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항쟁 (5)
원래 하후진은 비무대회에서 떨어진 뒤 중경을 떠나려고 했다.
모아둔 돈도 많으니 그 유명한 장강삼협을 유람하고, 중경제일주루라고 불리는 사원루(四院樓)에서 놀고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몸을 추스르고 떠나려는데 스스로를 조천방의 총관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거금을 들고 찾아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동인패는 은전 열 냥에 움직이지만, 은패급이 되면 수백 냥에 움직인다. 한 계단씩 오를수록 의뢰비가 껑충 뛴다. 은천패쯤 되면 천 냥은 기본이었다.
조천방의 총관은 삼천 냥을 가져왔다.
‘음, 그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일하자!’
아쉽게도 삼천 냥을 혼자 꿀꺽하진 못했다. 낭인전에 속한 낭인들이 가외로 의뢰를 받는 건 낭인전의 규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해서 중경 분타를 통해 의뢰를 받고 조천방에 합류해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쓰벌, 저게 어딜 봐서 동지패야?”
촤악!
원초적인 폭력이 펼쳐진다.
위에서 짓쳐든 낭아봉(狼牙棒)을 피한 강엽이 거룡방도의 명치에 일권을 꽂았다.
새우등처럼 꺾인 거룡방도의 몸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안구가 튀어나온 거룡방도가 컥하고 선혈을 토하면서 나뒹굴었다.
그 뒤에서 삼절곤을 휘두른 자는 간격을 파고들기도 전에 조풍을 맞고 피투성이가 됐다.
빠각!
“억!”
대충 내지른 발길질에 무릎이 아작난 거룡방도가 쓰러진다. 뒤이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른 자는 완맥이 꺾이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우직! 우드드득!
“아아아아악!”
박살난 뼈가 살갗을 뚫고 나오자 기회만 엿보고 있던 거룡방도들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왜들 그러나? 들어와 봐!”
“이 자식!”
격분한 거룡방도가 달려들었지만 강엽은 코웃음을 치며 잡고 있는 놈을 뻥 걷어찼다.
차마 같은 편을 베진 못하고 주춤한 틈을 타서 달려든 강엽이 시원한 한방을 선사해주었다.
그 순간, 거룡방도들이 함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며 사방에서 짓쳐들었다.
강엽은 대충 한두 놈을 걷어찬 다음 아무렇게나 방치된 짐수레에 뛰어올랐다.
이후 달려드는 놈들을 피해 다시 뛰어올라 건물 지붕에 올랐다.
마침 하후진도 수에서 밀리는 바람에 숨을 고를 겸 올라온 참이라 두 사람은 자연스레 등을 맞댔다.
하후진이 씩 웃었다.
“여! 오랜만이구만, 귀영!”
“중경을 떠난 줄 알았는데?”
“거절하기엔 너무 큰 돈을 줘서 말이야!”
“호오, 얼마?”
“푸하하! 듣고 놀라지나 마라! 무려 삼천 냥이다! 느그 집엔 이런 거 없지!?”
“....”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요살마녀 현상금이 만 냥인데.”
“....”
“생각해보니 비무대회에서 천 냥 벌고, 영약까지 먹었군. 그건 얼마인지 모르겠는데....”
“제, 젠장. 내가 잘못했어. 그만해.”
“알면 됐다.”
강엽이 코웃음을 치자 하후진은 쓰린 속을 달래면서 속으로 온갖 욕설을 구시렁거렸다.
“근데 너도 이쪽에 고용됐냐?”
“아직 몰라.”
“엥?”
“조건을 붙였다. 그 뒤에 일이 생겨 잠시 중경을 떠났고. 청송객잔 가서 조천방이 내 조건을 받아들였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발목이 잡힌 것이다.
“저쪽의 고수들은?”
“몇 놈 있지. 저기 오네.”
거룡방도들과 달리 지형지물에 구애받지 않는 보신경의 소유자들이었다.
마치 허공을 솟듯이 주변 건물들에 올라온 그들이 두 사람이 있는 지붕으로 껑충 뛰었다.
“못 보던 놈이 나타났군. 네놈은 어디서 온 아무개인데 본방의 행사를 방해하느냐?”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과 하후진을 포위한 고수들은 네 명.
느껴지는 기도가 상당했다.
