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53화 (52/450)
  • 9화. 거룡 (10)

    “사람 생각 다 거기서 거기라더니....”

    거룡방주의 만면에 쓴웃음이 어렸다.

    “똑같이 뒤를 치는 식으로 나올 줄이야.”

    거룡방이 병력을 나눠 별동대를 운용했듯 조천방 역시 수적들을 이용해 뒤를 쳤다.

    학검수사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하지만 피해는 우리가 더 크구려.”

    중경 무림의 무인들이 소극적으로 싸운 것은 남의 싸움에서 피 보기 싫다는 보전 때문이지, 거룡방도들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중경 무림의 무인들이 작정하고 칼날을 휘두르면 거룡방도들로선 당해낼 재간이 없을밖에.

    반면 수적들은 독룡채주가 만들었다는 독탄과 독화살, 심지어 자기병에 맹화유(猛火油)와 부싯깃을 넣어 만든 화염병까지 던져가며 거룡방의 후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데 오선자만 보내도 되겠소? 아무리 그가 강해도 채주들의 협공을 당하면 위험할 텐데.”

    “적당히 시간만 끌라고 했다. 암검들을 열두 명이나 데려갔으니 너끈히 해내겠지.”

    절정고수 한 명에 암검들 열두 명이 상대라면 악명높은 장강의 수적들도 감히 얕볼 수 없었다.

    수적들 역시 남의 전장에서 죽고 싶진 않을 테니 필사적으로 싸우진 않을 터.

    별안간 한 흑의인이 그들 옆에 뚝 떨어지듯 나타났다.

    “조천방주는 쓰러졌다.”

    두 사람은 놀라지 않았다.

    얼굴만 보면 별다른 특색이 없는 이 남자야말로 구양세가의 암검 조직을 통솔하는 암검주였다.

    하나 암검주라는 호칭은 바깥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일 뿐.

    진짜 직위는 따로 있었다.

    “수고했다, 비검(秘劍).”

    비검전주 구양익.

    줄여서 비검이라 불리는 그는 전대 가주의 서자였다.

    탁월한 무재를 타고났으나 신분의 한계로 세가의 암검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사내.

    “한데 자네가 직접 잡아올 수는 없었나?”

    “적들이 많았다. 귀영이라는 놈도 있었고. 일단 협력자에게 말은 해놨는데 그자가 잘 해낼지는 모르겠군. 아마 안 되겠지.”

    “귀영....”

    “특이한 놈이다. 사이한 기파를 풍기는 놈이 무당 무공이라니.”

    “꼭 무당파라는 법은 없다. 천하에 유능제강의 무리를 다루는 무맥이 무당파만 있는 것도 아닐진대.”

    “아무튼 놈부터 쓰러트려야... 응?”

    적진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을 느낀 비검이 고개를 돌렸다.

    거룡방주와 학검수사 역시 조금 늦게 이변을 알아차렸다.

    조천방주의 대제자인 서만동이 칼을 높이 치켜든 채 피를 토하듯이 목구멍을 쥐어짜고 있었다.

    “전원! 거룡방의 악적들을 친다!”

    조천방과 낭인들, 그리고 몇몇 협객들이 뒤를 따르며 길을 뚫었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 거룡방주의 이맛살에 깊은 고랑이 패였다.

    “먼저 치고 오겠다는 건가?”

    “허, 조천방주를 가운데에 두고 결사항전을 할 줄 알았건만.”

    “정신을 잃은 방주가 휘말릴까 봐 걱정됐나 보군. 단순히 버티는 걸로만 만족하지 않겠다는 건가.”

    거룡방주는 저 행동에서 조천방이 끝내 태화문에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만으로 싸움을 끝내겠다는 결기를 느꼈다.

    “저쪽이 전세를 뒤집으려면 나를 잡는 수밖에 없겠지.”

    “어쩌시겠소?”

    “놈들을 쓸어버리고 조천방주를 확보한다. 엉뚱한 놈들이 개입하기 전에 끝내야겠어.”

    이미 거룡방주는 태화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을 본 것도, 기척을 느낀 것도 아니다. 하나 두 방회의 운명이 걸린 결전에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다행히 아직까진 조천방주가 고집을 부린 턱에 태화문이 개입하지 못했다.’

    무림이 강자존의 세상이라 해도 힘을 행사하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세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을 대야 다른 세력들이 걸고 넘어지지 못할 테니까.

    만약 조천방주가 진작에 고집을 꺾고 태화문의 품에 들어갈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면?

    그럼 태화문은 진작 정예 고수들을 투입했을 테고, 거룡방은 물러나야 했으리라.

