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6화 (35/450)

8화. 항쟁 (1)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군.’

반쯤 무아지경에 빠졌지만, 적잖은 시간이 지났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연공실의 문을 열고 나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회색빛의 하늘이었다.

처마 끝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면 밤새 비라도 내린 듯싶었다.

장경이 보낸 낭인들은 대문 밖에 있었다.

대충 피풍의와 죽립을 챙긴 다음,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대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짚으로 만든 도롱이와 방립으로 새벽비를 피한 낭인들은 멀리서 오는 점을 보고 칼을 잡았다가, 이내 강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휘유, 이제 돌아왔구만. 안 그래도 교대할 놈들 기다렸는데 집주인이 먼저 왔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있었지.”

“...?”

“아, 오해하진 마.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청수라는 무당파 도사가 찾아왔어.”

“그자가 무슨 일로?”

“글쎄. 대답을 듣진 못했는데. 당신 없다고 하니까 나중에 다시 오겠다면서 갔거든.”

“...그렇군.”

청수가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는 예상이 됐지만, 굳이 먼저 찾아가고픈 마음은 없었다.

다른 낭인이 기지개를 켰다.

“끄응, 그나저나 당신도 돌아왔는데 우리 일은 끝난 건가? 우리 이제 돌아가도 되나?”

“그래. 둘 다 고생했다. 교대하는 인원한테도 전하고. 그리고 이건 그쪽이랑 나눠 써라.”

강엽이 전낭을 건넸다. 안에 들어있는 은전 꾸러미를 본 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 주니까 고맙긴 한데... 이거 의뢰비인가?”

“수고비다. 의뢰비는 장경에게 받아.”

강엽도 밤이슬을 맞은 적이 몇 번 있기에 빗속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이들은 밤새 대문을 지켰을 테니 더욱 힘들었으리라.

“이야, 인심 후한데. 안 그래도 뜨끈한 국물에 술 한잔 말고 싶었는데.”

“교대자랑 나누는 거 잊지 말고.”

“그런 말 안 해도 삥땅치지 않는다고.”

낭인들이 떠난 뒤 강엽은 욕탕으로 직행했다.

물을 데우는 게 귀찮긴 해도 그동안 씻지 못한 몸에서 악취가 풍겼던 것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는 동안 내면을 관조했다.

‘가설이 틀린 건 아쉽긴 한데....’

강엽이 생각한 자신의 약점은 두 가지였다.

흡혈의 약점과 햇볕의 약점.

전자는 오랫동안 피를 마시지 못하면 흡혈욕이 폭주해서 미친 괴물이 될 우려가 있고, 후자는 햇볕에 노출되면 타죽을 우려가 있다.

당초엔 영약이 전자를 조금이라도 메꿔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영약의 기운이 피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그렇진 않았지.’

영약을 소화하면서 내공이 늘긴 했어도 영약의 기운과 피에 깃든 선천지기가 같진 않았다.

미처 소화하지 못하고 남은 기운이 낙맥과 세맥 곳곳에 흩어지긴 했지만, 이걸 소화한다고 흡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가 없지.’

입가에 쓴웃음이 배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애초에 크게 기대하진 않았던 만큼 실망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영약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하리라.

‘그래도 다른 약점을 극복하는 데는 도움이 됐으니까.’

고개를 들어 음울한 회색 하늘을 올려다본다.

원래부터 흐린 날엔 햇볕의 영향을 덜 받았지만, 그래도 피부가 따끔해지는 고통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혈공진기의 경지가 한 단계 올랐기 때문이다.

이대로 혈공진기의 화후가 깊어진다면 언젠가는 태양 아래에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영약을 먹는다고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지만, 혈공진기의 경지를 높일 순 있다. 그럼 햇볕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씩 강해진다.’

강엽에게 있어선 강호행 자체가 흡혈귀의 약점을 고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여정이었다.

인내심을 갖고 멀리 내다봐야 한다. 약점을 없애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실마리를 찾았음을 천운으로 여겨야 한다.

지금은 이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 * *

강엽은 청송객잔으로 갔다.

영약의 기운을 소화하면서 경맥에 남아있던 요살마녀의 선천지기도 전부 흡수했기 때문이다.