“이놈들은 누구지?”
“구양세가의 암검(暗劍).”
“암검?”
“더러운 일을 하는 놈들이야.”
음지에서 세가의 이익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사냥개들.
구양세가가 명분이나 세간의 이목 때문에 숨겨야 할 구린 일을 대행하는 존재들이었다.
“본인들은 부정하지만 말이지.”
“....”
그 말대로 구양세가가 언급됐는데도 포위한 고수들은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실소를 흘리며 옻칠해서 새카매진 흑검을 들어올렸다.
“이거야 원. 구양세가의 이름이 왜 자꾸 나오는 건지. 우린 거룡방인데 말이야.”
“푸흐흐, 그렇게 말하고 싶으시겠지.”
하후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공평하게 두 명씩 맡자고. 어때?”
“아니.”
고개를 저은 강엽이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장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숨은 놈들 다 내보내라.”
“음?”
“모르는 척하지 말고. 더 숨겨뒀지?”
장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쳐라.”
그를 비롯해 네 명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한 놈을 돌려차면서 하후진이 외쳤다.
“야! 그 말 진짜냐? 진짜로 숨은 놈이 더 있어!?”
마찬가지로 용린투로 상대의 검을 쳐내면서 반격을 가한 강엽이 외쳤다.
“감이다!”
“확실하게 말해!”
“있어! 두 놈이다! 네 쪽은 나무 위다!”
“잠깐, 나무 위라면...!”
마침 하후진의 왼쪽에 나무가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하후진이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눈과 마주치고 식겁했다.
“시발, 깜짝이야!”
카앙!
불쑥 뛰쳐나온 암검이 하후진의 대도와 얽히며 불똥을 튀긴다.
동시에 다른 두 명이 짓쳐들어왔다.
“이 새끼들이...!”
하후진이 이를 갈았다.
정면의 암검을 튕기듯이 쳐내며 원심력을 살려 도격을 뿌리자 강맹한 경파가 일어났다.
하지만 암검들은 지붕 위를 구르며 경파를 피하고 하후진의 하체를 노렸다. 하후진이 위기를 직감하고 진각을 밟아 기왓장을 깨트렸다.
파편들이 각각 진기를 머금고 쏘아지자 암검들이 황급히 피했다.
“저리 꺼져!”
그 사이에 배후를 노린 또 다른 암검을 쳐서 날려버린 하후진이 인상을 썼다.
이 대 일이라면 버틸 만했다. 하지만 삼 대 일의 구도가 되자 불리해졌다.
사방이 탁 트인 장소도 문제였다.
“이봐, 이놈들 유인해야...!”
강엽을 슬쩍 바라본 하후진이 입을 떡 벌렸다.
그를 공격한 암검들도 마찬가지였다.
* * *
“지금은 밤이지.”
“...?”
강엽을 둘러싼 암검들이 뜬금없이 무슨 얘기냐는 듯 눈가를 가늘게 떴다.
강엽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그렇다고.”
암신을 펼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투학!
“허엇!”
장년인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분명히 눈앞에 강엽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의 옆에서 기습이 날아오는 게 아닌가?
“피해?”
강엽도 조금 놀랐다.
싸움을 쉽게 가져가기 위해 초장부터 암신을 썼건만, 설마 무위에 그칠 줄이야.
“이놈!”
장년인이 노호성을 지르며 반격했다.
심후한 내공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유형화되어 용린투와 부딪쳤다.
허공을 떨쳐 울리는 우렛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밀려났다.
지붕 끝까지 몰린 강엽이 몸을 뒤집는 찰나, 홀연히 나타난 암검이 옆구리를 노렸다.
하지만 잔상을 베는 데 그쳤다. 강엽이 몸을 뒤집으면서 암신을 펼쳤기 때문이다.
“뒤다!”
장년인이 외쳤다.
하지만 암검이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건 어둠 뿐이었다.
이미 강엽의 손에 안면이 잡혔으니까.
그 와중에도 검을 휘둘렀지만....
콰앙!
강엽이 그대로 암검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면서 반항도 허망하게 끝났다.
당초 노렸던 장년인은 죽이지 못했지만, 한 놈을 일찌감치 해치운 것이다.
