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52화 (51/450)

9화. 거룡 (9)

“장강수로채라... 저런 수를 준비해뒀나?”

조영옥을 비롯한 태화문의 무인들은 전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자락에 있었다.

야조(夜鳥) 같은 안력을 지닌 그들은 밤하늘의 어둠에 구애받지 않고 전장을 살필 수 있었다.

조영빈이 이 가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조천방주가 미쳤군요. 본문과 손잡고 싶지 않다고 장강수로채를 끌어들이다니....”

물론 그렇게 매도할 일만은 아니었다. 장강수로채와 손을 잡았다고 해도 조건을 모르지 않은가?

조운방회와 장강수로채는 공생하면서도 서로 섞이지 않는, 마치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조영옥이 고개를 저었다.

“조천방이 장강수로채 밑에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지. 그건 사실상 사업 접겠다는 소리고... 아마 돈을 주고 끌어들였을 거다. 일시적인 고용 관계.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지.”

“수적을 돈으로 부린다고요?”

“물론 수적들이 돈 때문에만 움직이진 않았겠지. 수적은 빼앗는 존재지, 거래하는 존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수적들 입장에서도 뱃길을 독점하는 세력이 나와서 좋을 게 없거든. 그 뒤에 강력한 무림 문파가 있디면 더더욱.”

“그거야....”

“독룡채, 무악채, 적병채. 이들 세 수채의 공통점이 뭘까?”

“중경 근처의 물길에서 활동합니다.”

“만약 거룡방, 아니 구양세가가 조천방을 밀어버리고 장강 중류의 뱃길을 손에 넣으면 저들 세 수채를 가만히 둘까? 저들 수채가 상납금을 요구할 때 가만히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토벌까지 하겠습니까? 장강수로채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장강수로채는 연맹체야. 언제나 한 몸처럼 움직이지는 않아. 사실 어지간해선 자기네 영역을 안 벗어나지.”

“하나 수로맹주가 있지 않습니까?”

장강수로채, 정확히 장강수로맹의 수적들은 맹주령이 발동되면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 받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된다.

“장강수로맹의 늙은 맹주는 사도십대고수(邪道十大高手). 구양세가가 호광성에선 나름 알아준다지만 사도십대고수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너무 모험이 아닙니까?”

사도십대고수는 흑도와 사파를 대표하는 열 명의 고수들로, 천하팔존과는 별개였다.

참고로 태화문주 역시 사도십대고수의 일인이었다.

“장강수로맹도 우리처럼 상황이 복잡하다지.”

“예?”

“수로맹주가 아들에게 태사의를 물려주고 싶은데 비갑채(飛甲寨)가 걸리는 모양이야. 비갑채는 장강수로맹 서열 두 번째이니 제아무리 수로맹주인들 섣불리 건드릴 순 없지. 한데 참 공교롭게도, 저기 있는 세 수채가 비갑채주를 지지하네.”

“그렇다면...!”

수로맹주는 세 수채가 당해도 모른 척할 공산이 컸다. 그래야 비갑채의 힘을 뺄 수 있으니까.

“문제는 조천방주야. 아무리 상황이 급했어도 수적하고 손을 잡았으니 한동안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겠지. 표국이 다른 표국과의 전쟁에서 산적을 끌어들이면 바깥에서 볼 때 어떻게 보이겠니?”

“야합했다고 보이겠지요.”

통행세나 보호세를 내고 안전을 보장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오명을 뒤집어쓰는 거지. 함께 싸우는 중경 무림의 무인들도 반발할 테고.”

당장은 거룡방이라는 대적을 두고 있으니 어물쩍 넘어가도 전쟁이 끝나면 책임을 짊어져야 하리라. 조천방의 대외적인 풍문에도 좋지 않을 테니까.

“설사 이 전쟁에서 이겨도 조천방주는 자리에서 물러날 거다.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한 거야.”

“어째서 그런 짓을....”

“후대를 생각한 게야.”

대답을 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졸지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말을 잘랐음에도 조영빈은 감히 화를 내지 못했다.

화려한 비단 장삼을 입은 오척 단신의 노인.

노인의 뒤쪽엔 건장한 가마꾼 네 명이 짊어진 사인교(四人轎)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영옥 때문에 바닥에 훌쩍 내려온 상태였다.