의뢰가 언제나 있는 게 아닌 만큼, 미리 피를 구해둬야 불상사를 대비할 수 있을 터.

“.......”

청송객잔의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자 떠들썩했던 장내가 일순 침묵에 잠겼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던 낭인들이 강엽을 보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접시를 닦고 있던 전강만 강엽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강 무사, 늦었지만 비무 우승 축하드리오. 안색이 밝은 걸 보니 성취를 얻으신 것 같구려.”

“감사합니다. 근데 장경은 어디 갔습니까?”

“장 분타주는 위층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소. 조금 걸릴 텐데, 기다리는 동안 이거라도 들겠소?”

전강이 내온 것은 엽차와 주전부리였는데, 마침 입이 심심했던 터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달달한 간식을 먹으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자니 장경이 문사풍의 청년과 함께 내려왔다.

“어라? 언제 왔냐?”

“방금 전에.”

“그렇구만. 좀만 기다려. 손님 배웅하고 올 테니까.”

“자, 잠깐!”

강엽을 보고 미간을 좁힌 청년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점점 놀란 표정으로 변해갔다.

“혹시 세간에서 귀영이라 불리는 분 아니십니까?”

“날 아나?”

“아! 일전에 비무대회에서 뵈었습니다. 그땐 좌석이 멀어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데 정말 귀영이셨군요.”

사내가 감격하자 강엽은 떨떠름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비무대회에서 우승했다지만 우연히 만난 걸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을 떤단 말인가?

“아아, 중경을 떠나셨다는 말을 듣고 낙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뵙다니! 살다 보니 시운이 딱 들어맞을 때가 있군요!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강엽이 장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인간 왜 이러냐? 뭐 잘못 먹였냐?’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크흠! 저기 문 총관. 강엽은 저간의 사정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면 좀....”

“그, 그렇군요. 제가 좀 두서가 없었지요?”

청년이 멋쩍어하며 공수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천방(朝天幇)의 총관인 문자경이라 합니다.”

“강엽이오.”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기에 강엽도 적당히 예의를 갖춰주었다.

“그런데 조천방이라면....”

“조천방을 아십니까?”

“이름 정도는.”

조운을 생업으로 삼은 방회였다.

중경을 둘러싼 장강과 가릉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뱃사람들이 똘똘 뭉친 방회.

“사실 본방이 곤란한 일을 겪고 있어 낭인전에 의뢰를 맡기러 왔습니다. 강 무사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천군만마와 같을 겁니다!”

“당장 결정할 순 없을 것 같은데.”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햇볕이 쨍쨍히 비추는 낮에 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칼처럼 단호한 태도에 문자경이 시무룩해졌다.

“그, 그렇군요. 하긴 강 무사님이 다른 의뢰를 하고 계시다면....”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지만, 강엽은 굳이 정정해주는 대신 장경을 돌아보았다.

장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얘기하기는 그러니 위로 올라갈까?”

* * *

청송객잔의 객방은 이층과 삼층으로 나뉜다.

꼭대기인 사층은 장경과 전강의 처소와 특별한 손님이 왔을 때를 위한 접객실로 쓰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여긴 처음 오는걸.”

“그렇구만. 특별한 의뢰를 맡기는 손님이 올 땐 낭인들도 동석하는 경우가 많아. 널 찾는 의뢰인이 많으면 앞으로 자주 오게 될지도 모르지.”

“으음, 계단 오르는 건 좀 귀찮은데....”

“.......”

진지하게 고민하는 강엽을 향해 속으로 구시렁거린 장경이 문자경에게 억지웃음을 보였다.

“아까 그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아, 네. 후우....”

계단 좀 올랐다고 숨이 거칠어진 것을 보면 문자경은 체력이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장경이 두 사람의 앞에 다과를 놓고 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본방은 거룡방(巨龍幇)이라는 다른 조운방회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쪽은 처음 들어보는군.”

“의창(宜昌)에 뿌리를 둔 방파입니다. 몇 년 전에 개파한 신흥방파인데, 근자에 무섭게 세를 키우더니 다른 조운방회들을 공격적으로 병탄하고 있습니다.”

“흡수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무슨 명분으로?”

