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3화 (32/450)

7화. 영약 (4)

혼란이 벌어졌다.

관중석에 뛰어든 무명객은 강엽과 싸울 땐 보여주지 않은 수법까지 썼다.

입에서 검은 연기를 뿜은 것이다.

내빈들이 비명을 지르고, 호위들이 내빈들을 에워싸며 빠져나가고, 운화장의 보표들이 쫓아오고....

하나 무명객은 그 어떤 것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이 지경에도 오연한 시선을 보내는 태화문의 이공녀를 향해 몸을 날릴 뿐.

그리고 그 결과....

“크억!”

무명객은 죽어가고 있었다.

전신을 도검에 난자당한 채로.

“어리석은 짓이군요. 다친 것 같은데 무리하다니.”

이미 강엽과 싸우면서 적잖은 부상을 입은 주제에 무리하게 관중석을 덮쳤다.

무공의 공능과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고통마저 억눌렀지만, 그런 것만으로 극복하기엔 태화문의 무인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다치지 않았어도 결과는 같았겠지만.”

조영옥은 나서지 않았다.

수족인 조영빈과 휘하의 무사들만으로도 무명객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암독연화공(暗毒煙火功)을...!”

무명객이 아연해했다.

검은 연기의 정체는 독이었다.

멀쩡한 치아를 뽑고 그 안에 박아둔 독단을 내공과 반응시키면 암독연화공이 된다.

내공이 출중한 무인이라도 들이마시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태화문의 무인들은 독을 뒤집어쓰고도 멀쩡했다.

곧 그는 이유를 깨닫고 이를 갈았다.

“...그렇군. 전원이 피독주(避毒珠)를 갖고 있었나!”

조영빈을 비롯한 무인들은 독을 중화시켜주는 피독주를 입에 물고 있었다.

후계자 후보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조영옥은 독살을 염려해서 측근들 전원에게 수만 냥을 호가하는 최상급의 피독주를 주었는데, 이런 때 도움이 된 것이다.

무명객은 굴욕감에 떨었지만, 붙잡힌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길, 복수할 절호의 기회였거늘...!”

원래 계획은 이렇게까지 무모하지 않았다.

우승해서 조영옥이 구엽월령초를 전할 때, 면전에서 암독연화공을 쓰는 것뿐.

하지만 비무에서 패한 것도 모자라서 맨얼굴을 들켰으니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복수라....”

조영옥이 그 말을 되뇌이자 무명객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뇌극방(雷極幇)을 기억하느냐!? 네놈의 아비가 삼십 년 전에 짓밟은 방파 말이다!”

“아하, 뇌극방 출신이었나요?”

“안다면 내가 왜 복수하려는지도....”

“본문이 형제의 난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뇌극방이 본문의 영역을 넘봤죠. 제 분수도 모르고.”

“...!”

“당신들은 마땅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에요.”

“닥쳐!”

삼십 년 전, 태화문의 전대 문주가 후계를 못 정하고 급사하면서 형제들끼리 골육상쟁을 벌였다.

외부의 세력이 태화문의 영역을 먹을 절호의 기회였다. 형제들끼리 내홍을 벌였으니 누가 문주가 되든 전력은 예전만 못할 터.

하지만 현 문주인 번천광야 조광해가 사흘 만에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문주에 올랐다.

이후 다른 형제를 지지했던 세력까지 굴복시킨 다음, 그대로 뇌극방을 쳤다.

내부의 불만을 바깥으로 돌려 태화문을 단결시키는 한편 간악한 적을 일망타진한 것이다.

“뇌극방주의 혈족 몇 명이 도망쳤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설마 사대마교의 앞잡이가 될 줄은 몰랐군요.”

그 말에 태화문의 무인들이 석상처럼 뻣뻣해졌다.

무명객도 당황했다.

“그, 그걸 어떻게...?”

“뭘 새삼스럽게. 당신 입으로 암독연화공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나요? 암독연화공이 일월신교(日月神敎)의 무공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무명객의 입장에선 할 말이 궁한 실수였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죠. 끌고 가.”

“큭, 놔라! 조영옥, 내 반드시 네년을...!”

