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7화 (46/450)

9화. 거룡 (4)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구양세가의 암검은 수련생 시절 겪었던 익숙한 고통을 느꼈다.

“하아, 하아....”

그건 숨이 차는 고통이었다.

“쿨럭!”

또한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이기도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이 있다니....”

세가의 암검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손을 더럽히는 존재.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될 추악한 짓도 많이 하기 때문에 암검을 육성하려면 두 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첫째는 가문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뼛속까지 충성심을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임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불필요한 감정을 거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지금, 구양세가의 암검은 평생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감정에 사로잡혔다.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얼마 안 남은 아군과 협공한 끝에 가까스로 강엽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무가치한 노력이었다.

“너는... 뭐냐?”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깊은 상처가 눈 깜짝할 새에 아물고 있었다.

“...마공을 익힌 건가?”

“어떨까.”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혈공진기가 마공이긴 하지만, 기실 재생력은 혈공진기와 큰 연관은 없었다. 흡혈귀가 되자마자 얻은 능력이니까.

“마음대로 생각해라.”

“...빌어먹을 놈.”

암검의 고개가 떨어졌다.

강엽은 암검의 시체를 으슥한 곳에 끌고 가서 피를 마신 다음, 미리 챙겨온 물주머니에 피를 담았다.

일전에 왕가진에서 죽인 암검보다는 강했다. 은신술을 뺀 무공만 해도 어지간한 은패보다 나았으니.

‘문제는 거룡방주의 제자라는 놈을 놓친 건데....’

부상을 입은 것도 그래서였다.

귀백량이라는 놈을 탈출시키겠답시고 적들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협공을 한 것이다. 특히 구양세가의 암검이 숨겨둔 구명절초는 심장을 가를 뻔했다.

다만 강엽 역시 몸을 사리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뺐다면 다치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몸을 굴린 보람은 있었으니까.’

그때 누군가가 창고로 달려왔다.

“강 무사, 무사하시... 흐읍!”

정욱이 말하다 말고 코를 막았다.

싸움에 익숙한 그조차 욕지기가 치밀 정도로 지독한 피비린내.

그나마 사방이 어두워서 망정이지, 환한 대낮이었다면 목불인견의 참상까지 봤겠지.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난간에 몸을 내밀었다.

“거룡방주의 제자가 도망쳤는데.”

“나도 봤소. 그 간교한 놈이 하필이면 반대쪽으로 도망치느라 놓쳤소. 일단 추격조를 보내긴 했는데....”

“얼른 따라가야겠군.”

“놈을 쫓는 건 우리에게 맡겨주시오. 강 무사 혼자 싸웠는데 추격마저 맡길 순 없소.”

“내가 가는 게 더 빠를 것이오.”

굳이 귀백량을 잡겠다고 무리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강엽이 벽에 박힌 비수를 빼냈다.

적들이 떨어트린 것을 주워다 쓴 건데, 이 비수를 무리하게 던지다가 적의 칼날에 베인 것이다.

칼날에 묻은 피는 귀백량의 것이었다.

“혹시 양피지 있소?”

“어, 없는데...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정욱이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갔다.

돌아온 건 반각이 지나서였다.

“다행히 놈들의 사무실에 양피지가 있었소. 한데 이건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

발치에 걸리는 시체더미에 식겁하면서도 그는 빠르게 양피지를 전해주었다.

“자세한 건 비전이라 말해주기 그렇고, 이걸로 도망간 놈을 쫓을 것이오.”

“고작 양피지로 말이오?”

“음.”

정욱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하진 않았다. 온갖 신비가 넘쳐나는 무림강호엔 기묘막측한 비술이 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럼 난 갔다 오겠소. 뒷수습을 부탁하오.”

“혹시 인원 지원은....”

“고맙지만 나 혼자 가는 게 편해서.”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한 강엽이 정욱을 뒤로하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 * *

강엽은 혈종술을 썼다.

자신의 피를 묻히는 것보다는 추적 대상의 피로 혈종술을 쓰는 게 더 확실하다.

상대가 산을 넘든 강을 건너든 개의치 않고 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드디어 실전에서 써먹는군.’

지금까진 연습만 하고 써먹질 못했는데, 마침내 써먹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광활해졌다.

열심히 고생해서 술법을 익힌 보람이 있지 않은가?

