해졌다는 말이 돌았거든. 한데 중경이 대도시라서 그런지 바로 그런 인재가 나타나는군. 중소 도시의 분타주로서 부러울 따름이야.”

    “흥, 그놈이 제법 강하긴 해도 우리 형님에 비할 바는 아니오!”

    양평을 따르는 낭인이 욱해서 끼어들자 주변에 있던 낭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당연히 그렇고 말고! 우리 형님이 은천패가 된 지 몇 년인데. 아직 은패도 되지 못한 놈을 어떻게 형님과 비교하나?”

    “경력만 따지면 우리가 그놈보다 훨씬 낫지.”

    다들 속이 뒤틀려서 한마디씩 내뱉자 강엽이 양평보다 몇 수 아래라는 중론이 생겨났다.

    기분 좋은 아부에 양평은 웃으면서도 겸손한 척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마라. 충분히 대단한 친구니까.”

    “형님도 참.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 그런 놈에게....”

    낭인들의 말이 멈추었다.

    양평도 웃음기를 거두고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스르릉-!

    그들을 둘러쌌던 낭인들이 병장기를 꺼낸 채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오?”

    “보이는 그대로일세.”

    대답은 분타주의 입에서 나왔다.

    “낭왕삼칙을 어긴 자를 처단하려는 게지.”

    “대관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내가 낭왕삼칙을 어겼다고?”

    “호오, 발뺌할 셈인가? 자네가 거룡방의 의뢰를 받고 조천방주를 암습했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

    “분타주 몰래 이중의뢰를 받았으니 낭왕삼칙의 두 번째 규율을 어긴 셈이요, 이를 보고하지 않았으니 세 번째 규율을 어긴 셈이로다. 청부살인의뢰를 받았으니 첫 번째 규율을 어겼구나.”

    “이보시오, 분타주!”

    “낭왕삼칙을 골고루 어겼어. 그동안 은천패라고 오냐오냐 봐줬더니 네놈이 낭인전을 우습게 본 게지.”

    “웃기는 말 마시오! 내가 이중의뢰를 받았다고!? 증거도 없이 모함하면...!”

    양평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건장한 낭인 두 명이 큼지막한 목함을 들고 와서 내용물을 쏟아냈던 것이다.

    막대한 금원보와 은원보가 쏟아져내리자 피아를 막론하고 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충 세어보니 오만 냥은 되겠더군.”

    양평은 너무 놀란 나머지 석상처럼 굳어졌다.

    ‘...대체 어떻게 저걸?’

    그는 언제나 만약을 대비했다.

    일 때문에 집을 비울 일이 잦았던지라 좀도둑이 들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침상 아래에 금고를 보관해뒀는데 금고째로 털릴 줄이야?

    “내 금고를 털다니 어이가 없군. 하지만 더 어이가 없는 건 고작 재물로 내가 이중의뢰를 했다고 단정 짓는 것이오. 난 은천패의 낭인이자 신창양가의 혈손이오! 내가 재물을 가진 게 그리 이상하오!?”

    “재물만 보면 그럴지도. 하지만 이걸 보고도 발뺌할 수 있을까?”

    분타주가 목함에서 청동으로 만든 무인상(武人像)을 꺼내자 양평의 눈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건...!”

    “오십여 년 전 광동에서 경세적인 창술을 구사하는 절세고수가 나왔지. 훗날 흑룡교와의 대전에 참여했던 그는 혹시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서 일곱 개의 창술 초식을 담은 청동상 스물여덟 점과 한 권의 비급을 남겼네. 제자를 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무공을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게야. 강호에선 꽤 유명한 일화지.”

    절세고수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흑룡교와의 최후의 결전에서 전사한 것이다.

    문제는 오십 년이 지나도록 그의 무공을 계승한 후예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청동상과 비급이 암시장을 전전하며 각각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던 까닭에.

    “자네가 이중의뢰를 받았다고 제보한 사람은 자네 금고에 이게 있을 거라고 했네. 오만 냥의 재물과 스물여덟 점의 청동상 중 절반이 말일세.”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양평을 따르는 낭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평은 그들에게 청동상을 숨긴 것은 물론이고 삼만 냥을 받았다고 속였던 것이다.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양평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미치겠군. 어쩐지 운수가 억세게 좋더라니.”

