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0화 (29/450)
  • 7화. 영약 (1)

    강엽은 매일 유성홍을 찾아갔다.

    첫날처럼 이른 시간에 찾진 못했다. 언제나 날씨가 흐리진 않았으니까. 해가 저물고 나서 찾아가 대련을 한 뒤에 조언을 들었다.

    “자넨 홍성문의 제자가 아니니 홍성문의 무공을 가르칠 수는 없네. 대신 자네가 구사하는 초식들을 좀 더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유성홍은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강엽이 어떤 질문을 하든 다 받아주었다.

    간혹 생각지 못한 질문이 날아오면 고민해보고, 그래도 답이 안 나오면 함께 머리를 맞댔다.

    이후 유성홍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받은 강엽은 즉석에서 초식을 쓰는 감각을 교정했다.

    ‘이놈은 천재다.’

    유성홍은 전율했다.

    가르쳐준다고 바로 실천하는 것은 아무나 못하는 짓이다.

    옆에서 친절하게 알려줘도 못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수두룩한가?

    한데 강엽은 조언 한마디 던져주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초식을 구사했다.

    박자와 완급을 조절할 줄 알게 되고, 무게중심을 잡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되고....

    그 깨달음을 다른 초식들에도 적용시키자 다른 초식들까지 덩달아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어설픈 구석이 사라졌다.

    ‘버릇도, 선입견도 없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는 감각은 가히 독보적인 수준이야.’

    강엽은 자신의 의지대로 육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몇 번의 연습으로 쉽게 도달한다.

    보고 있노라면 현실감이 어그러지는 기분마저 들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일지십의 천재? 하늘이 내린 무골?

    ‘아니, 이건 괴물이지.’

    며칠 전과 비교하면 과연 같은 사람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발전한 강엽이었다.

    이젠 유성홍도 대련을 할 때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유성홍은 그 사실에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강엽의 성장세에 매료되어 가르치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런데....

    “내일은 좀 힘들 것 같네.”

    유성홍이 앓는 신음을 흘렸다.

    “운화장에서 초대장이 왔거든. 태화문의 이공녀가 보낸 초대장인데 가봐야 할 것 같네.”

    “문주님도 받으셨습니까?”

    “엥? 그럼 자네도?”

    “예. 어쩌다 보니....”

    오히려 강엽은 유성홍이 초대장을 받았다는 게 의외였다. 흑도 방파인 태화문이 백도 문파인 홍성문에 초대장을 보낼 줄이야?

    “명분은 중경 무림의 상생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속내는 누구도 모르지. 하지만 일파의 문주이니 거절하기가 참 어렵군. 낭인 시절엔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됐는데... 자넨 갈 건가?”

    “일단은 갈 생각입니다.”

    야인인 강엽은 유성홍과는 입장은 다르다.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초대장을 받았다고 무조건 참석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낭인전으로 초대장을 가져온 태화문의 무인이 넌지시 말했던 것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술자리가 아니라 중경의 강호인들을 초청해서 비무대회를 열 거라고.

    그리고 뒤이어 언급한 보상은 강엽으로 하여금 참가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했다.

    ‘구엽월령초(九葉月靈草).’

    꽤 유명한 영약이라고 했던가.

    고수의 피를 마시면 내공을 늘릴 수 있는 혈공진기의 특성상 영약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하나 흡혈귀의 약점을 메꾸기 위한 수단으로 영약을 염두에 둔 것은 사실.

    영약을 복용한다고 약점이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으나,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인연이 닿거나 엄청난 거금을 들여야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우선순위에서 밀어뒀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자네도 구엽월령초가 욕심 나나 보군. 하긴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영약이긴 해.”

    “문주님은 그렇습니까?”

    “에잉,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근데 마흔 살 아래만 참가할 수 있다고 하니 꾹 눌러 참아야지.”

    강엽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일부러 나이 제한을 걸어놓은 건가?’

    비무의 공정성을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것만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뭐, 가보면 알겠지.’

    * * *

    연회가 열리는 장소는 운화장이었다.

    “여길 다시 오다니.”

    그것도 보표일을 그만둔 다음에 말이다.

    강엽이 묘한 표정을 짓자 여느 때와 달리 근사한 장포를 입고 머리에 탕건을 쓴 장경이 낄낄거렸다.

    그도 초대장을 받고 온 것이다.

    “설마 영영 안 올 참이었냐?”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오고 싶진 않았지.”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 일한 곳을 다시 오니 요상한 감흥이 일었다.

    심지어 손님의 신분으로 온 게 아닌가?

    “좋게 생각해. 그냥 즐기면 되잖아? 유 문주도 나온다니 아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장경은 유성홍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강엽에게 유성홍을 찾아갈 것을 권한 게 다름 아닌 그였기 때문이다.

    “흠, 그렇긴 한데....”

    “그보다 그 영감님은 어때?”

    “어떻냐니 뭐가?”

    “옛날엔 꽤 날렸던 영감님이거든. 내가 낭인전에 들어오기 전에 은퇴해버렸지만, 지금으로 치면... 흑수양쯤 되는 영감님이었지.”

    “지금도 노익장이다.”

    며칠 동안 꽤 강해지긴 했지만 유성홍은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였다. 초감각이나 암신을 쓰지 않으면 승률은 절반 남짓.

    ‘목숨 걸고 싸우면 전부 이기겠지만... 그렇게 이겨봤자 의미없지.’

    목표는 유성홍을 숫돌로 삼아 스스로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한데 나중에 한 번 도와주기로 한 대가는 좀 너무하지 않나? 무리한 부탁을 하면 어쩌려고?”

    “거절해야지.”

    애초에 저 약속도 될 수 있으면 도와주는 거지, 무조건은 아니었다.