노인이 입을 열자 모두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멍에와 오욕은 본인이 짊어지고 가겠단 게지. 방회의 부흥은 후대에 맡기고 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던가? 좋아할 순 없어도 존경스러운 사내로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죠.”

조영옥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노사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껄껄, 비록 외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나 조천방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웠소. 방도들의 끈끈한 유대감과 방회를 지켰다는 자부심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조천방주는 예까지 내다본 것 같구려.”

이번 위기를 넘긴다면 조천방은 타격은 받았을지언정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공녀, 만약 조천방이 이긴다면 어쩔 것이오?”

“조천방이 이겨도 거룡방의 영역을 빼앗지는 못하겠죠. 노사님의 말씀대로 이번에 그들이 얻은 건 많지만, 약해진 건 분명한 사실. 상처를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당분간은 정신이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거룡방의 영역을 빼앗는 거죠. 의창에 본문의 깃발을 꽂을 겁니다.”

“어떻게 말이오?”

“거룡방은 세를 키우면서 많은 원한을 샀지요. 어쩔 수 없이 숙이고 들어간 사람들도 속으로는 칼을 갈더군요. 그들을 이용할 겁니다.”

조영옥은 자세한 계획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대충 알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역시 철두절미하구려. 한데... 조천방에도 사람을 심어두지 않았소? 공녀가 원한다면 그들이 조천방주를 암습할 터인데. 조천방이 혼란에 빠진다면....”

모름지기 수장이 쓰러지면 명령체계가 흔들리는 법.

안 그래도 여러 무리가 뭉친 조천방의 세력은 구심점인 조천방주가 없으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아뇨. 이번엔 무리하지 않으려고요.”

“음?”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굳이 억지로 일을 진행시키지 않아도....”

하나 조영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변이 벌어진 것을 알아차린 조영빈이 말했다.

“누님, 조천방주가 쓰러졌는데요?”

“...뭐? 왜?”

조영옥이 황당해했다.

* * *

“허억!”

돌연 뒷목을 잡고 쓰러진 조천방주의 모습에 그를 호위하던 방도들은 비상이 걸렸다.

“암습! 암습이다!”

“사부님!”

조천방주의 대제자인 서만동은 당황하면서도 조천방주를 에워싼 채 경계 수위를 끌어올렸다.

분노와 당혹감, 두려움 등의 감정으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는 상상치도 못했다.

시체 더미 아래 숨어있던 누군가가 대롱을 통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세침(細針)을 쏴서 목 뒤 천주혈(天柱穴)을 뚫었다는 것을.

본래 천주혈은 마혈이라 이곳을 점혈당하면 저릿저릿하게 굳어지지만, 충격이 심하면 정신을 잃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

‘성공했군.’

시체 더미에 숨어있던 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운이 좋았다. 조천방주의 제자들과 부하들이 사방을 에워싼 채 방주를 호위하느라 암습할 각이 안 나왔으니까.

하나 그는 노련한 암살자답게 인내할 줄 알았다.

교룡방도들 속에 섞인 암검들이 전방을 헤집자 호위들의 신경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쏠렸다.

애초에 전문적으로 누군가를 호위했던 경험이 없는 놈들인 만큼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낭인들이 이변을 알아채고 방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들이 앞을 가렸을 때 시체 더미에 숨어있던 자도 몸을 빼고는 그들과 섞였다.

“양 무사!”

그는 비호창 양평이었다.

안색이 허옇게 질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귓가에 낮고 무거운 전음이 꽂혔다.

[연기 실력이 탁월하군.]

[의뢰는 완수했으니 약속한 대금이나 주시오.]

[암검들의 도움을 받은 주제에 당당하군. 원래는 이보다 더 빨리 끝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안 주겠다는 거요?]

[걱정 마라. 반드시 줄 테니까. 조천방주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그를 잡아야 이 전쟁은 끝이 난다.]

[알겠소이다.]

그걸 끝으로 두 사람의 밀담도 멈추었다.

내심 득의의 웃음을 흘린 양평이 다시 심각한 낯빛이 되어 대제자 서만동을 붙잡았다.

“어떻게 된 일이오? 방주님께서는 무사하신가?!”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기절하셔서...!”

“내가 한번 봐보겠네.”

맥을 잡는 척하면서 암경을 흘려넣어 확실하게 끝장내버릴 심산이었다.

