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9화 (28/450)

6화. 정비 (4)

강엽은 유성홍과 마주 섰다.

강엽이 조용히 대련하길 원했기 때문에 유성홍의 자식들이나 제자들 없이 둘만 있었다.

“일단 가볍게 해보세.”

“그러지요.”

자세를 잡은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본다.

초반엔 내공을 쓰지 않기로 약속했다.

강엽은 조금씩 틈을 보다 가볍게 일권을 내뻗었다.

유성홍은 피하지 않았다. 절반쯤 짓쳐든 강엽의 주먹을 아래에서 쳐내 타점을 빗겨낼 뿐.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묵직한 힘에 침음했다.

“으음, 무겁군...!”

하지만 유성홍 역시 나이에 비하면 정정한 몸이었다.

본인은 늙었다고 투덜거리지만, 근육이 꽉 잡힌 몸은 어지간한 장정들보다 강건했다.

“후, 좋아. 들어오시게!”

강엽은 사양하지 않았다.

경쾌하게 팔괘의 방위를 밟아나가면서 공방을 나눈다.

주먹을 뻗기 전에 손목을 후리고, 손바닥으로 비스듬히 튕겨내고, 팔꿈치로 운신을 방해했다.

콰악!

무릎과 허벅지가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끊임없이 손발을 놀리면서 유성홍이 물었다.

“자넨 싸움을 뭐라 생각하나?”

“...?”

“허어, 질문이 너무 막연했나? 이기려면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지 묻는 게야.”

“....”

강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게 정답이 있는 질문인지 의문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일대일의 상황일 수도 있고 집단전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다수에게 공격받을 수 있고, 반대로 다수가 되어 한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겠지요.”

“그뿐인가?”

“상대의 실력도 변수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가 어떤 병장기를 쓰는지, 어떤 환경에서 싸우는지도 중요했다.

실전에선 온갖 변수가 맞물리기 때문에 필승의 전술 따위는 없다.

“하지만 전략은 세울 수 있겠지.”

“무공 자체가 전략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군. 예컨대 도검불침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라면 자기 몸을 믿고 싸울 터. 독술을 익힌 독인이라면 독으로 싸울 테지.”

하지만 유성홍이 요구하는 것은 그보다 고차원적인 담론이었다.

“결국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간단하네. 내 공격이 먼저 닿으면 이기는 게야.”

그러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날 겪은 싸움들을 돌아본 강엽은 어렵지 않게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공간을 장악해야 합니다.”

“호오.”

유성홍이 눈을 반짝였다.

방금 강엽의 대답은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사실 방금 내 질문에 정답은 없었네. 각자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하나 대부분의 무맥과 종파들에서 비슷하게 가르치긴 하지.”

빠악!

담론을 나누면서도 손발을 놀린 두 사람이었다.

유성홍이 다리를 올린 순간 강엽 역시 다리를 날려 유성홍의 공격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유성홍은 허초였다는 듯이 다리를 내리고 바닥을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연이어 날아온 다섯 번의 발길질을 일일이 쳐낸 강엽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유성홍의 활공이 끝났다는 것을 동물적인 감으로 느꼈고, 어떻게 대응할지 순식간에 판단했다.

한 걸음 물러나면서 주먹을 채찍처럼 후려쳤다. 유성홍이 떨어지는 찰나를 노린 역습이었다.

“저런. 동작이 너무 크지 않나.”

유성홍은 넘어가지 않았다.

강엽의 주먹을 비스듬히 흘려내며 완맥을 낚아채서 자세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강엽이 팔을 당기면서 역으로 낚아채려고 하자 하박끼리 세게 부딪쳤고, 그 뒤에....

파박!

육장끼리 부딪치며 똑같이 세 걸음씩 물러났다.

시큰한 손목을 돌리며 유성홍이 물었다.

“바둑은 좀 두나?”

“옛날에 배웠습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이치는 알겠군. 무공 역시 그와 같네. 난 신물경속(愼勿輕速)과 입계의완(入界宜緩)을 염두에 두는데, 자네는?”

“굳이 따지면 기자쟁선(棄子爭先)이겠군요.”

