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영약 (5)
‘뭐, 그럴 수도 있지.’
비록 무당이 원한 바는 아니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 길었군.”
“동감입니다.”
미소를 지은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다시 자세를 잡는다.
“유운검(流雲劍)이라고 합니다.”
한 손에 쥔 검을 밑으로 내린 채 어깨에 힘을 빼는, 지극히 자연체에 가까운 기수식.
하지만 그 기수식에서 자신감을 엿본 강엽은 방심하지 않았다.
짧게나마 겪어본 무당의 무공은, 아니 청수의 무공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데 이골이 났다.
선공은 강엽의 몫이었다.
카앙!
철검과 손톱이 부딪치며 불똥이 튄다.
오감은 강엽의 움직임을 좇지 못했지만, 반 평생을 연마하며 몸에 익은 유운검이 선공을 막아냈다.
강엽과 힘으로 싸우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청수는 검격을 부딪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공세를 흘리면서 상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검격을 날린다. 공격과 방어가 한몸이 된 공방일체의 검법.
강엽이 검로를 끊기 위해 눈을 부릅떴지만,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유운검은 만만한 검법이 아니었다.
다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파고들려고 하면 어느 샌가 빠져나와 다시 검로를 이어간다.
그렇게 오십여 합이 지나자 강엽의 옷이 찢겨나가며 크고 작은 상처가 핏방울을 뿌렸다.
“음, 단단하군요.”
우세를 점했음에도 청수의 안색은 굳어졌다.
혈공진기를 두른 강엽의 몸은 강인해서 피륙을 베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분명 강하지만... 한계가 뚜렷한 강함이다.’
무명객이 그랬듯 그 역시 내심 강엽이 자신이나 하후진보다는 아래라고 평가했다.
강엽이 암신을 썼을 때를 빼면 수싸움에서는 항상 자신이 우위를 점했으니까.
언젠가는 강엽도 힘이 떨어지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질 테니 그 틈을 노리면....
퍼엉!
“엇?”
청수의 눈빛에 놀람이 가득 찼다.
유운검의 검로가 무형의 공력 파동을 얻어맞고 흐트러졌다.
그 틈으로 파고든 강엽의 일권을 한 끗 차로 피했지만, 권압에 밀려 물러나야 했다.
정신을 수습한 청수가 이를 악물었다. 검로가 끊기는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사문에서, 또 강호에서 종종 겪어봤던 일.
하지만 또 다시 무형의 공력 파동이 검로를 끊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
한 번은 우연이어도 두 번은 우연이 아니다.
세 번이면 필연이다.
“후우.”
한숨을 쉰 강엽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제 좀 알겠군. 알려줘서 고맙다.”
청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지 못했다.
터엉!
불현듯 강엽의 온몸에서 크고 작은 기파가 수포처럼 터지면서 검로를 방해하는 게 아닌가?
‘전신 발경! 팔다리뿐만 아니라 다른 부위로도 경파를 일으켰어!’
옆구리와 가슴 등 타격과 상관없는 부위까지 경파를 일으킨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곤혹스러웠다.
이제 공방일체는 청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강엽 역시 온몸으로 구현했으니까.
잠시 일방적으로 흘렀던 싸움이 팽팽해지자 관중석에 앉은 내빈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근엄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잊었는지 육성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는 두 사람의 귓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악착같이 서로의 투로를 끊으면서 헛점을 노린다.
‘맙소사.’
문득 청수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겹치는 초식이 하나도 없다!’
얼핏 보면 여러 무공을 잡다하게 섞어 쓰는 것처럼 두서가 없다.
어떤 것은 빠르고, 어떤 것은 느리다.
태산처럼 묵직한가 하면 깃털처럼 가볍다.
우직하게 직선으로 찔러오는가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고 다채로운 초식을 구사한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지만, 강엽은 그 모든 초식을 투로 안에 녹여내서 잘 써먹고 있었다.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내공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있기에 가능한 묘기.
