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9화 (48/450)

9화. 거룡 (6)

조영옥은 강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면전에서 자신의 계획이 무너질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화를 내진 않았다.

물론 불쾌하긴 했지만 잠시 욱했다고 화를 낼 만큼 그녀는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하, 재밌네요.”

그래서 강엽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수작을 부리면 어떡하려고 그런 말을 했어요?”

“말하지 않았으면 가만히 있었을 거요?”

“....”

“도행역시(倒行逆施)라고 했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순리를 거슬러 일을 강행하면 화를 입게 될 거라는 경고.

문득 강엽은 흡혈귀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내심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결정은 공녀의 몫이오. 하나 나라면 조천방주가 꿍쳐둔 한 수를 보고 결정하겠소.”

일이 조천방주의 의도대로 이루어질지는 모른다.

싸움엔 온갖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라 그가 준비한 수단이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실패하면 조천방주는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겠지. 오히려 제안을 늦게 수락해서 일을 키운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오. 반대로 당신은 조천방을 한 입에 털어먹으면서, 위기에 처한 조천방을 구했다는 칭송과 찬사를 받을 수 있소.”

“시운에 달렸다는 말을 참 어렵게 하시네요.”

하지만 조영옥은 강엽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좋아요. 당신의 충고를 기억하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강 무사. 좀 더 얘길 나누고 싶지만, 이번엔 저기 오는 분과 선약이 있거든요.”

백의를 입은 호위들을 대동한 은발의 노인.

조영옥이 사당에 온 것은 조천방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강엽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 뿐.

“나도 만나서 반가웠소. 아, 그리고....”

뒤돌았던 강엽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용린투를 낀 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들었다.

“공녀가 준 선물은 요긴하게 잘 쓰고 있소. 한천최심장도 그렇고. 내 생각보다 대단한 무공이었소.”

“그걸 벌써 익혔다고요?”

조영옥의 표정에 의문이 어렸다.

아무리 주석을 달았다고 해도 비급만 보고 며칠 만에 무공을 익히는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강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다 보니 그냥 되던데...?”

“....”

조영옥은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게 말이 돼?’

비급만으로는 무공을 익히기 힘들거니와, 가능해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구결의 참뜻을 해석하고 깨우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구결을 깨우쳐도 올바른 수련법을 제시할 스승이 없다면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컸다.

한데 스승 없이 며칠 만에 뚝딱 익혔다고?

‘경세적인 천재가 아니고서야....’

그녀도 어렸을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은 몸이었다.

재능만 보면 오라비인 대공자도 능가하며, 무공은 거의 따라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 스스로도 이제 대공자와 대등한 눈높이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녀도 한천최음장 같은 상승 장법을 비급만 읽고 며칠 만에 터득할 자신은 없었다.

터득은 하겠지만 두세 달은 공을 들여야 했다.

“잠깐....”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조영옥의 말은 잘렸다.

조천방주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온 것이다.

“오래된 사당이라길래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두 분을 만날 줄은 몰랐군요.”

“...그렇군. 이따 보세나.”

“그럼.”

강엽이 예를 갖춘 뒤 물러섰다.

두 사람이 무슨 연유로 만나는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끼어들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엽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조영옥의 시선을 일별하고 사당을 나왔다.

* * *

사당 바깥엔 백의무복에 방명(幇名)을 새긴 조천방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지난 강엽은 곧 한쪽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후진이 조천방도들과 같은 옷을 입은 채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혹시 위장 전술인가?”

“뭔 개소리야?”

“그럼 왜 조천방 옷을 입고 있는 건데.”

“옷이 없어서 빌렸지. 난 흰색은 안 입어서 가진 게 없거든.”

“.......”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냥 옷 사는 게 귀찮아서 빌린 모양이었다.

“그러는 넌 어디 놀러가는 것처럼 꾸미고 나왔구만. 허어, 비단 때깔 고운 것 좀 봐라. 부채만 쥐면 유람객일세. 여자 꼬시러 가냐?”

“내가 고른 게 아니다. 포목점에 갔더니 주인장이 난 이렇게 입는 게 어울린다고 야단법석을....”

그렇게 잡담인지 말싸움인지 모를 대화로 쓰잘데기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아, 둘 다 여기 있었구먼.”

십수 명의 낭인 무리를 대동한 장년인.

또 다른 은천패급 낭인인 비호창 양평이었다.

