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5화 (34/450)

7화. 영약 (6)

강엽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영옥은 강엽의 뜻을 존중했다. 연달아 비무를 치렀으니 쉬고 싶은 게 당연하다면서.

장경을 은밀히 찾은 강엽이 말했다.

“당분간 일을 못할 것 같다.”

“알아.”

“...?”

“무당파 제자가 상대였잖냐. 준결승 상대도 만만치 않았고. 몸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근데 내상 입었으면 영약은 먹지 마라. 위험하다더라.”

“....”

“...아니여?”

“아니, 비슷하긴 한데....”

강엽이 쓴웃음을 흘렸다.

일을 못한다고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장경의 말마따나 영약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걱정 마라. 내상은 입지 않았어.”

“음, 그럼 다행이고.”

“근데 내가 없는 동안 집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 엉뚱한 놈들이 들락거리는 건 막아야지.”

“흠... 알았다. 일 없는 놈들한테 물어보지. 돈은 좀 들어도 좀도둑은 막아줄 거다.”

“기간은 닷새... 아니, 이레로.”

삼백 냥짜리 전표를 받은 장경이 조금 굳은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그냥 안가에 숨어있는 게 낫지 않겠냐? 중경 근처에 몇 군데 마련해뒀는데.”

강호인이 욕심내는 게 세 가지 있다. 영약과 신병이기, 강자를 잡으면 얻을 수 있는 명성. 공교롭게도 강엽은 그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아니다. 조영옥에게 잠깐 지켜달라고 하자. 내상을 입었다고 핑계대고 며칠간 존나 버티는 거야. 그리고 영약 먹고 깔끔하게 떠나는 거지.”

“싸움을 피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겠지.”

“...너 설마?”

“생각한 게 맞을 거다.”

“단단히 미쳤구만.”

장경이 뜨억하는 것도 당연했다.

방금 비무대회를 치른 놈이 또 싸우겠다니?

“비무대회하고 실전은 다른 법이니까.”

슬슬 피를 구해야 하는데 보름달이 뜰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욕심에 눈먼 놈들이 찾아온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그놈들의 피를 얻을 수 있으니까.

강엽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건지 말해주었다.

“걱정 마라. 못 이길 것 같으면 도망칠 거다.”

“에라이, 내가 어쩌다 이런 미친놈이랑 얽혀서... 야, 정 아니다 싶으면 낭인전으로 튀어.”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장경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몇몇 안가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예상대로 운화장을 나가자 미행이 붙었다.

강엽은 뒤를 따라오는 기척을 감지했지만, 따라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갈 길을 갔다.

‘얼마든지 따라와봐라.’

욕심에 눈먼 놈들에게 남의 물건을 노리면 골통이 깨질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줄 참이었다.

집에 들러 피풍의와 죽립을 걸치고, 작은 바랑을 멘 강엽이 다시 집을 나섰다.

영락없이 멀리 떠나는 차림새였다.

* * *

“대형, 놈이 다시 나왔습니다.”

아우의 말에 귀주오살(貴州五殺)의 대형인 일살이 눈을 얇게 뜨면서 중얼거렸다.

“영약을 얻자마자 뜰 채비를 하다니....”

“왜 저러는 걸까요?”

“구엽월령초는 달의 음기가 가장 강해지는 보름에 음지에서 복용해야 한다. 아무래도 생각해둔 장소가 있나 본데... 피곤할 텐데 바로 떠나다니. 이러면 집에 있을 때 습격하는 계획은 포기해야겠어.”

원래는 강엽이 운기조식을 하거나 자고 있을 때 습격해서 영약을 빼앗을 작정이었다.

문제는 그들만 노리는 게 아니라는 거다. 파악한 바로는 여러 세력이 영약을 노리고 있었다.

“쯧, 다른 놈들이 먼저 귀영을 쳐서 놈이 멀쩡한지 확인해줬으면 좋겠는데....”

경쟁자가 영약을 선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먼저 나서서 강엽의 전력을 깎아주기를 바라는 역설.

어처구니없게도, 여러 세력에게 노려지면서도 모두가 모두의 적이기 때문에 강엽은 안전했다.

그렇게 감시받는 중에 강엽이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하자 은밀히 미행하던 이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망할, 눈치 깠어! 놈이 도망친다!”