게다가 가면 갈수록 투로가 간결해지면서 수발이 빨라졌다.
‘점점 강해지고 있다.’
시간이 제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청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이 동한 순간 표홀하게 뛰어올라 강엽의 배후를 점한다.
고절한 신법을 알아본 누군가가 탄성처럼 외쳤다.
“무당 제운종(梯雲縱)!”
구름 사다리를 넘듯 솟구치는 신법을 말함이다.
청수는 뒤를 점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착지도 전에 강엽의 등을 향해 면장을 쏟아냈다.
하나 장풍은 강엽을 그냥 통과할 뿐.
뒤늦게 자신이 공격한 것이 잔상임을 깨달은 청수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위험하다!’
착지하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 그러나 그 한 수가 절묘한 역습이 되어 강엽을 꿰뚫었다.
...라고 생각할 뻔했다.
‘또 다시 잔상! 이형환위(移形換位)인가!?’
잔상만 남을 정도로 빠르다.
강엽은 암신의 환술을 쓴 거지만 진실을 모르면 이형환위로 착각할 만했다.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면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이다. 청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실수였다. 강엽은 그가 찔렀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다시 나타나 한순간에 간격을 파고들었다.
검으로 대응하기엔 늦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청수가 면장을 써서 강엽을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건 이미 많이 봤다.”
그러나 먼저 뛰어든 강엽이 어깨로 면장의 타점을 걷어내면서 반대쪽 주먹을 힘껏 당겼다.
한계까지 응축한 경파가 한꺼번에 풀려난다.
터어어어엉!
“......!”
청수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허공을 훨훨 날고 있었다.
‘서, 설마....’
자신이 당한 수법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주먹에 면장의 묘리를 담았다고?’
완전히 같진 않다. 그러나 꿰뚫어야 할 힘이 밀어내는 힘으로 바뀌면서 그를 허공으로 내던졌다.
“덕분에 좋은 걸 배웠어.”
청수의 예감은 맞았다.
처음 면장을 맞았을 때 강엽은 그 안에 담긴 심오한 무리를 느끼고, 그 흐름을 잘 기억해뒀다가 혈공진기로 흉내 내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지속력이지.’
면장이 상승의 무공인 이유는 독특한 내공 운용법 때문이다. 면면부절 회전하며 이어지는 장력.
때문에 한번 맞은 걸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피해를 입힌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묘리를 섞으면 오장육부를 부수어버렸을 터.
하지만 청수는 물론 강엽도 살의를 담지 않았기에 상대를 날려버리는 걸로 끝났다.
“큭!”
정신적 충격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청수는 가까스로 낙법을 취해서 부상을 입는 꼴만은 면했다.
“어, 어떻게 면장을...?”
강엽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비록 어설프게 흉내낸 거라고 해도 자신의 무공을 따라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문제는 해줄 말이 마땅치 않다는 건데....
“비슷한 무공을 익혔거든.”
“....”
“믿지 못해도 진짜다. 설마 태극을 담은 무공이 무당파에만 있다고 생각하나?”
“으음....”
하긴 청수의 입장에서도 강엽이 면장을 한두 번 보고 훔쳤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비슷한 무공을 익혔다는 게 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어서 해볼까요?”
“아니.”
“예?”
“묻기 전에 주변부터 둘러봐라.”
청수는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지불식간에 당해서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장외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실책을 깨달았다. 정신이 없다 보니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아뿔싸!”
“늦었어.”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 암신을 쓴 강엽은 이미 코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면장의 묘리를 섞은 일권이 다시 한번 청수를 쳐서 멀리 날려버렸다.
“...!”
완벽하게 의표를 찔렸다.
날아간 청수가 비명을 질렀다.
‘역시 면장 맞잖아!’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 * *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내빈들이 보는 앞에서 영약이 담긴 목함을 전한 조영옥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손님들의 반응이 좋아요. 진귀한 볼거리를 구경했으니 그럴 수밖에요.”