거칠게 반항했던 무명객은 태화문의 무인에게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

“영빈, 현장 수습해라. 내빈들 안전 확인하고 진정시켜. 운화장주님께서도 수고해주셔야겠어요.”

이 자리엔 운화장주와 그의 측근들도 있었다.

사대마교의 출현에 심장이 벌렁거렸던 그들은 조영옥의 시선을 받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 조영옥은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내빈들의 시선들이 아니다. 비무대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강엽의 시선.

“보답해야겠는걸.”

영민한 그녀는 무명객의 속셈을 훤히 알아차렸다.

만약 그가 우승했다면 영약을 주는 자리에서 독연을 뿜었을 것이다.

피독주가 있으니 중독되진 않겠지만 하마터면 뭇사람들의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뻔했다.

‘은을 입었으니 갚지 않으면 체면이 상하겠지.’

그녀는 원한도 은혜도 확실하게 갚는 성격이었다.

* * *

조영옥은 무명객의 일을 욕심에 눈먼 중견 고수가 저지른 소행으로 포장했다.

사람들의 입에서 사대마교가 오르내리는 순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다행히 사람이 죽지 않았기에 잘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빈들을 보호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끝에 비무가 다시 시작되었다.

“청수 승리!”

“으아아아아!”

하후진이 엎드린 채 땅을 내리쳤다.

고작 반초 차이로 진 것이다.

“후우,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청수 역시 땀에 절어 있었다.

입고 있는 갈의는 넝마주이가 됐고, 살갗이 베여 피를 흘렸다. 대부분 생채기였지만 조금만 깊었다면 승패가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 강하군요, 하후 소협.”

“젠장, 띄어줄 필요 없어. 네 녀석에게 못 미친다는 건 아니까. 하지만 다음엔 내가 이길 거다.”

다음에 둘이 언제 겨룰지는 모른다. 그러나 청수는 하후진을 비웃지 않았다.

“저도 하후 소협과 다시 겨룰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결승전에 오른 두 사람이 지쳤다고 판단한 운화장은 반시진의 휴식을 주었다.

짧게나마 운기조식을 취할 수 있도록 태화문의 무인들이 호법을 서주고, 내상을 돌보는 약과 최고급의 금창약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준비됐소, 강 무사?”

“그래.”

“청 무사께서는 어떻소?”

“저도 준비됐습니다.”

그렇게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 * *

강엽은 내상약을 먹지 않았다.

재생력을 조절하는 건 단지 상처를 치유할지 여부만 결정하는 게 아니다.

치료할 부분을 자의적으로 택할 수 있기에, 겉으로 보이는 생채기만 놔두고 속은 모두 치유했다.

‘그래도 내상약은 챙겨야지.’

복용할 일은 없어도 언제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비무대로 나오자 그곳엔 깨끗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청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쉴 줄 알았는데.”

“괜찮습니다. 태화문이 배려해줘서 많이 나아졌습니다.”

실제로 나쁜 안색은 아니었다.

준결승전에서 사자염도 하후진을 만나는 바람에 고생하긴 했지만, 청수 역시 그전까진 내공과 체력을 최소한도로 쓰며 승리를 거둔 몸.

도산검림 강호에선 한 명의 강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약자들이 차륜전을 벌인다.

그에 비하면 일대일로 싸우고 중간에 쉴 수도 있는 비무대회는 널널한 편이다.

물론 네 번을 내리 싸운 피로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강엽 역시 무명객을 상대하느라 심력을 쏟았기에 만전은 아닌 바.

곧이어 결승전까지 올라온 두 사람을 향한 박수갈채가 울리고, 심판이 깃발을 들어올린다.

‘산에서 왔다고 했었지.’

무명객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진 알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강엽 역시 짐작가는 게 있긴 했다.

강엽이 본격적으로 혈공진기를 끌어올리자 청수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섬뜩하고 끈적거리는 기파였다.

대개 부초처럼 뿌리를 얕은 낭인들은 내공이 잡스럽다. 하지만 강엽은 그것도 아니었다.

“도우(道友), 아니, 공자께선....”

무언가 물으려다 뭔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검을 뽑는다.

대장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철검이지만, 그걸 쥔 사람은 용봉처럼 비범하다.