“쫓아가!”

그러나 추적자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암신을 펼친 강엽을 잡을 순 없었다.

강엽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 밤거리에 숨어 추적자들을 기다렸다가 후미에서 달려오는 놈을 낚아챘다.

“끄아악!”

“뭐야!?”

앞선 자들이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끌려간 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만 아스라이 멀어질 뿐.

모골이 송연해진 추적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킬 때, 하늘에서 무언가 철푸덕 곤두박질쳤다.

사지가 꺾여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핏덩이.

마치 거대한 바윗덩어리로 짓이긴 듯한 처참한 몰골에 살인에 익숙한 추적자들도 기가 질렸다.

“이런 미친... 대체 뭘로 죽인 거야?”

“으아악!”

이번엔 앞이었다.

방금까지 선두를 차지했던 추적자가 뒷목을 잡힌 채 안개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사, 살려줘!”

다른 이들이 사태를 깨닫기도 전에 안개 속에 삼켜졌다.

“아악!”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린다.

방금까지 멀쩡히 숨 쉬던 자가 혀를 빼문 시체가 되어 나타나자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

“모, 모두 뭉쳐!”

사위가 어두컴컴한데 안개까지 끼니 답이 없었다.

등을 맞댄 추적자들은 긴장한 나머지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 새끼가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나와, 이 새끼야! 죽여버릴 테다!”

“그래.”

“그래, 그렇게 나와야...!?”

욕설을 하던 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기들 속에 낯선 자가 섞여 있다는 걸 깨닫기 전에 장렬한 일권을 처맞고 나가떨어졌기 때문.

“소방주님! 이 자식이 감히!”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추적자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서 칼을 휘둘렀지만, 검은 비늘이 돋아난 장갑이 칼날을 잡고 수수깡마냥 뚝 분질렀다.

“엇!”

“쓸 만한데.”

강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혈공진기를 쓰지 않았는데도 용린투가 손을 완벽하게 보호해준 것이다.

“자, 그럼....”

강엽의 눈에 싸늘한 한광이 맺혔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비명이 메아리쳤다.

* * *

잠시 후 귀주오살이 그곳에 나타났다.

“이게 한 사람의 짓이라니....”

공포에 질려 죽은 시체들의 얼굴은 흑도 사파의 고수들인 그들조차 오싹해질 만큼 끔찍했다.

“대형, 이놈들 숙정방(肅靜幇)입니다.”

“노주의 흑도 방파 말이냐?”

“예. 연회장엔 없었는데... 아마 연회장의 누군가가 이놈들의 끄나풀이었겠지요.”

“대형, 생각 났습니다. 숙정방의 소방주가 예선에서 떨어졌습니다. 저놈이 소방주입니다.”

욕설을 지껄였다가 일권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청년이었다. 마치 육중한 둔기에 후려맞은 것마냥 가슴이 으스러져서 죽어 있었다.

“단금철권(斷金鐵拳)도 있군요. 숙정방에선 방주 다음가는 고수인데 허망하게 뒈졌습니다.”

“숙정방주가 알면 노하겠군.”

“...어쩌시겠습니까?”

숙정방의 칼잡이들이 몰살당했다.

물론 그 사실 자체는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그들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강엽이 떠났는데도 그 살의가 현장에 남아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후... 따라오면 죽을 거라는 경고인가.”

아무리 영약이 탐나도 목숨과 맞바꿀 수는 없다. 게다가 강엽의 행방도 묘연해진 상황.

일살이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철수한다.”

귀주오살은 반대하지 않았다.

* * *

암신을 펼친 강엽은 다시 집에 돌아왔다.

멀리 나갈 것처럼 채비를 갖춘 것은 속임수였다. 아예 중경을 떠나는 척하면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장경을 통해 장원을 지키는 낭인들도 구했으니 행여나 누가 집에 들어오는 일도 없을 터.

‘여기라면 들킬 일은 없겠지.’

본채의 지하엔 작은 연공실이 있다.

평소엔 별채를 통째로 개수한 연공실을 쓰기 때문에 지하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햇볕은 둘째치고 통풍이 되지 않아서 답답하니까.

하지만 여기라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영약을 취할 수 있을 터.