투사들의 싸움과는 격이 다르다.
한쪽은 소림과 더불어 구파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무당파의 본산제자였고, 다른 쪽은 요살마녀를 죽이며 명성을 얻은 신진고수였다.
신분이 높고 돈이 많아도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니 열광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구엽월령초는 달이 찼을 때 응달진 곳에서 복용하세요. 뿌리째 날것으로 먹어야 효과가 있어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왜 제가 복용하지 않냐고요?”
“예.”
“저는 이미 복용했거든요. 세 뿌리나. 모든 영약이 다 그렇지만 구엽월령초도 계속 복용하면 효과가 없어요.”
물론 부하들에게 나눠줘도 되지만, 조영옥은 비무대회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구엽월령초를 쓴 것이다.
‘측근들은 알아서 챙겨줬겠지.’
구엽월령초를 보는 태화문의 무인들은 부러움을 드러낼지언정 질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결기 어린 표정을 짓는 것이 공을 세우면 저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조영옥의 됨됨이 일부를 엿본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그녀가 은근하게 물었다.
“저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따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요.”
영약도 받았는데 시간을 내는 게 뭐 대수겠나.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조영옥이 건넨 선물들을 받고 깜짝 놀랐다.
“이건 우승과 상관없이 드리는 선물입니다.”
태화문의 무인들이 가져온 선물은 세 개였다.
보드라운 우단(羽緞, 털비단) 위에 놓인 물건을 하나씩 주며 조영옥이 설명을 이어갔다.
“첫 번째는 피독주예요.”
조영빈과 그의 수하들이 썼던 것과 같은 피독주였다. 암독연화공의 독기도 물리쳤던 최상급의 피독주.
“두 번째는 수투(手套)지요. 용린투(龍鱗套)라고 불리는 귀물이랍니다.”
검은 미늘로 장식된 장갑이었다. 손에 달라붙는 맛이 일품이다. 시험 삼아 손톱으로 긁어봤는데 흠집도 나지 않았다.
‘손톱을 꺼내는 것도 문제없군.’
애초에 조법을 쓰는 무인을 위해 제작된 무기인지 손톱과 이어지는 곳에 길쭉한 홈이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손톱을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선물이야말로 압권이었다.
“무공 비급이에요.”
한천최심장(寒天最深掌)이라고 적힌 비급을 본 순간, 강엽조차 과하다는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무공 비급은 문외불출인데 이런 걸 그냥 줘도 되는 겁니까?”
“세 가지 이유로 괜찮아요. 첫 번째는 한천최심장이 태화문의 무공이 아니라는 것.”
태화문은 여러 흑도 방파를 병탄하고 외부의 고수들을 영입하면서 수많은 무공 비급을 수집했다. 한천최심장 역시 그렇게 얻은 무공 중 하나였다.
“두 번째는 이게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거죠.”
원본은 태화문의 무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세 번째 이유는 이게 강 무사에 대한 제 나름의 투자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서예요.”
강엽이 결승전에서 성장하는 모습은 조영옥에게도 다시 없을 즐거움을 주었다. 용린투와 한천최심장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거라 확신했다.
“태화문에 들어오라는 겁니까?”
“아뇨.”
조영옥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강 무사가 태화문에 들어오면 기쁘겠지만, 안 들어와도 괜찮아요. 다만 강 무사가 아무쪼록 제 호의를 기억했으면 좋겠군요.”
강엽이 조영옥에게 마음의 빚을 느낀다면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의뢰는 받지 않을 터.
물론 그녀의 정적들이 부귀영화로 회유한다면 안면 몰수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강엽이 그런 속물이었다면 차라리 조영옥의 휘하에 들어왔을 것이다.
조영옥이 만개한 장미처럼 고혹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전 모두가 아군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친구는 될 수 있겠죠. 언젠가는 강 무사와도 친구가 되었으면 해요.”
그것은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