강엽은 양피지에 나온 혈점을 따라 달렸다.

날이 밝기 전에 찾을 생각이었다.

얼추 한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여기 숨었나?’

산 중턱에 있는 낡은 암자였다.

오래전에 버려졌는지 지붕은 깨지고 곳곳에 곰팡이가 슬어서 퀴퀴한 악취를 풍겼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빛살이 번쩍였지만, 이미 초감각을 쓰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이런. 다짜고짜 칼부터 휘두르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왔으면 어쩌려고.”

“네놈이 어찌 여기에...!”

귀백량이 경악했다.

“쫓아오는 놈들은 뿌리쳤는데!”

설마 강엽이 술법으로 쫓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귀백량이었다.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지금 그게 중요한가?”

강엽이 손바닥에 막힌 구환도의 칼날을 튕겨냈다.

칼날을 타고 흐른 암경이 칼자루까지 이어지자 귀백량의 안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큭, 이놈...!”

강엽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광석화처럼 품을 파고들며 일장을 날려 벽에 처박았다.

“우웩!”

새우등처럼 엎드린 귀백량이 선지피를 왈칵 토했다.

“쿨럭! 이게 뭔...!”

귀백량의 낯짝이 파리해졌다.

격중당한 부위를 중심으로 한기가 퍼지면서 몸살을 앓는 것마냥 오한이 들었던 것이다.

“한천최심장(寒天最深掌)이라는 거다. 사람한테 써보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괜찮은걸?”

일전에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고 조영옥에게 선물받은 비급.

친절하게 주석도 달려 있었기에 내공 운용법을 해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실전에 써본 적이 없는 만큼 혼전 중에 쓰기는 애매해서 아껴두고 않았는데, 마침 일대일 구도가 돼서 시험 삼아 써본 것이다.

목숨을 앗지 않을 만큼만 공력을 담아서.

‘예상보다는 크게 다쳤지만.’

적당히 무력화시키고 끝낼 요량이었는데 한천최심장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했다.

경파를 이기지 못하고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손바닥만한 검은 피멍이 보일 지경.

“쿨럭! 나, 날 어쩔 셈이냐?”

“걱정 마라. 죽이진 않는다. 너 같은 쓰레기도 일단 살려두면 도움은 되는 법이거든.”

“도움이 돼? 설마...!”

“이만 자라.”

강엽이 가볍게 내친 손날에 뒷목을 맞은 귀백량은 기절했다.

* * *

정욱은 귀백량을 짐짝처럼 던진 강엽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잡아오다니...!’

그가 보낸 추격조는 전문적으로 추종술을 익힌 것도 아니고 근방 지리에도 어두워서 놓쳤던 것이다.

“데려가시오. 여러 군데로 써먹을 데가 많을 거요.”

심문해서 거룡방이나 구양세가의 정보를 빼내거나, 거룡방주를 압박할 패로 써먹을 수 있으리라.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적 수괴의 제자를 잡은 것은 널리 퍼뜨릴 만한 위업이었다.

자연스레 정욱의 말투도 달라졌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돈 받고 하는 일이니 괘념치 마시오. 그나저나 생포한 적들은 어쩔 셈이오?”

“글쎄요.”

정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들이 항복했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방도들의 관을 묻은 흙이 마르지도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놈들을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목을 잘라서 그 목을 효수하고 싶습니다.”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강엽은 무림 방파끼리의 항쟁을 모른다. 뒷골목 흑도 건달패들의 싸움은 몇 번 겪어봤지만, 이런 대규모 항쟁은 이번 의뢰가 처음이다. 하지만 처음이라고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겠는가?

“난 당신들의 복수심을 이해하지 못하오. 당신들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으니까. 그러니 감정적인 관점을 빼고 이성적인 관점에서만 논하겠소. 이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천방이 정의여야 이길 수 있소.”

선악이 분명치 않은 진흙탕 싸움이 되면 지금처럼 중경의 무림 문파들이 개입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실리적으로도 그렇지. 거룡방도들을 죽이는 건 조천방에 득될 게 없소.”

“어째서입니까?”

이 대목에선 정욱뿐만 아니라 다른 조천방도들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적의 숫자를 줄이는 게 왜 득이 안 된단 말인가?