달이 둥그스럼해질 때까지는 며칠이 더 남아 있었지만 버티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숙정방을 몰살시키면서 스스로를 단금철권이라고 밝힌 고수의 피를 구했으니까.

요살마녀의 피에 비할 수는 없어도 흡혈욕을 누르는 데는 도움이 되는 수준이었다.

오랜만에 피맛을 보니 알싸한 고양감이 혀끝을 감싸고 돌았다.

‘어쩌면 이 쾌감이야말로 속임수일지도 모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각은 변하지 않았으니 피맛도 역겹게 느껴져야 할 텐데도 이런 쾌감이 드는 것은, 흡혈귀의 본능이 자아내는 속임수가 아닐까?

‘지금은 살기 위해 흡혈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흡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하리라.

그렇게 며칠을 보낸 뒤에 강엽은 때가 됐음을 직감하고 가볍게 숨을 골랐다.

“후우.”

목함을 열고 영약을 꺼낸다.

구엽월령초라는 이름 그대로 아홉 닢의 잎사귀가 달렸다는 것을 빼면 들꽃과 별 차이가 없는 외견.

그러나 달의 음기가 가장 왕성해지는 보름이라 그런지 하얀 꽃잎이 은은한 서광을 내뿜었다.

조영옥이 권했던 것처럼 뿌리째 씹어먹어서, 즙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두 목구멍으로 넘겼다.

잔뿌리 하나 남겨두지 않고 삼킨 순간, 뱃속에 녹아든 영약의 기운이 차갑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느낌이 그랬다. 차가운 기운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느낌.

영약을 먹어본 경험은 처음인 만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혈공진기와 영약의 음기가 섞일 수도 있고, 반발할 수도 있었다. 후자라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기혈이 뒤틀리거나 죽을 위험이 컸다.

최악의 경우엔 혈공진기가 골수를 잠식해서 피아 구분도 없이 미쳐 날뛸 수도 있고.

‘만약 그럴 조짐이 보인다면....’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

하나 정신줄 놓은 괴물이 될 바엔 자결하는 게 낫다.

아무리 살기 위해 개고생을 했다지만, 사람답게 살아야 사는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혹시 몰라 피를 마시고 나서 운기조식을 했다.

결이 다르긴 하지만 혈공진기도 음유한 내공이니 운이 좋다면 구엽월령초의 음기와 잘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혈공진기는 상상 이상으로 배타적이었다.

정체불명의 기운이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짐승처럼 사납게 굴며 쫓아내려고 했다.

자신은 오직 피만 원한다는 듯이 선천지기만 빨아들였다.

‘이런....’

등줄기에 식은땀이 난다.

서둘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운기조식만 하는 걸로는 두 기운을 하나로 엮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태극이었다.

음과 양으로 나뉘었으면서도 끊임없이 상생하고 화합을 추구하는 태극의 심상.

청수가 썼던 무당 면장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돌고 도는 태극의 조화. 때론 물처럼, 때론 구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며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감싼다.

그 심상을 두 기운에 입혔더니 혈공진기와 음기가 주춤거렸다.

‘오냐. 누가 이기나 해보자.’

강엽은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자신을 잊고, 흡혈귀를 잊고,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을 잊었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로 심상을 입혔다. 마음이 일어나 진심으로 바라니 뜻이 일었다. 천지만물을 포용하는 태극의 심상이 두 기운을 하나로 엮기 시작했다.

경맥에 남아있는 선천지기가 두 기운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후우웅...!

강엽은 내면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섬뜩한 핏빛의 기운과 달빛을 닮은 은은한 금광이 몸 바깥까지 흘러나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영원히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두 기운이 마침내 섞이기 시작했다.

혈공진기가 결국 구엽월령초의 음기를 수용한 것이다.

‘아!’

강엽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혈공진기가 한 단계 위로 도약했다는 것을. 고수의 피를 마셨을 때처럼 양적으로만 성장한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장한 것이다.

혈공진기가 더욱 촘촘해지고 끈끈해졌다. 진기 수발 역시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강엽은 그제야 벽을 인식했다.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벽. 한데 기껏 발견한 벽은 이미 산산조각나서 잔해만 남은 뒤였다.

“으음.......”

강엽이 침묵했다.

벽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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