    거룡방주는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조천방주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어리석은 판단이라며 혀를 찼다.

    ‘방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건 인정해주겠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야 의미가 있는 거다.’

    * * *

    힘과 힘이 충돌한다.

    “어, 어? 저, 저놈들이 나온다!”

    “막아, 이 새끼들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갑작스레 뛰쳐나온 결사대의 돌파에 거룡방도들은 속절없이 밀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엽과 하후진 등 은천패급 강자들이 선두에서 길을 뚫고 있었으니까!

    “흐아아압!”

    강엽이 손도끼를 휘두르는 거룡방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끼날과 손이 스치듯 교차하는 순간, 손목에 두른 경파가 손도끼의 궤적을 틀어버렸다.

    거룡방도의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꺾인 손도끼가 동료의 몸을 찍어버렸다.

    “아니!?”

    “너, 너...!”

    믿는 도끼에 몸통 찍힌 거룡방도가 동료를 향해 경악성을 터뜨렸지만, 해명할 기회는 없었다.

    직후 쇄도한 하후진이 두 사람을 황천길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하후진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게 아까 철권 뭐시기를 보내버린 그거냐?”

    “보내긴 뭘 보내?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죽인 줄 알겠다.”

    여상스럽게 받아친 강엽이 문득 고개를 홱 돌렸다.

    한 거룡방도가 날이 시퍼렇게 벼린 협봉검으로 서만동의 옆구리를 쑤시려고 하는 게 아닌가?

    ‘암검!’

    거룡방도들 속에 숨어있던 놈이 나온 것이다.

    워낙 창졸간의 기습이었기에 서만동은 자기 몸에 바람구멍이 날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강엽이 서만동을 구하려고 몸을 날리는 찰나, 그보다 앞서 서만동을 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콰직!

    길쭉한 창날이 거룡방도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위험했소, 서 당주!”

    “아...!”

    그제야 자신이 저승 문턱을 밟을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서만동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하나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고맙습니다, 양 무사!”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조금 있으면 적들의 수뇌부가 등장할 테니까.”

    본인의 손으로 조천방주를 암습했으면서도 양평은 서만동을 구하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조천방주를 암습해달라는 이중의뢰를 받긴 했지만, 그 사실을 드러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낭인전은 이중의뢰를 엄격히 금지한다. 이해관계가 얽힌 의뢰인들 사이에서 받는 이중의뢰는 더더욱.

    지금처럼 분쟁이 난 두 방파에게 모두 의뢰를 받는 것은 낭인전의 규칙에 위배된다.

    만약 이중의뢰를 받았다는 사실이 탄로나면?

    낭인패의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은 물론,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혀 추살령이 떨어진다.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라서 받긴 했다만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

    그때쯤 결사대의 발길도 멈추었다.

    자연히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초로인이 칼등에 아홉 개의 고리가 달린 구환도를 들고 앞길을 막고 있었으니까.

    그 옆엔 학사풍의 중년인이 한 손에 판관필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느긋하게 수염을 쓸며 결사대의 면면을 쭉 훑어보고 있었다.

    적의 수뇌부가 몸소 방도들을 이끌고 행차한 것이다.

    “귀환야차!”

    “거룡방주가 직접...!”

    범상치 않은 기세를 몸으로 느낀 결사대의 고수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덤벼라, 하룻강아지들.”

    거룡방주가 이를 드러내며 구환도를 드는 것과 동시에 바람처럼 달려든 인영이 도격을 내쳤다.

    사자갈기 같은 머리를 나부끼는 하후진이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귀영이 아니라 네놈이 덤비나?”

    실소를 흘리면서도 거룡방주는 제법 비장한 눈빛으로 하후진을 맞이했다.

    하후진이 사월유성과 맞섰던 것을 멀리서나마 얼핏 봤었다. 사월유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는데 하후진만 살아있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사월유성은 죽었는가.”

    “아아, 끈질긴 여자였어! 댁도 같이 보내주지!”

    하후진의 왼팔에서 시작된 창염이 칼날에 옮겨붙자 거룡방주의 입매가 비틀렸다.

    “만전도 아닌 것 같은데 꿈도 야무지군. 해볼 수 있다면 해봐라, 애송이.”

    패도적인 기세로 무장한 그는 창염의 열기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서로를 노려본 두 도객이 살벌한 기세를 뿌리며 부딪치기 시작했다.

    * * *

    “능운평이라고 하외다. 강호인들은 학검수사라고 불러준다오.”

    청건을 쓴 문사풍의 중년인.

    학검수사는 서원에서 글선생이나 할 것 같은 서글서글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판관필의 고수라고 했었지.’