하후진이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돌렸기에 어쩔 수 없이 강엽이 대응했다.

“오셨군요.”

“역시 자네들도 올 줄 알았지. 한데 사자염도는 안색이 안 좋은데... 뭔 일 있나?”

“아까 먹은 게 좀 얹혔다고 합니다.”

“저런. 하필 싸움을 앞두고 배탈인가. 이거 참 무리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보중하시게.”

딱히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닌 듯 미련없이 발길을 돌리는 양평의 모습.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하후진이 짓씹듯 내뱉었다.

“저 면상은 볼 때마다 밥맛이야.”

강엽도 동감이었다.

양평의 입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지만,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으니.

하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어차피 일 끝나면 헤어질 사이였다. 낭인전에 있는 만큼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만....

“방주님!”

누군가 외친 말에 강엽이 고개를 돌렸다.

조천방주가 돌아온 것이다.

‘심경 참 복잡하겠어.’

사방에서 승냥이 같은 놈들이 평생을 헌신한 방회를 갈가리 찢으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열이 뻗치겠는가?

심약한 사람이라면 태화문의 산하에 들어가서 안전을 보장받았을 텐데, 조천방주는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알기 때문이었다. 태화문의 품에 들어가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을.

매년 막대한 상납금을 바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래처와 계약하는 것에도 지장이 생긴다.

예를 들어 태화문이 특정 표국을 콕 찝어 표물을 받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엔 뱃일을 알지도 못하는 천치를 방주랍시고 세워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조영옥은 최대한 좋은 말로 제안했겠지만 조천방주 역시 세태를 겪을 만큼 겪은 늙은 생강.

이 전쟁에서 패할 위기에 처한다면 모를까, 그전엔 절대 태화문에 굴복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거룡방이다!”

장강의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무수한 불빛을 발견한 누군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멀리서 봐도 숫자가 어마어마한 게 가히 선단(船團)이라 불러야 할 규모였다.

“썩을, 대체 몇 척이나 온 거야?”

하후진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에 보이는 숫자만 열 척이군. 뒤에 가려진 배들까지 합치면 몇 배는 될 것 같은데.”

“거점을 절반이나 털었는데 저리 많다고?”

“그래봤자 거점이지. 본타엔 거점에 둔 병력보다 더 많은 방도가 있었을 거다. 그리고 거룡방은 다른 조운방회들을 병탄했으니까.”

병탄했다는 것은 단지 영역만 빼앗은 게 아니라 짓밟은 방회의 구성원들까지 흡수했음을 뜻한다.

물론 전부 흡수하지는 못했겠지만, 그중 반의 반만 흡수했어도 엄청한 숫자였다.

만약 조천방이 낭인전의 낭인들과 중경 무림 문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한참 밀렸을 것이다.

“대형을 갖춰라!”

“허리 꼿꼿이 세우고 눈알에 힘 팍 줘!”

조천방의 고참 방도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독려했다.

조천방을 도우러 온 중경 무림의 무림인들은 예상보다 많은 적들의 숫자에 눈가를 파르르 떨었지만, 그래봤자 뱃꾼에 불과하다며 애써 애써 태연한 척했다.

거룡방의 배들은 조천방의 배들이 정박한 곳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다른 포구로 향했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한 식경이 조금 넘어서였다.

“왔군.”

흑색 단삼을 입은 험악한 사내들이 횃불을 든 채 오와 열을 맞춰 오고 있었다.

이윽고 조천방의 전열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멈춘 거룡방도들이 눈알을 부라렸다.

이십여 장이 떨어졌는데도 살기가 밤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와서 피부를 찌를 정도였다.

그때 양평이 들으란 듯이 크게 중얼거렸다.

“거룡방도들의 숫자가 천 명을 넘는다지? 소문대로 정말 개같이 많군 그래.”

아직 본격적으로 시비가 붙지 않아서 그런지 그 말은 모두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몇몇 이들이 마뜩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싸움을 앞두고 적의 숫자가 더 많다는 말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봤자 아군의 사기만 떨어지니.

하후진도 어이가 없어서 욕부터 박았다.

“저 새끼가... 뭐 하자는 수작이야?”

같은 편에 있는 이들이 눈총을 주자 양평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지만 눈매가 묘하게 휘어진 것을 보면 정말로 겁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때 거룡방도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초로인이 나타났다.