본능이 경고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강호로 출도한 이래 가장 강력한 적수라고.

“조심하십시오.”

강한 울림을 지닌 한마디.

청수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러운 기파가 몸을 감싼다.

‘바람? 아니, 이건....’

강엽은 시험 삼아 손톱을 휘둘렀다.

쐐액!

다섯 줄기의 섬광이 허공을 쪼갠다.

하지만 청수가 원을 그리듯이 손목을 휘젓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진다.

강엽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흘린 건가?”

무명객이 그랬듯 비슷한 힘으로 상쇄한 게 아니라 더 작은 힘으로 흘려버리는 기교.

이제껏 싸운 무인들 중에선 아무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좋아.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암신을 펼쳐 어둠 속에 녹아들자 청수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그리고 굉음이 일었다.

“크...!”

뒤로 쭉 밀려난 청수가 인상을 썼다.

강엽은 놀랐다.

‘반응했다고?’

이전처럼 흘려버리지는 못했어도 손바닥을 들어 막았다. 심지어 흘려버리려고 시도하기까지.

일권에 담긴 발경력을 감당하지 못해 반격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막은 게 놀라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용력이...!”

경악한 청수의 눈이 부릅뜨였다.

어느새 손을 날카롭게 모은 강엽의 관수(貫手)가 목을 노리고 전면으로 짓쳐들었던 것.

무턱대고 막으면 뚫린다.

등줄기가 오싹해진 청수는 흐느적거리는 듯한 신법으로 원을 그려 관수를 흘려보냈다.

뒤이어 부드러운 흐름으로 강엽의 몸을 밀어냈다.

태극의 묘리로 원을 그리듯 끌어당기면서, 그와 동시에 부드럽게 밀어내는 고절한 장법.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가뿐하게 착지한 강엽은 어떤 문파에 대한 특징을 떠올렸다.

일찍이 천하에 이름을 널리 퍼뜨린 도가의 성지이자, 태극의 사상을 무학에 담아낸 백도 문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물어봤다.

“무당파냐?”

“으음.”

청수가 뺨을 긁적였다.

어떻게 알았지, 하고 놀랐다기보다는 들킨 것 자체를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놀라진 않는군.’

관중석의 내빈들은 침착했다.

무당파는 워낙 유명하니 호종하는 무사들이 알아봤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영옥 역시 무명객 때와는 달리 화내지 않는 걸로 보아 진작에 눈치챈 것이리라.

‘하긴 정파는 참여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었으니....’

청수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라 도호(道號)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쪽도 구엽월령초를 노리나?”

“아, 그건 아닙니다.”

“음?”

이건 좀 의외였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아뇨. 진짜 아닙니다. 제가 비무대회에 나온 이유는... 돈 때문이거든요.”

“뭐?”

무당파의 제자가 돈 때문에 비무대회에 참가한다니,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청수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 실은 제가 표주(漂周) 중이라서.... 준결승만 들어도 상금이 나온다고 해서 왔습니다.”

표주는 도가문파의 제자들이 강호의 삶을 배우기 위해 삼 년간 세상을 방랑하는 것을 일컫는다.

본래는 무일푼으로 시작하지만 사람인 이상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법.

“사실 낭인전에 들어가면 돈을 쉽게 벌 수 있긴 한데, 장문인께서 그건 표주의 정신과 어긋난다면서 금지시키셨거든요.”

물론 가명을 쓰거나 무공을 숨기는 식으로 편법을 쓸 수도 있지만, 들키면 끝장이었다.

사문에 잡혀가서 십 년은 면벽수련을 당할 텐데, 돈 좀 벌자고 그런 모험을 할 순 없지 않은가?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건 되고?”

“아, 그게....”

“우승 상금이 은전 천 냥이다. 준우승은 오백 냥이고. 웬만한 의뢰 몇 건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야. 당신 말대로라면 이것도 참가하면 안 될 텐데?”

강엽이야 구엽월령초가 목적이니 우승 상금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분명 상당한 거금이었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노려보자 청수가 살짝 당황해서 변명했다.

“어, 음... 그래도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금지한 것만 안 하면 나머지는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

아무래도 생긴 것과 다르게 이 젊은 도사는 돈에 관심이 좀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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