돌 몇 점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선수를 취하라는 뜻으로, 강엽의 방식과 가장 잘 어울렸다.

“하하, 그런가! 이쯤 했으면 탐색전은 끝난 것 같은데. 몸도 풀렸으니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좋습니다.”

강엽이 입가를 틀어올렸다.

그들의 비무는 어디까지나 서로 목숨을 노리지 않는 합의 하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더 빠르고 거친 싸움이 되리라.

우드득 목을 꺾은 강엽이 말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 * *

콰앙...!

한 줄기 폭음이 울려 퍼졌다.

때 아닌 날벼락에 홍성문의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내원이다!”

홍성문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간과 문주 일가의 처소가 분리되어 있었다.

내원엔 산책로를 겸한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폭음은 그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원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지라 문주의 자식들과 항렬이 높은 제자들만 들어갔다.

그들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문주인 유성홍이 철검을 든 채 손님인 강엽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대체...?”

아연해진 그들이 싸움에 끼어들어야 할지 헷갈려하는데 유성홍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하!”

“아, 아버지?”

자식들이 뜨악했다.

그들의 부친이 저렇게 흥겹게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즐겁구나! 이 얼마 만의 싸움인가!”

나이가 들고 명숙이라 불리면서 유성홍은 전력을 다해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엔 수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유성홍은 강엽과 부딪치고 나서야 자신이 목이 말랐다는 것을, 싸울 만한 상대가 등장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이 붙은 유성홍은 권각술로는 강엽에게 안 된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했다. 맨손으로 부딪치는 싸움에서는 힘과 감각에서 밀린다.

그러나 검을 들자 승부의 추가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젊은 친구가 이렇게 강하다니...!”

“....”

강엽은 미간을 찌푸렸다.

검을 든 유성홍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날이 없는 무인검(無刃劍)을 들었는데도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예기를 뿌렸던 것이다.

“왜 그러나? 설마 다 늙은 노인네에게 쫄아버린 겐가?”

흥이 일자 젊은 시절의 말투가 나온 유성홍이었다.

그만큼 검격도 빠르고 매서워졌기에 강엽도 심장이 철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시 흡혈귀의 능력을 봉하고 싸우면 이 정도가 한계인가?’

초감각은 쓰지 않았다.

암신도 쓰지 않았다.

재생력은 말할 것도 없다.

탁월한 감각과 뛰어난 신체능력이 있으니 완전히 쓰지 않았다고 보긴 애매하지만, 그 외의 능력은 철저히 봉인한 채 합을 겨뤘다.

순수한 무공만 보면 강엽은 아직 유성홍의 상대가 아니었다.

유성홍이 입매를 틀어올렸다.

“근데 자네도 의외로 허세가 심하구먼.”

“...뭐요?”

“자네가 아까 경고하지 않았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근데 뚜껑을 열어보니 어이쿠! 자네가 조심해야 되겠는걸?”

“....”

“암, 이해하네. 원래 수컷들이 그렇지 않나. 곧 죽어도 허세를 부려야지. 자네도 사내고 무림인이니 뭔가 있어 보이는 척 허세를 뿜뿜 날리고 싶었겠지. 젊은 시절엔 다 그런 법일세.”

“....”

강엽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차라리 욕을 들었다면 한 귀로 흘려버렸으리라.

하지만 아까 전에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마에 핏줄이 삐죽 솟았다.

“말솜씨가 제법이십니다.”

“하하, 산 입에 거미줄 칠 순 없지 않은가? 늙어서 입까지 다물면 턱이 약해지는 법일세. 나중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움직여줘야지.”

“그럼 그 입을 다물게 해드려야겠군요.”

그 순간, 강엽의 기세가 일변했다.

‘뭐지?’

유성홍은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강엽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괘씸해서 도발을 하긴 했는데....

‘이건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야?’

물론 강엽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강하고, 빠르고, 감각적으로 번뜩였으니까.

하지만 일찍이 낭인 생활을 해본 유성홍은 강엽의 무공이 지닌 한계점을 꿰뚫어봤다.

강엽의 무공은 번뜩이는 감각과 탁월한 임기응변 덕분에 강해보일 뿐, 무공 자체만 따져보면 깊이가 얕았다.