한데 생각지도 않은 방해를 받았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시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손에 잡힌 양평이 흠칫해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강엽이 있었다.

그 뒤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가죽끈으로 손목이 묶인 철권긍룡이 처참한 표정으로 따라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까짓 가죽끈 따위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두 팔의 뼈가 부러진 데다 강엽이 보는 앞이라서 얌전히 끌려온 것이다.

양평은 놀라면서도 짐짓 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거 놓게. 방주님께서 어찌 쓰러지셨는지 알아내고 조치해야....”

“사람 죽는 전장에서 설마 의술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의술을 아는 사람이 누구요?”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서만동이 아차 하며 누군가를 찾아서 데려왔다.

사형제 중의 셋째이자 지난날 봉절현에서 강엽과 함께 거룡방과 싸웠던 정욱이었다.

“의술을 할 줄 아셨소?”

“겉핥기나마 아는 수준입니다.”

“방주가 쓰러졌소. 겸양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오.”

“사실 웬만한 의원들만큼은 할 줄 압니다.”

정욱은 어렸을 적부터 의술을 익혔다.

어쩌다 보니 조천방주의 제자가 되었지만, 본디 후계에 관심이 없던 그는 다른 방식으로 방에 보탬이 되고자 의술을 갈고 닦았던 것이다.

그렇게 정욱이 조천방주를 보는 사이에 가까스로 사월유성을 이긴 하후진이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찾아왔다.

“조천방주가 쓰러졌다고?”

“암습을 당했어.”

“젠장, 가뜩이나 수적들 움직임이 이상한데 진짜 엎친 데 덮친 격이구만.”

“수적들이 뭘 했길래?”

“어디서 구했는지 독탄을 쓰더라.”

“독룡채의 짓이오!”

서만동이 신음처럼 외쳤다.

독룡채주가 독공의 고수인데, 독탄을 비롯해서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그 망할 독 때문에 우리 쪽도 피해를 입고 있다고. 뭐 거룡방 쪽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세 개 수채들이 뒤를 받쳐줘도 전황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거룡방도들의 머릿수가 예상보다 많기도 했거니와, 그들 사이에 섞인 암검들은 일반 방도들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럴 게 아니라 태화문에 도움을 청합시다!”

변고를 깨달은 이들이 하나둘씩 가운데로 몰려들자 조천방도와 낭인, 무림인들이 저마다 이러쿵저러컹 떠들어댔다. 오직 수적들만 저들끼리 독자 노선을 타고 있었다.

좌중을 둘러본 서만동이 곤혹스러워했다.

“태화문을 끌어들이다니요? 그러면 이제껏 피 흘리며 싸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다 죽자는 거요!?”

그들은 조영옥이 심어놓은 바람잡이들이었다.

조천방주가 쓰러지자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그들은 태화문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까 태화문의 이공녀를 봤소. 지금도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 것이오!”

“수적들이 문제입니다! 백도 무림의 후예인 우리가 수적들과 같이 싸운다니요!?”

“시국이 시국 아닌가! 그보다는 독룡채 놈들이 독을 쓰는 걸 막아야 하네!”

웅성웅성!

‘이건 뭐 도떼기 시장도 아니고....’

그야말로 개판이 따로 없었다.

서만동 역시 사방에서 빗발치는 요구에 현기증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사이에도 적들은 수적들을 견제하면서 일부 전력을 빼서 매서운 기세로 조천방을 몰아쳤다.

“서 당주!”

“으음!”

조천방주가 쓰러졌으니 대제자인 서만동이 지휘를 이어가야 했다.

서만동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불민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때 강엽이 말했다.

“태화문을 끌어들이더라도 방주만은 반드시 지켜야 하오. 이제부턴 장군 멍군의 승부니까.”

서만동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강 무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조천방주를 빼앗기면 그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 장기로 따지면 조천방주가 ‘궁’인 셈이었다.

“저들 역시 뒤에 수적들을 뒀으니 서두르겠지. 고수들도 많으니 힘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오.”

철권긍룡과 사월유성이 전력에서 이탈했지만 아직 거룡방주와 두 명의 빈객이 남아 있었다.

암검주도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을 터.

“하지만 우리 역시 거룡방주를 잡으면 이길 수 있소.”

거룡방주를 잡는다.

암검주를 죽인다.

두 놈만 쓰러트리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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