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51화 (50/450)
  • 9화. 거룡 (8)

    강엽은 솔직히 인정했다.

    ‘운이 좋았어.’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철권긍룡의 권각술이 패(覇)와 강(强)을 지향했기에, 지난날 청수가 말한 물극필반의 이치가 순간적으로 더 크게 와닿았다.

    영감이 번뜩였고, 발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접한 무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혈공진기, 환희요오공, 한천최심장, 수많은 동패 무고의 비급들.

    찰나 그 모든 것이 낱낱이 해체되어 새롭게 합쳐졌을 때, 강엽은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의 내면에서 새로운 무공이 탄생했다는 것을.

    기연이자 기사(奇事)였다.

    ‘하나 이제 막 싹을 틔웠을 뿐.’

    미숙한 무인의 손에서 탄생한 미숙한 무공이다.

    구결조차 완성되지 않은 감각에 의존하는 무공.

    ‘일단은 익숙해져야겠지. 구결을 짜는 건 나중일이고.’

    사람의 감각은 결코 일률적이지 않다. ‘태극반’이라고 명명한 이 무공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지금의 감각을 잊어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다시 되찾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

    그러니 눈앞에 있는 전장이야말로 기회였다.

    강엽이 한 발을 내디뎠다.

    * * *

    거룡방주가 씁쓸해했다.

    “한방 먹었군.”

    철권긍룡이 패했다고 방도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거룡방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아직은 외부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어쨌든 패한 건 패한 거니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이겼다면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을.’

    상대는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낭인.

    낙승을 거두리라 예상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수로 승부가 뒤집혔다.

    “이거 참 난감하구려.”

    “철권긍룡은 어떻게 할 거지?”

    “팔이 부러졌네. 중상을 입었으니 구한다고 해도 당장 전력에 보탬이 되진 않을 터.”

    뒤편에 선 학검수사, 사월유성, 오선자가 차례대로 목소리를 냈다.

    철권긍룡의 패배와는 별개로 전쟁은 속행해야 한다.

    “알고 있다. 철권긍룡은 암검들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구하겠지.”

    거룡방주가 한 팔을 든 순간,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방도들이여, 자부심을 가져라! 너희가 더 강하다! 나와 함께 조천방 쓰레기들을 쓸어버리자!”

    “와아아아아아!”

    거룡방도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모습에 조천방주가 포효하듯 일성을 터뜨렸다.

    “형제들이여! 적도들을 살려두지 마라!”

    백색 무복을 걸친 조천방도들 역시 투지를 불태우며 원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곳곳에서 병장기가 얽히며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죽어, 이 더러운 새끼들아!”

    “이 시건방진 놈들이 감히...!”

    초반엔 조천방도들이 몰아쳤다.

    형제들과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으로 무장했고, 강엽이 철권긍룡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사기도 치솟았다.

    하지만 거룡방도들의 악바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거룡방도들로 위장한 구양세가의 암검들이 곳곳에서 살검을 휘둘렀기에 조천방도들도 덧없이 죽어나갔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고, 횃불이 바닥을 굴러다니며 시체의 옷에 옮겨붙어 매캐한 연기를 뿜어낸다.

    고수들은 본능적으로 격에 맞는 상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 * *

    “잔챙이들은 꺼져!”

    거침없이 거룡방도들을 베어넘긴 하후진이 고수를 찾아 헤맸다.

    칠흑 같은 밤이지만 양측이 입은 옷색이 다른 데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횃불 덕에 적아를 구분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죽어랏!”

    “옘병.”

    촤아악!

    피와 내장조각을 흩뿌린 시체가 쓰러진다.

    이후 몇 명의 거룡방도를 더 쓰러트린 하후진은 전장을 쭉 둘러보다 눈을 치켜떴다.

    “아니, 저것들이 대충 싸우네?”

    유성홍 등 극소수의 협객들을 제외하면 중경 무림의 무림인들은 소극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방어에 전념하며 가끔 덤비는 거룡방도들을 쳐낼 뿐,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는 없어 보인다.

    하후진이 알기로 저들 문파는 조천방을 돕는 대가로 사업 이권을 받기로 했다. 그렇다면 남의 싸움이라고 태업할 게 아니라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지 않겠는가?

    이권은 탐나는데 피는 보기 싫다는 이기심이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태도에 새삼 열이 뻗쳤다.

    “썅, 저것들을 잡아다 족치든가 해야...!”

    툴툴거린 하후진이 불현듯 위기감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숙였다.

    둥그런 철퇴가 조금 전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철퇴가 아니야!’

    북방에서 마교도들과 마적들, 이민족들의 군대를 상대해본 하후진은 온갖 기문병기들을 겪어봤다.

    잠시 스치듯이 보고도 어떤 병장기인지 알아맞혔다.

    “유성추(流星錐)?”

    길쭉한 줄에 철구나 철퇴 등을 매달아 휘두르는 병장기였다.