    “홍성문도 생각이 있다면 기껏 산 호감을 박살내진 않을 거다.”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운화장에 도착했다.

    보표들이 강엽을 알아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초대장을 보여주자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연회장을 쭉 둘러본 장경이 씩 웃었다.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

    마침 선객들도 장경을 알아봤다.

    “장 분타주! 신수가 훤하시구만.”

    “흐흐, 선 지부장님만 하겠습니까?”

    다가온 사람은 사천의 전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도전장의 중경 지점장이었다.

    “한데 같이 온 사람은...?”

    “이 친구도 초대장을 받아서 같이 왔습니다. 요즘 우리 분타에서 가장 유명한 친구지요. 요즘엔 귀영이라는 별호로 불립니다.”

    “아아... 그 요살마녀를 죽였다는 낭인?”

    지부장은 좀 놀란 기색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진 않았다.

    “반갑소. 선이백이오. 성도전장의 중경 지점장이외다. 요살마녀를 죽인 고수에 대한 소문이 돌길래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젊구려.”

    “강엽입니다.”

    강엽은 포권만 해보였다.

    지극히 무뚝뚝한 태도에 지부장이 무안해지려는 때 장경이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그보다 저 뒤에 있는 사람은 아드님입니까?”

    “그렇소. 내 못난 아들이외다.”

    “선강후입니다.”

    영준한 청년이 포권을 했다.

    그러나 시선은 강엽에게 못 박혀 있었는데, 불꽃이 튈 것처럼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아드님이 청성파의 속가제자라고 들었습니다. 과연 지점장님을 닮아 헌앙장부입니다그려.”

    자고로 자식 칭찬 싫어하는 부모는 없는 법.

    선이백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도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하하, 장 분타주가 못난 자식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구려. 아직 모자란 게 많은 녀석이오.”

    “혹시 아드님도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겁니까?”

    “음, 뭐... 그렇소. 굳이 남들 볼거리가 될 필요가 있나 싶은데, 하도 참가하겠다고 조르니....”

    선이백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비무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아들의 포부를 꺾지 못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데 그럼 저쪽도...?”

    “그렇게 됐습니다.”

    “으음.”

    선이백은 침음했지만 선강후는 눈을 반짝였다.

    최근에 중경에서 가장 유명한 무인을 꼽으라면 모두가 강엽을 꼽으리라. 하나 단기간에 명성을 얻은 만큼 그를 시기하거나 호승심을 불태우는 자들이 많았다.

    선강후는 후자였다.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대진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겠지.”

    강엽은 심드렁했다. 선강후의 기도는 주목할 만큼 출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청성의 무공은 좀 기대되는데.’

    물론 선강후의 수준만 보고 청성의 무공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부를 엿볼 수는 있으리라.

    이후로도 장경은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강엽을 소개시켜주고,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이어갔다.

    “푸하! 잠깐 쉬자.”

    “이런 일에 익숙한 것 같은데.”

    “익숙하긴 개뿔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지. 쓰벌, 억지로 웃느라 혼났네.”

    아무래도 유력인사일수록 고액 의뢰를 많이 넣다 보니 장경도 그들과 알고 지냈던 것이다. 너무 가깝지는 않게, 그러나 너무 멀지도 않게 딱 중간만 유지하며.

    “이제 저치들도 네 얼굴을 알 거야. 금방 까먹을지도 모르겠지만... 네 이름값이 오르면 다시 기억할걸. 훗날 곤경에 처하면 너부터 떠올리겠지.”

    “저들이 낭인을 필요로 할 일이 있을까?”

    “있어. 내 손모가지 걸고 장담한다.”

    “저런. 모근을 걸면 믿어줬을 텐데.”

    “인마, 난 자발적 민머리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아오...!”

    장경이 차마 반박하지 못한 표정만 와락 구길 때였다.

    저편에서 제자들과 함께 온 유성홍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역시 와 있었구만!”

    강엽에게 눈을 흘긴 장경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킁,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있었네.”

    “예?”

    “말년에 웬놈이 찾아와서 매일 싸움하자고 졸라서 말이야. 그 때문에 삭신이 쑤시다네. 밤에 끙끙거리니까 마누라한테 쫓겨날 뻔했지 뭔가.”

    “....”

    다른 사람들 앞에선 혀가 매끄럽게 굴러갔던 장경도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자 유성홍이 껄껄 웃었다.

    “그래도 매일이 즐겁다네. 듣자하니 자네가 나를 추천했다면서?”

    “아, 예. 그야 뭐....”

    “허어! 자네가 무인이었다면 이 기쁨을 전해줬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참으로 아쉬우이.”

    그 순간, 장경은 자신이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공을 익혔다면 유성홍이 들들 볶았을 것 아닌가?

    “그나저나 오면서 들었는데... 비무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들은 이공녀가 거둔다면서?”

    “맞을 겁니다.”

    장경 또한 들은 바가 있었다.

    “물론 반드시 이공녀의 휘하에 반드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승해도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요. 근데 신분이나 사문에 상관없이 태화문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솔직히 말해서 꽤 매력적이죠.”

    그 정보를 듣고서야 장경은 비로소 왜 조영옥이 중경에 왔는지 알았다. 처음부터 중경 무림의 상생 운운한 연회는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초대장을 받지 못한 무인들도 비무대회에 참가하니 말입니다. 대신 그치들은 예선부터 참가하지만요.”

    초대장을 가지면 본선부터 진출한다.

    물론 그만한 실력이나 배경이 뒷받침되어야겠지만 초대장을 가진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인 셈.

    ‘개중에 고수들이 얼마나 있을지가 관건이군.’

    비록 나이에 제한을 뒀다지만 참가자들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강엽은 강적이 출전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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