즉, 저 무공을 구사하는 게 강엽이기에 그나마 유성홍과 동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녀석들은 압살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저런 무공으로 요살마녀를 잡았단 말인가?’

강엽의 재능에 경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그래, 이만하면 잡을 만하구만.”

본격적으로 힘을 끌어올린 강엽 앞에서는 유성홍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목줄을 잡아뜯길 것 같은 위기감.

서로 목숨을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이 무색하게도 유성홍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물러나진 않겠다. 자네도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네.”

“....”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련은....

* * *

“어이구, 삭신이야.”

유성홍이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그는 강엽을 이기지 못했다.

다만 그의 무공이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런 젠장... 십 년, 아니 오 년만 젊었어도....”

노쇠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젊은이들 못지않게 강건해도 젊은 시절처럼 기민하게 움직일 순 없었다. 관절은 삐걱거리고, 실전감각도 예전만 못했다.

“아니, 그러게 왜 그 나이 먹고 애들처럼 신나서 칼을 휘둘러요, 휘두르긴?”

“부인, 어찌 무인이 되어 강자를 앞두고 살살 할 수 있겠....”

짝!

“끄어억!”

“시끄러워요.”

부인의 매서운 손찌검에 유성홍이 비명을 질렀다.

젊은 시절엔 칼침을 먹어도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부인의 손바닥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 근데 또 대련하기로 했는데....”

“뭐라고욧?”

부인이 쌍심지를 돋우자 유성홍은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하고 눈을 슥 피했다.

“그, 그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라 물릴 수가....”

“아주 그냥 관짝에 들어가라, 이 망할 영감아! 어? 나 과부 만들려고 작정했지!?”

“부, 부인! 나 죽소! 나 죽는다고!”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유성홍은 간신히 부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강엽과 나눈 약속을 말해준 것이다.

“그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오. 내가 돕지 않아도 강해지겠지. 다만 내 도움으로 그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그도 한 번쯤은 도와주지 않겠소?”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만에 하나, 홍성문의 제자가 위기에 처한 것을 봤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것.

그게 유성홍이 바라는 전부였다.

“.......”

뒤늦게 때린 게 미안해진 부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유성홍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내 고집을 이해해주시오.”

“너무 무리하지만 말아요.”

유성홍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 * *

“자네는 강하네.”

유성홍이 말했다.

“그런데 자네 무공은 약해.”

앞뒤가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강엽의 무공을 정확히 꿰뚫어본 통찰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력을 다한 자네는 엄청나게 강하네. 아마 중경을 통틀어도 자네보다 강한 사람들은... 거의 찾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건 자네가 강해서일 뿐, 자네 무공은 깊이가 얕아.”

좋게 말하면 유연하고 변화무쌍한데, 나쁘게 말하면 근본이 없다.

초식과 투로가 정립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감각과 임기응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아마 여러 무공을 잡다하게 익힌 것 같은데 맞나?”

“예.”

강엽이 무공에 입문한 지 고작 석달.

진조의 영성을 물려받았고 강자들의 피를 마셔서 짧은 시간 비약적으로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한계가 뚜렷했다.

“그런데 이건 좀 민감한 질문이긴 한데... 자네, 무공을 익힌 지 얼마나 되었나?”

강엽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고민했다.

“이 년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석달은 비상식적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기간을 늘렸는데, 유성홍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 년이면 약관이 넘어서 무공에 입문했을 텐데... 어떻게....”

무공의 깊이가 얕아서 입문한 시간이 짧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짧을 줄이야?

강엽도 약간 후회했다.

‘오 년이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자네 뭐 전설의 천무지체나 태양지체 같은 건가? 하늘이 내려준 무골 말일세.”

“아닙니다.”

“으음, 뭐... 어쨌든 자네 정도면 대련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게 있겠지. 하지만 무엇을 얻을지는 전적으로 자네의 몫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제점을 지적하고 조언을 해주는 정도밖에 없구먼.”

“그거면 충분합니다.”

강엽에게 필요한 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르쳐줄 스승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채워줄 조언자였다.

언제 또 피를 구하기 위해 일을 나갈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많이 배우리라.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그리고 조영옥의 초대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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