“명분이 있을 리가요. 하는 짓이 흑도와 진배없는 무뢰배들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별 같잖은 트집을 잡아서 공격하거나, 방주의 가족을 납치해서 협박하는 식이었다.

강엽이 혀를 내둘렀다.

“더러운 놈들이군.”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조천방은 어떤 식으로 얽혔소?”

“처음엔 사소한 시비였습니다.”

중경에서 의창까지는 육로로 이천 리가 훌쩍 넘지만 뱃길로는 금방이다 보니 겹치는 구역이 있었다.

“뱃사람들이 워낙 거칠다 보니 술 마시고 주먹다툼하는 일이야 흔합니다. 그땐 나중에 술 마시면서 화해하거나, 정 화해를 못하면 당사자들끼리 싸워서 해결을 보지요. 한데 그날은 일이 커졌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이오?”

“거룡방이 본방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배를 불태우고 안에 있던 화물을 훔쳐갔다고 한 겁니다.”

“...진짜로?”

그 정도면 전쟁할 만하지 않나?

강엽은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문자경은 한숨을 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보니 철저히 설계된 함정이었습니다.”

거룡방의 배가 불탄 것도 맞고, 화물을 도둑맞았던 것도 맞았다. 심지어 도둑맞은 화물은 조천방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번갯불에 콩 볶는 것처럼 빨랐죠. 거룡방은 단번에 화물을 찾아냈고, 본방을 도둑으로 몰았습니다.”

“창고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할 텐데.”

“열쇠를 관리하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거룡방에게 해코지를 당했든, 돈을 먹고 야반도주를 했든 단단히 덜미를 잡힌 것이다.

“해명하려고 했지만 듣질 않더군요. 그날부터 본방의 거점들을 무차별로 공격했습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데....”

소문을 퍼뜨리면서 협상을 통해 보상을 받기만 해도 조천방의 명예에 먹칠을 할 수 있을 텐데, 구태여 무리하게 공격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자경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거룡방의 뒤에 구양세가(九陽世家)가 있다는 걸. 놈들은 전쟁을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당문이나 남궁세가처럼 팔가에 들진 못해도, 명색이 세가를 자처하는 호족 대가문이었다.

조천방이 그간 쌓은 부로 방회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길렀으나, 구양세가 같은 무가와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구양세가가 전면에 나섰소?”

“그건 아닙니다.”

장경이 말을 보탰다.

“구양세가는 정파를 자처하는 곳이야. 하는 짓거리는 정파답지 않지만, 어쨌든 뒤에서 수작질을 부렸다는 게 알려지면 좋을 건 없지. 정치적으로도 부담되고.”

“한데 구양세가가 뒷배라는 건 어떻게 알았소?”

다시 문자경에 하는 질문이었다.

“구양세가 자체는 물론 그들의 영향을 받는 상단들과 표국들이 거룡방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원래 다른 조운방회와 거래하던 곳들도 일방적으로 계약을 끊고 거룡방에 일감을 몰아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황은 있되 물적 증거는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끈끈한 밀월관계를 견지한다면 아무 관계도 아닌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정리하지. 구양세가가 거룡방을 앞세워서 각지의 조운방회를 병탄하는 건 장강 중류의 물류를 독점해서 세를 키우기 위함이다. 그리고 조천방은 낭인전의 낭인들을 고용해서 거룡방을 막으려고 한다. 맞소?”

“바로 보셨습니다.”

“거룡방뿐만 아니라 구양세가까지 신경 쓴다면 나 하나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지. 필시 다른 낭인들도 고용했을 것이오.”

“예. 다른 낭인전 분타들에도 의뢰를 맡겼습니다.”

“그것뿐이오?”

“...예?”

문자경의 눈이 커졌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입니까?”

“태화문.”

“...!”

“그쪽에 도와달라고 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소? 물론 공짜로 도와주진 않겠지만, 태화문이 나선다면 거룡방이나 구양세가도 섣불리 못 덤빌 텐데.”

“그렇긴 하지만....”

구양세가가 정파의 탈을 쓴 무뢰배라면, 태화문은 대놓고 흑도였다.

늑대를 피하자고 범을 끌어들이는 게 과연 옳은가?

강엽이 장경을 돌아봤다.

“조영옥이 태화문에 돌아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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