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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43화 (42/450)
  • 8화. 항쟁 (8)

    두 사람이 주먹을 부딪쳤다.

    강엽은 용린투를 끼지 않았다.

    청수 역시 적수공권으로 맞섰다.

    쫘악! 퍼억!

    순수하게 육장을 부딪치며 무공을 펼친다.

    내공을 봉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한 것처럼 일정 수준에 맞추었다.

    또한 변초나 허초를 쓰지 않고, 상대의 투로를 끊으려는 시도 역시 삼갔다.

    강엽이 당초 생각했듯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 한계점만 정해놨을 뿐, 두 사람 모두 그 안에선 가열차게 부딪치며 투로를 전개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서로 다른 무공을 펼치는데도 놀랍도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 투로에 태극의 무리를 녹였기 때문이다.

    강엽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태극의 무공만 놓고 보면 저쪽이 윗줄.’

    어쩔 수 없었다. 강엽이 단순히 태극의 심상을 가미하는 것에 그친 데 반해 청수가 펼치는 무당 무공은 태극 그 자체였으니.

    그나마 백중세를 이룬 것은 강엽이 순간순간 내공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며 변칙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문득 청수가 말했다.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음?”

    “노자께서 설파하신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구절입니다.”

    유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장삼풍이 시조가 되어 건립한 북두궁파(北斗宮派), 오늘날 무당파라 불리는 무맥의 뿌리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무리가 녹아 있었다.

    “모든 사물은 극에 이르면 반전합니다. 강성함이 극에 달하면 도리어 약해지며, 그 안에 담긴 약함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태극을 그리듯 발로 원을 그린 청수가 부드럽게 운신하면서 강엽의 배후를 점했다.

    어깨 삼각근 부근에 손이 닿자 움찔한 강엽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틀며 발경 각법을 날렸다.

    그러나 청수의 장심에서 소용돌이치는 심후한 공력이 외기의 침범을 막아냈다.

    “...!”

    휘리릭!

    강엽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뒤집힌다.

    하나 창졸간에도 강엽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낙법을 취하며 청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단하군.’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단지 청수의 움직임만 태극의 이치를 따르는 게 아니라, 땅바닥 잎사귀들까지 기파에 휘말려 태극의 음양도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저 공간은 청수의 권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파가 일대를 드리웠으니, 청수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그 이상의 힘으로 부수거나 기파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야 하리라.

    “인정하지. 똑같이 따라하진 못하겠어.”

    아무리 진조의 영성이 있어도 내공을 운용하는 심법을 모르는 한 똑같이 흉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내 식대로 녹여낼 수밖에.”

    강엽은 청수와 싸우면서 그처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애초에 저 태극은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단순히 심상을 입히는 걸로는 부족하다.’

    혈공진기에 태극의 심상을 담는 걸로는 부족하다.

    느낌만 비슷하게 가져갈 뿐, 참된 의미에서 태극의 무리를 입혔다고 보기 힘들다. 똑같은 무공으로 싸워봤자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었다.

    그에 대항하려면 아마도...

    ‘혈공진기의 운기 경로를 태극의 심상에 맞게 새롭게 짜야겠지.’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할 소리였다.

    한마디로 무맥의 근간인 심법을 제멋대로 뜯어고치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특히 심법은 내가기공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함부로 손댈 물건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 있는 짓거리였다. 재생력이 있어도 위험천만하다. 혈공진기가 골수에 미치면 피에 미친 광인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엽은 왠지 모르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태극의 심상을 이용해서 영약의 기운을 혈공진기에 녹여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오의(奧義)는 진작 깨우쳤으니 운기 경로를 짜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청수가 언급한 물극필반의 이치가 큰 영감을 주었다.

    화아악!

    강엽의 기파가 변하기 시작하자 청수가 움찔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역시....”

    무당의 정종 내공은 사특한 기운과 상극이다.

    일전의 비무대회에서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접하니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청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강엽과 다시 부딪쳤다.

    빠바바바바바박!

    살기를 담지 않았음에도 공력이 끊임없이 반발한다.

    종합적으로 놓고 본다면 강엽이 윗줄이었다.

    일전에 강엽은 구엽월령초를 복용한 덕에 내공의 화후가 깊어졌다. 전력을 다하면 싸움을 한순간에 뒤집어버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강엽은 그러지 않았다.

    청수가 그를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듯 그 역시 청수와 부딪치며 태극의 심상을 좀 더 깊이 헤아리고자 했다.

    몸으로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전해졌다. 마치 투명한 물길 아래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강엽은 태극이야말로 혈공진기가 나아갈 길이라고 확신했기에 멈추지 않았다.

    청수 또한 멈추지 않았다.

    ‘강 도우,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처음엔 사파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무당 면장을 훔쳐배웠다는 사실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체를 가져간 건 아니니 내버려둬야 할지, 아니면 무공의 유출을 경계하여 조치를 취해야 할지. 혹여나 강엽이 삿된 일에 그 힘을 쓰지는 않을지.

    고민은 깊어졌고, 이내 번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아서 다시 한번 강엽을 찾았다. 그리고 싸우면서 깨달았다. 강엽이 진짜로 무당의 무공을 훔친 건 아니라는 것을.

    그러자 이번엔 호기심이 들었다. 강엽은 어떤 사람인가. 단순히 사파의 무인인가. 아니면....

    퍼엉!

    “으윽.”