함께 협공을 꾀했던 암검이 가늘게 동요했지만, 몸에 배인 버릇대로 곧장 검초를 이어나갔다.
장년인도 합류해서 매서운 검격을 뿌리니 그야말로 어둠이 환한 빛살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잔상밖에 베지 못했다.
‘이건 이형환위가 아니다!’
치열한 격전을 거치며 살아남은 암검답게 장년인은 어렴풋이나마 파악했다. 강엽의 잔상은 이형환위보다는 사술에 가깝다는 것을.
이형환위의 잔상은 이토록 또렷하지 않았다.
“놈이 정말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냥 좀 특이한 은신술을 펼친다고 생각해라!”
다행히 장년인은 강엽의 잔상은 놓칠지언정 어디서 나타날지는 대충이나마 감을 잡은 상태였다.
암검의 덕목 중엔 은신술이 있고, 그는 은신술을 상당한 경지까지 익혔다. 은신술의 고수가 어떤 움직임을 가져갈지 예측할 수 있었다.
이대로 놈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면 놈의 실체를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진대....
“하후진!”
“어, 어? 뭔데!?”
“상대 바꾼다!”
“뭣이?”
장년인이 눈을 부릅떴다. 젊고 미숙한 암검들은 저 요사한 은신술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놈, 헛수작 부리지 마라!”
그때 열 줄기의 빛살이 망막을 태울 듯이 쏘아졌다.
마음이 급한 순간에도 검초를 올올이 풀어 조풍을 막고 흘린 장년인이 이를 악물었다. 놈이 하후진과 교대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예측이 빗나갔다.
“컥.”
강엽은 하후진과 바꾸지 않았다.
장년인의 신경이 분산된 틈을 타서 다른 암검에게 달려들었다.
암검이 반격초를 날렸으나, 강엽이 돌연 한 박자 빨라지는 바람에 스치는 데 그쳤다.
동시에 깊숙이 파고든 강엽이 통렬한 한방을 꽂아서 암검의 안면을 뭉개버렸다.
“음, 생각해보니까 그냥 내가 해도 될 것 같군. 괜히 불러서 미안하다.”
“...!”
담담하게 사과하는 강엽의 모습에 장년인은 이성의 끈이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하후진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저 악마같은 새끼....”
도발하는 놈은 많이 봤지만 강엽은 독보적이었다. 저토록 빡치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무리 암검들이라 해도 동료를 잃은 상황에서 저딴 말을 들었는데 여상히 넘길 리가 없지 않은가?
“좋아. 나도 질 수 없지!”
흉터가 가로지른 얼굴이 흉흉한 살기를 발한다. 사자머리를 넘긴 하후진이 하얗게 웃었다.
왼팔에서 일어난 푸른 창염(蒼炎)이 대도를 감싸기 시작한다.
“내가 이래봬도 염왕도문(閻王刀門)의 십팔대 계승자거든. 구양세가의 정예도 아니고, 고작 암검놈들한테 끙끙대면 체면이 상한단 말씀. 이제부터 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거지같은 놈들아.”
“염왕도문...?”
장년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나는데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선명하지 않은 탓이었다.
“몰라도 상관없어. 이제부터 알아라.”
화아아악!
폐부까지 태울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길로 인해 암검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 순간, 하후진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여지껏 그를 상대한 암검들이 알아차렸을 땐 이미 하후진의 칼날이 가장 가까이 있던 암검을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진 뒤였다.
암검이 얼떨결에 그의 도를 막았지만....
“흐어업!”
쩌정!
귀화에 휩싸인 대도는 암검의 검을 부러뜨리고 그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버렸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기왓장과 대들보를 부수고, 그 아래 있는 물건들까지 박살내버렸다.
표물이나 상품을 보관하는 창고여서 망정이지, 사람 사는 집이었으면 참사가 났으리라.
“.......”
말문이 막힌 좌중을 보며 입가를 당긴 하후진이 엄지를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큭큭, 봤냐? 나도 할 땐 한단 말씀이야.”
“이봐.”
“귀영, 네가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이 사자염도 하후진도 만만치 않다! 내가 무당파 녀석한테 진 건 어디까지나 왼팔의 불꽃을 봉인했기 때문....”
“저거 날아간 건 어떻게 물어주려고?”
“....”
하후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 삼천 냥 압수.”
“...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