    고개를 돌리자 가죽 경장을 입은 여인이 수중의 줄을 머리 위로 휘젓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호호! 얼굴에 흉터 난 애송이, 칼 좀 제법 쓰는 것 같은데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는 댁은 뉘쇼?”

    “예의범절을 모르는구나. 내가 먼저 물었거늘.”

    “지랄도 풍년이다. 남의 이름 알고 싶으면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게 먼저 아닌가?”

    “흥, 뱃꾼 주제에 건방지군. 마음 넓은 내가 참으마. 이 몸은 사월유성 여진진이다.”

    “그게 누군데?”

    “...날 모른다고?”

    “그러는 댁은 나 아쇼? 사자염도 하후진이라고 섬서에선 꽤나 먹히는 이름인데 말이야.”

    “사자염도? 무명소졸의 별호치고는 꽤나 거창하구나.”

    “쯧쯧, 섬서에서 그따위로 말했다면 간첩 취급 받을 텐데. 하긴 어차피 댁이나 나나 다른 성으로 넘어가면 무명인 건 매한가지지 뭐.”

    “하....”

    사월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실을 떠나서 빈정거리는 말투가 신경에 거슬렸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허공을 붕붕 돌았던 유성추가 하후진의 머리를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팔에 감았던 줄이 풀려나면서 급작스럽게 늘어나자 하후진도 경시하지 못했다.

    유성추가 무서운 것은 투로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몸에 감아 휘돌리면서, 발로 줄을 때리면 궤도가 한 번 더 꺾이는 신기막측한 움직임을 그려냈다.

    하후진이 도면으로 유성추를 막아냈다.

    카앙!

    칼날이 웅웅 떨린다. 쳐내긴 했지만 손목이 시큰거린 탓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젠장, 그래. 실력은 인정해주마.’

    적당히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하후진이 단전의 극양지기를 올올이 풀어냈다.

    극양의 열기가 수궐음심포경맥의 곡택혈(曲澤穴)을 지나면서 들불처럼 일어난다.

    ‘염왕신공(閻王神功).’

    이글거리는 열기가 도신과 팔목 전체를 휘어감싼다.

    “극양의 무공을 익힌 놈이었나!”

    사월유성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실렸다.

    그녀의 움직임이 한층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유성추의 줄을 제 몸에 휘감거나 보폭을 크게 가져가면서 올려치는 등 현란하게 난사했기 때문에 하후진의 입장에선 접근하기 여의치 않은 상황.

    유성추의 간격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선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사월유성이 코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후웁.”

    하후진이 말없이 심호흡을 했다.

    쩌엉!

    대도와 부딪친 유성추가 파찰음을 내며 튕겨나갔다.

    유성추의 궤적을 정확히 읽고 엇박자로 대응한 것.

    반탄력을 이기지 못한 유성추가 궤적에서 이탈하자 사월유성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꽤 하는군. 조천방에 이런 고수가 있었나?”

    하후진이 조천방의 무복을 입은 탓에 사월유성은 착각했다.

    하후진은 지적하는 대신 폭발적으로 땅을 박찼다.

    “어딜!”

    손목에 줄을 감은 사월유성이 유성추의 궤적을 당기듯이 틀어 하후진의 뒤통수를 노렸다.

    ‘지금!’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듯한 동작으로 배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물론 진짜로 넘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 하중을 단단히 받친 뒤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올랐다.

    “내가 넘어진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뭔 개소리냐!?”

    사월유성이 쓰는 유성추는 줄을 조절하면 근거리와 중거리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병장기다.

    하지만 지금처럼 줄을 길게 늘어뜨린 상태에서 다시 줄을 짧게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후진은 그 점을 노리고 도격을 내쳤다.

    터어엉!

    “...!”

    “훗.”

    사월유성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간격을 파고들면 될 줄 알았나?”

    비슷한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본 그녀는 하후진이 어찌 나올지 예측할 수 있었다.

    잠시 당황하기는 했어도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유성추와 연결된 줄로 막아냈다.

    구렁이의 뱀가죽을 꼬아만든 줄은 고래 심줄보다도 질겨서, 공력을 담으면 강철보다 단단해지는 효능까지 있었다.

    “하수들의 생각은 뻔하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베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생각이 얕아!”

    사월유성이 튕기듯이 하후진을 밀었다.

    하후진이 굴하지 않고 도초를 뿌렸으나 양손에 쥔 줄로 도초를 막아내며 유성추를 잡아당겼다.

    “제법 잘 싸웠다, 애송이! 그만 죽어라!”

    유성추와 연결된 줄이 팔에 휘감기면서 유성추가 그녀의 품에 돌아왔다.

    사월유성은 짧게 쥔 유성추를 하후진의 머리 위로 찍었다.

    콰아아앙!

    “윽...!”

    사월유성이 경악했다.

    ‘뭐냐?’