    청동상까지 나온 이상 오리발을 내미는 것은 무리였다.

    누가 제보했는지는 몰라도 단단히 함정에 빠진 것이다.

    “빌어먹을 점소이 새끼가 불안해한 게 싸움이 날 걸 알았기 때문이군.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거늘.”

    양평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나오자 그와 함께 있던 낭인들까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차피 우린 한 배를 탄 처지다. 이제 와서 몰랐다고 발뺌할 생각은 마라.”

    낭인들이 이를 꽉 물었다.

    양평의 말처럼 그들은 공범이었다.

    “분타주 양반, 어떤 놈이 제보했는지 몰라도 실수한 거요. 나를 건드리고 댁이 무사할 성싶소?”

    “좀 이상하지 않나?”

    “...?”

    “여기 있는 자들이 다 모여도 은천패인 자네를 당해낼 수 없겠지. 한데 자네가 보기엔 내가 그것도 모르고 싸움을 걸었다고 보나? 단지 낭왕삼칙이란 원칙에 얽매여서 승산 없는 싸움에 꼴아박는다고?”

    “뭔가 수가 있나 본데 쉽지는 않을 거요!”

    일단은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낭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양평이 몸을 날렸다.

    이렇게 된 이상 분타주를 인질로 삼아 빠져나간다!

    “늙은이, 날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주마!”

    “지랄도 풍년이구만!”

    몸을 날린 인영이 기습적으로 양평의 몸을 뻥 걷어차버렸다.

    “이런 망할!”

    그 상황에서도 양평은 호신기로 기습을 막았지만, 완전히 충격을 막지는 못해 탁자 위로 엎어졌다.

    옷을 더럽힌 양평이 감히 자신을 가로막은 사자머리 청년을 향해 시퍼런 살기를 토해냈다.

    “감히 나를 방해하느냐, 사자염도!”

    “적산촌은 기억하냐?”

    “뭐?”

    “소륵하(疏勒河) 근처의 마을인데, 십삼 년 전쯤 창랑단이라는 마적놈들한테 짓밟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든.”

    “소륵하라면, 네놈...!”

    “네놈한테 빌붙은 마적놈들이었지. 그놈들이 내 고향을 짓밟았어. 마침 사부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노예로 팔려나갔을 거야.”

    “창랑단은 몰살당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사부가 한 일이지.”

    양평이 하후진의 고향을 짓밟은 것은 아니다.

    다만 마적놈들에게 뇌물을 받고 눈 감아줌으로써 고향 사람들의 죽음에 일조했다.

    하후진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양평을 죽일 이유로는 차고 넘쳤다.

    “네놈이 낭인전에 들어갔단 소식은 예전에 들었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난 걸 보면 내 손에 뒈질 팔자였나 보다.”

    “닥쳐라! 미천한 새끼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양평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름장을 놨다.

    여태까지 쌓아올린 것을 모두 잃어버릴 위기였음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발휘했다.

    그때 하후진이 식겁했다.

    “인마, 건드리지 않는다며!”

    “무슨 개소리....”

    양평이 말하다 말고 흠칫했다.

    뒤를 돌아보자 손톱을 휘두르는 강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악!”

    다섯 줄기의 빛줄기가 호신기를 찢고 피를 흩뿌린다.

    손톱에 묻은 피를 손가락만한 호리병에 넣은 강엽이 태연한 낯짝으로 코웃음을 쳤다.

    “혹시나 하는 사태를 준비한 거다. 네가 이놈을 놓칠 걸 대비해서 말이지.”

    “이보쇼.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뭔 헛소리세요?”

    “말해줘도 모를 거다. 난 꺼질 테니 알아서 요리해봐. 놓치면 평생 새대가리라고 불릴 각오 하고.”

    강엽은 양평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암신을 펼쳐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하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튼 저놈은 지 할 말만 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이놈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격분해서 부들부들 떠는 양평을 향해 하후진이 얄밉게 웃으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뭐긴 뭐야. 내일 아침해를 못 보고 뒈지실 송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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