    장경이 건네준 서책엔 학검수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악행을 일삼은 사파의 고수들을 판관필로 사혈을 찍어 격살한 고수.

    판관필은 겪어본 적이 없는 만큼 강엽도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런 강엽을 물끄러미 보던 학검수사가 문득 물었다.

    “혹시 무당파와 연이 있으시오?”

    “그건 왜 묻지?”

    “이 몸이 한때 무당파와 제법 깊은 교류를 나누었기 때문이오. 한데 한눈에 봐도 사파 같은 기세를 풍기는 자가 무당파 비슷한 무공을 쓰니 당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려.”

    구양세가에 의탁하기 전까지만 해도 학검수사는 호광성 전역을 돌아다니며 협행을 벌인 적이 있었다.

    순수한 의도로 나선 협행은 아니었다. 명성을 높여 몸값을 올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도가 어쨌든 그가 힘없는 사람들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었고, 운 좋게도 마침 근처를 지났던 무당파 도사들의 호감을 샀다.

    그 덕에 학검수사는 무당파에 머물며 잠시나마 무당 무공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말해줄 이유가 있을까?”

    “하긴 상관없겠구려.”

    입가를 들어올린 학검수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날아오면서 한 손에 든 판관필을 검처럼 찍었다.

    태극반을 펼쳐 판관필을 비틀려고 했으나, 학검수사는 그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판관필을 거두면서 유려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검을 찌르듯 판관필을 쥔 손을 쭉 뻗는데, 밑에서 네 번째 늑골과 다섯 번째 늑골 사이에 있는 요혈인 기문혈(期門穴)을 노렸다.

    판관필의 끝이 뾰족하기도 하거니와 내공이 듬뿍 실린 만큼 잘못 맞으면 까무러칠 수 있었다.

    강엽은 판관필의 첨단에 어린 날카로운 예기를 한 끗 차로 피하고는 양 눈썹 사이를 좁혔다.

    ‘어설프게 막으면 뚫리겠군.’

    동패 무고에서 읽은 어떤 비급은 권법은 장법에 약하고, 장법은 지법에 약하며, 지법은 권법에 약하다고 가르쳤다.

    학검수사는 판관필을 썼지만 무공의 양상만 놓고 보면 지법을 쓰는 것과 비슷했으니 무턱대고 잡으면 뚫릴 위험이 컸다.

    “철권긍룡에게 썼던 무공은 소용없소. 내가 이화접목의 이치를 모를 것 같소?”

    서로 간의 경지는 비슷해도 무당 무공에 익숙한 학검수사는 철권긍룡보다 능숙하게 대처했다.

    아예 강엽이 태극반으로 자신의 경력을 흐트러버릴 수 없게끔 속사로 공격한 것이다.

    몇 번 공방을 나누며 상대의 의중을 파악한 강엽은 즉시 태극반의 경력을 풀어버렸다.

    ‘쓸 만큼 썼으니 까먹을 일은 없겠지.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기도 하고.’

    무공 하나 없다고 못 싸우는 것도 아니다.

    강엽이 손톱을 세워 조풍을 날리자 학검수사가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공교롭게도 그 너머엔 거룡방도들이 있었는데,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학검수사는 분노를 터뜨리지 못했다. 그전에 높이 뛰어오른 강엽이 발을 날려왔던 것이다.

    그가 대경실색하며 몸을 피한 뒤 강엽의 발이 내리꽂혔다.

    쿠웅!

    얼마나 내공을 때려박았는지 땅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근처에 있던 자들까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충격에 학검수사의 동공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런 그를 보고 강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주겠는데....”

    입을 여는 순간 강엽은 이미 암신을 펼친 상태였다.

    학검수사가 잠시 환술의 허상에 사로잡힌 사이 옆으로 파고들면서 장력을 날린다.

    학검수사는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그는 그만큼 기감이 예민해서 눈앞의 허상과 기감의 실체를 구분할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인식의 간극을 눈치채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이 고스란히 손해로 작용했다.

    반격이 늦어서 밀려난 것.

    “흐읍!”

    바로 그때 강엽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화접목 하나 익혔다고 뭐 엄청나게 강해진 건 아니거든.”

    물론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긴 했다.

    특히 태극반 같은 무공은 앞으로 어떻게 살을 붙이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발전하리라.

    하지만 무공 하나 익혔다고 극적으로 강해졌냐고 묻는다면 조금 애매했다.

    “달리 말하면 그거 못 쓴다고 특별히 약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애초에 지금의 강엽을 이룬 근본은 유능제강이나 이화접목 따위의 무리들이 아니다.

    강엽의 눈에 선명한 붉은 안광이 떠올랐다.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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