    결정적인 순간 하후진이 가속하면서 그녀를 날려버린 것이다.

    “후우.”

    하후진이 숨을 길게 늘어뜨렸다.

    “간신히 성공했구만.”

    시퍼런 창염이 도신을 타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월유성은 저것이 단순한 불꽃이 아닌 극양지기의 정화임을 알고 전율했다.

    “이제부턴 좀 다를 거다.”

    하후진이 익힌 무공, 염왕신공은 자칫 수련자도 해할 수 있는 패도적인 무공.

    진기를 신중하게 수발하지 않으면 혈도를 다 태워버릴 수 있는 만큼 하후진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등활도(等活刀).’

    염왕신공과 한 쌍을 이루는 도법.

    팔열지옥(八熱地獄)의 고통을 빚어낸 염왕팔도(閻王八刀)의 일초가 전개된다.

    콰앙!

    “네놈...!”

    사월유성이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면전에 도달한 하후진이 눈 돌아갈 만큼 빠른 속공으로 도풍을 쏟아내고 있었다.

    쐐애애애액!

    칼바람이 불어닥친다.

    뜨거운 열풍이 뒤를 따른다.

    사월유성은 유성추를 휘둘러 막으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창염을 감싼 대도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로 그녀를 압박했다.

    ‘흑승도(黑繩刀).’

    숨막힐 것 같은 열기가 일대를 잠식한다.

    초식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방위를 미리 선점하고 도격을 뿌리자 사월유성은 운신이 여의치 않는 느낌을 받고 이를 악물었다.

    “이 애송이놈이 감히! 네까짓 놈이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당연한 거 아냐?”

    하후진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철권인지 뭔지도 깨졌잖아! 댁이라고 못 깨질 거 뭐 있겠어!?”

    입을 놀리는 순간에도 하후진의 도격은 사월유성을 압박했다.

    사월유성은 식은땀도 흘리지 못했다. 지옥같은 열기에 죄다 증발됐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도격을 막느라 바빠졌다.

    ‘아, 안 돼...!’

    그녀는 낭패감에 휩싸였다.

    * * *

    철권긍룡은 넋을 잃었다.

    ‘이놈은 대체....’

    주변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강엽은 철권긍룡과 달리 그 뒤에 덤비는 자들한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철권긍룡을 살려둔 것 역시 단순히 청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설마 네놈, 날 미끼로 쓴 거냐?”

    암검들을 낚기 위해서였다.

    비록 철권긍룡이 패해서 잡혔다고는 하나 배신을 한 것은 아니니 암검들 입장에선 구해야 했다.

    게다가 강엽 역시 철권긍룡을 쓰러트리느라 지치고 다쳤으니 몰래 접근하면 암살할 수 있으리라!

    ...라고 생각했던 놈들은 지금 죄다 죽어 나자빠져서 진흙밭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강엽이 철권긍룡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왜, 불만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암검주는 어떤 놈이지?”

    “뭣이?”

    “그놈도 왔다고 들었는데.”

    “...!”

    철권긍룡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맹랑한 놈은 그를 미끼로 암검들을 낚고, 암검들을 죽여서 암검주까지 끌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철권긍룡은 시치미를 뗐다.

    강엽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덤비는 족족 죽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

    “포기해라. 조천방은 절대 못 이긴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적이다!”

    “뒤에도 적들이 있다!”

    난상으로 얽힌 전장의 뒤쪽으로 족히 이백은 될 것 같은 거룡방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배에서 내렸던 이들 중 일부가 빙 둘러서 온 것이다.

    그들이 이제까지 소극적으로 나서며 자리를 지키는 중경의 무림 문파들을 덮쳤다.

    “네놈들은 거룡방의 전력을 오판했다. 겨우 이 정도 숫자로는 거룡방을 감당하지 못해.”

    “예비대인가?”

    “그렇다. 양면에서 공격받으니 이제....”

    이죽거리던 철권긍룡이 입을 다물었다.

    둥! 두웅!

    둔중한 소리였다.

    처음엔 전장의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지더니 심장을 쿵쿵 울리고 있었다.

    “북소리? 가만, 저건...!”

    장강 너머에서 새로운 배들이 등장했다.

    안력을 높여 돛에 적힌 글자를 읽은 철권긍룡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독룡(毒龍), 무악(武鍔), 적병(赤兵)... 장강수로채!”

    놀란 것은 철권긍룡만이 아니었다.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에 잠시 소강 상태에 빠졌던 양측의 무리들도 깜짝 놀랐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 편이다!”

    조천방주가 내공을 담아 크게 소리치고 나서야 조천방도들의 혼란이 잦아들었다.

    반면 거룡방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설마 이 시점에 제삼의 세력이, 그것도 조운방회와 상극인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이 나타날 줄이야?

    강엽도 어안이 벙벙했다. 지원군이 올 거란 말을 듣긴 했는데....

    ‘그게 수적이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