    청수가 몇 걸음 물러났다.

    “딴생각을 하는군. 집중하지 못하잖아.”

    “...실례했군요.”

    만면에 쓴웃음을 머금은 청수가 허리를 곧게 펴더니, 강엽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강 도우.”

    “고민은 좀 풀렸나?”

    “예.”

    모든 의문이 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

    “주제넘은 참견이겠지만... 제게, 아니, 무당에 빚을 느끼신다면 그 힘을 신중히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

    “왜?”

    “아, 아니... 너무 흔쾌히 말씀해주셔서요.”

    “직업이 직업이니 사람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해줘. 그래도 이 힘을 분별없이 쓰지는 않을 거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청수도 표주를 다니면서 강호가 얼마나 험한지 배웠다.

    태극의 심상이 깃든 무공을 신중히 써달라는 건 되도록 살생을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도산검림 무림강호에서 그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인가?

    비록 말뿐인 약속이라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계속 해보자고.”

    “예?”

    “예는 무슨.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여도 나가는 건 아니야. 난 아직 볼일 남았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어울려줘야겠어.”

    오연하게 입꼬리를 올린 강엽이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앞뒤로 까딱였다.

    청수의 목덜미에 비지땀이 흘렀다.

    ‘서, 설마... 또 뺏기는 거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잠깐 겨룬 것만으로 타인의 무공을 빼앗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눈앞에 그걸 해낸 인간이 있으니 안심이 안 되었다.

    “크흠, 강 도우. 실은 제가 정말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다, 다음에 다시 오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도 일 나가야 하니 조금만 더 해보자고. 그럼 깔끔하게 놔줄 테니까.”

    “....”

    청수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 * *

    강엽은 청수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타인이 알면 민감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강엽은 웬 미친 늙은이한테 잡혀서 억지로 제자가 되었다가 얼마 전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 자유의 몸이 되면서 강호에 출도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뭐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거짓말은 아니지.’

    모산혈조와 진조를 섞긴 했지만 말이다.

    굳이 청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무공 연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수를 비롯한 몇몇 무림인들을 통해 소문을 퍼뜨린다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터.

    아예 꽁꽁 숨기는 것보다는 두루뭉술한 소문이라도 있는 게 그나마 덜 수상하지 않겠는가?

    ‘내가 정종무공을 익혔다면 굳이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하지만 혈공진기는 사마외도의 무공이다.

    무공 연원이 아예 알려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사대마교의 후예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강엽만 모를 뿐, 태화문의 이공녀인 조영옥과 그녀의 이복동생인 조영빈은 한때 강엽이 사대마교의 후예일지 모른다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사대마교의 후예인 무명객을 잡은 공로로 지금은 의심의 색채가 많이 흐려졌지만 말이다.

    이후 청수가 자신의 강호 경험을 들려주었는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선 강엽도 깜짝 놀랐다.

    “오백 냥을 다 썼다고?”

    놀랍게도 청수는 비무대회 준우승으로 받은 상금을 며칠 만에 다 날려먹은 것이다.

    “신세를 지는 댁에 편찮으신 분이 계셔서 약값을 좀 보태드렸습니다. 고아 애들한테 밥도 좀 사주고, 가까운 절에 맡기면서 시주 좀 했지요. 처음엔 도관에 맡기려고 했는데 가까운 도관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엔 너무 멀어서....”

    여차저차해서 수중에 은전 몇 푼밖에 안 남았다는 게 청수의 설명이었다.

    강엽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그럼 돈을 벌려고 한 이유가?”

    “짧게나마 강호를 견문하니 무공으로 안 되는 일도 돈으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돈은 신외지물이니 좋은 데 쓰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놀라운걸.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진심이었다. 강엽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중얼거리자 청수가 떫은 얼굴이 되었다.

    “강 도우께선 대체 저를 어찌 생각하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되바라진 말코인 줄로만 알았지. 오백 냥을 다 썼다길래 기루나 도박장에서 흥청망청했나 생각했는데....”

    “무, 무슨! 전 도박장 안 갑니다!”

    “기루는 왜 빼는데?”

    “....”

    청수의 입매가 움찔 떨리자 강엽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원시천존과 장삼풍 조사와 무당파 장문인께 맹세코 한 번도 안 갔나?”

    “어흠! 중경의 물가는 참 비싸더군요. 제 생각엔 무한(武漢)보다 더 비싼 것 같습니다. 사원루가 중경제일루주라길래 얼마나 대단한지 가봤더니 바가지만 당했지 뭡니까. 눈 감으면 코 베어가니 참으로 무서운 도시입니다.”

    “....”

    무당파 도사의 협행으로 벅차오른 감동이 바닷물이 덮친 것마냥 짜게 식는다.

    본인도 민망한지 청수는 헛기침을 연발했다.

    “크흠! 저, 저는 어디까지나 예인들의 음률을 감상하기 위해 간 겁니다. 하,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긴 사원루는 음과 가무를 파는 고급주루일 뿐, 매음으로 먹고 사는 홍등가의 기루들과는 격이 달랐다.

    사원루의 예기(藝妓)들은 옷고름을 풀지 않는다. 심지어 술시중도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원루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예기들의 재주가 뛰어난 데다 하나같이 보기 힘든 미녀들이기 때문이다.

    강엽이 이죽거렸다.

    “무당파 사람들 앞에서도 똑같이 말하면 믿어준다.”

    “....”

    청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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