“죽이면 거룡방도 복수심을 품을 테니까. 항복한 적들을 잡아죽이면 더더욱. 감정 풀자고 적들의 사기를 높여줄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럼 어쩌는 게 좋겠습니까?”

“팔 하나씩 부러뜨려서 보내시오.”

“예?”

“다리는 걸어가야 하니 그냥 두고. 팔 하나는 남겨놔야 밥을 먹을 테니 양팔도 제외.”

물론 이렇게 해도 거룡방은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분노하는 것 이상의 이득이 생긴다.

“전쟁 중에 싸우다 온 부상자들 내치면 아군의 사기도 떨어지오. 거룡방주는 부상자들을 받아줘야 하지. 하지만 부상자들을 다시 전장으로 내몰 수는 없소. 내몰아봤자 별 도움도 안 되고.”

강엽이야 흡혈귀니까 뼈가 으스러져도 금방 낫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봉절현에서 의창까지 먼 거리를 가야 하는 거룡방도들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운 좋게 거룡방에 도착해도 만신창이가 되었을 터. 같은 편을 내팽개칠 수는 없으니, 거룡방이 본타를 비우더라도 부상자들을 지킬 병력을 따로 빼야 하오.”

“....”

물론 거룡방주가 본타가 털리든 말든 영혼의 한 방을 노리겠다고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긁어모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구양세가에서 막을 공산이 컸다.

‘확실히... 이건 생각도 못한 관점이다.’

듣기 전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듣고 나니 모두 구구절절 옳은 말이 아닌가?

“강 무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붙잡힌 거룡방도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 * *

그날, 거룡방의 열두 개 거점 중에 여덟 곳이 공격받았고 그중 절반이 털렸다.

남은 절반도 무사하진 않았다. 분타나 거점이 불탔으며, 사상자가 세 자릿수 이상 나온 것이다.

결정적으로 상당한 화물들을 도둑맞거나 파손되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도 큰 손해였다.

거룡방은 좌시하지 않았다.

‘조천방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방파 항쟁과 무관한 상계의 물건을 약탈했다. 또한 민가에 큰 피해를 입힘으로서 민생을 어지럽혔다. 참으로 천인공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 주장에 대하여 조천방은 코웃음을 치며 일침을 가했다.

‘전쟁은 거룡방이 먼저 시작했다. 간악한 음모로 본방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고, 방도들과 그들의 식구를 무참히 학살하였다. 또한 본방이 잠시 맡은 물건들을 도둑질하여 큰 손해를 입혔다.’

뒷말도 덧붙였다.

‘하나 본방은 거룡방과 다르다. 거룡방에 물건을 맡긴 사람들이 무슨 죄를 졌겠는가? 본방은 거룡방의 거점들이 빈 틈을 타서 도적들이 도둑질을 할까 염려되어 화물들을 잠시 가져왔을 뿐, 삿된 의도는 전혀 없다. 보관한 화물들은 조건 없이 원 주인에게 돌려주겠다. 또한 파손된 화물들에 대해서도 추후 적절한 배상을 하겠다.’

그리고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도둑건에 대한 진상도 밝혔다.

창고 열쇠를 훔쳐서 달아난 자를 붙잡은 것이다.

‘거룡방의 주장은 처음부터 기만과 날조였다. 그들은 장강 중류의 물류를 독점하기 위해 사람을 매수하고 거짓 명분을 내세웠을 뿐. 이는 사마외도와 다를 바 없으니 마땅히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리라!’

거룡방은 저 주장이야말로 선동이고 날조라고 주장했지만 대세는 조천방에 넘어갔다.

하물며 조천방이 거룡방주의 제자를 생포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전력적인 면에서도 꿀릴 게 없음을 증명했다.

‘우리는 거룡방처럼 무도하지 않다. 거룡방주가 요청하지 않아도 귀백량의 신병을 인도하겠다.’

‘거룡방주에게 고한다. 무익한 전쟁으로 장강의 물길을 어지럽히는 것은 하늘의 노여움을 살 일이다. 민생과 상계의 안정을 위해 하루 빨리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다가오는 보름에 당신의 제자를 인도하는 자리에서 승부를 가릴 것을 요구한다.’

‘거절해도 좋다. 그러나 거절하면 온 강호 동도들이 당신을 겁쟁이라 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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