“거룡방주다!”

“귀환야차(鬼環夜叉)!”

* * *

거룡방주만 나온 게 아니었다.

거룡방주의 뒤로 삼남일녀가 나왔는데, 하나같이 거룡방주 못지않은 출중한 기도를 뿌리고 있었다.

조영옥이 경고한 구양세가의 빈객들이었다.

강엽이 그들을 슥 둘러봤다.

‘암검주는 보이지 않는군.’

조영옥의 말대로라면 암검을 이끄는 미증유의 고수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암검들을 대동하고 왔을 테니 저 안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조천방의 진영을 쭉 둘러본 거룡방주가 삼남일녀를 이끌고 오 장 앞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가 조천방주를 향해 포권을 쥐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주님!”

뒷골목 건달패처럼 치졸한 함정까지 파며 전쟁을 벌였던 인사치고는 꽤나 정중한 태도였다.

조천방주도 화답했다.

“그렇구려. 오랜만이외다, 거룡방주!”

거룡방주의 접근에 어찌할 줄을 몰랐던 조천방도들은 두 사람이 구면이라는 것에 깜짝 놀라서 웅성거렸다.

“전에 구양세가에서 방주와 만나 술잔을 나눈 게 엊그제 같건만, 이리 만나서 유감이오.”

“이십 년 전의 일을 아직도 기억해주시는군요. 저 역시 그때 나눈 술잔을 가끔 떠올리곤 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혹한 일을 벌이셨소?”

“방주님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그때 하신 말씀을 잊으셨나 보군요. 장강의 물류를 장악하는 자가 천하 상계를 장악한다고 하셨지요.”

“거룡방을 세운 게 노부 때문이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날 만남이 제 마음속에 불씨를 당겼지요. 방주님처럼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

조천방주의 미간이 당혹감으로 꿈틀거렸다. 거룡방주가 구양세가의 명을 받았다고만 생각했거늘, 저 말을 들어보면 거룡방주 또한 야심을 품은 것 같았다.

“그보다 제 제자를 돌려주시겠다고 하셨지요.”

“...끌고 와라.”

조천방주가 턱짓을 하자 조천방도들이 포승줄에 묶인 귀백량을 데려왔다.

일전에 강엽에게 당한 내상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귀백량의 낯짝은 아직도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거룡방주를 보자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렸다.

“사부님! 죄, 죄송합니다!”

“풀어주도록.”

조천방도가 단검으로 포승줄을 끊자 자유를 되찾은 귀백량이 쭈뼛거리며 거룡방주가 있는 곳에 다가갔다.

거룡방주는 제자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귀백량이 얼마나 다쳤든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제자가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으시오?”

“적에게 패전한 장수를 환대하는 법은 없지요. 하물며 적에게 겁을 먹고 도주했던 놈이라면 더더욱.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귀백량은 숫제 송장처럼 파리하게 질려서 덜덜 떨었지만 거룡방주는 끝까지 제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천방주님께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기왕지사 방도들이 보는 앞이니 서로 고수를 보내어 무를 견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생사결(生死決)을 하자는 거구려.”

조천방주가 침중하게 대답했다.

양측의 방도들이 보는 앞에서 치르는 실전비무였다.

이기는 쪽의 사기는 높아지겠지만, 지는 쪽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서로 상대를 지목하는 건 어떻습니까?”

“...염두에 둔 사람이 있으시오?”

“귀영.”

제자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거룡방주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당연히 제자를 사로잡은 고수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를 지목하겠습니다.”

“어찌하시겠는가?”

조천방주가 뒤를 힐끔거렸다.

어느 샌가 그곳엔 백색 장삼을 흩날리며 나온 강엽이 있었다.

거룡방주의 일행을 오연하게 둘러본 강엽이 한 사람에 이르러 시선이 멈추었다.

“철권긍룡.”

“자네가 굳이 하고 싶지 않다면... 음?”

“철권긍룡을 지목하겠습니다.”

지목당한 거한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마침 나도 네놈과 겨뤄보고 싶었지. 거산중권을 죽였다고?”

“그랬지.”

“그 양반은 ‘실패작’이었으니 오래 못 갈 거라 생각했지. 무맥의 실패작을 대신 치워준 네겐 외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

철권긍룡.

그는 강엽이 중경에 왔을 때 죽인 거산중권의 동문 사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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