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8화 (27/450)
  • 6화. 정비 (3)

    쏴아아아아!

    강엽이 밖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침부터 우중충하더라니....”

    가뜩이나 흐린 하늘이 비 때문에 더 어두워졌다.

    강엽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비를 맞았기에 기분이 좋진 않았다.

    쫄딱 젖은 생쥐꼴이 되기 전에 가까운 다루로 피신했다.

    “주문하신 몽정감로(夢頂甘露)입니다. 그리고 이걸로 머리 좀 말리세요.”

    “...고맙소.”

    종업원이 건넨 수건을 받은 강엽은 물기를 닦고, 그윽한 향을 내는 차를 조금씩 홀짝였다.

    흡혈귀가 되면서 피 말고는 먹지 않았지만, 최근엔 생각이 바뀌어 조금씩 섭식을 하고 있었다.

    섭식이 생존에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도 인간다운 감수성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지금까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생존에 관련된 문제 말고는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산적 토벌로 심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마음이 바뀐 것이다.

    물론 조금 여유로워졌다고 해도 생존이 가장 중요함은 변치 않았다. 그를 위해 무공뿐 아니라 술법도 틈틈이 연구한 게 아닌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술법이 비의 영향을 받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행인들의 옷에 자신의 피를 조금씩 묻혀두었다.

    살짝 엄지를 깨문 다음, 저잣거리에서 구한 양피지 위에 피를 떨어트렸다.

    직후 남들이 알아듣지 못할 만큼 진언을 작게 웅얼거리자, 핏방울이 아홉 개의 혈점(血點)으로 변해서 전 방위로 흩어졌다.

    혈종술(血從術)이라 불리는 술법이었다.

    ‘가운데에 있는 혈점이 나 자신.’

    다른 혈점은 행인들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본래는 이보다 많았지만 빗물에 씻겨가면서 효과가 줄어든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여덟 명이 한계거나. 강엽도 아직 뭐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때 양피지의 혈점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어떤 혈점은 양피지 밖으로 벗어났다.

    강엽이 양피지 위로 손가락을 모으자 다른 혈점들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사라졌던 혈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남은 것은 지속력이군.’

    얼마나 갈지 지켜봐야 한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문득 혈점 하나가 사라졌다.

    “...음?”

    * * *

    “역시....”

    사라진 혈점은 가까웠다.

    마침 비도 잦아들었겠다, 다루를 나온 강엽은 혈점이 사라진 위치부터 찾아왔다.

    다루에서 직선거리로 삼십 장쯤 되는 곳에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그곳에선 피를 묻힌 중년인이 어깨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강엽이 묻힌 핏자국은 빗물에 녹아들어 흔적도 남지 않은 상태.

    중년인을 죽이려고 한 배불뚝이 남자가 단도를 치켜들었다 강엽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씨발! 넌 누구야!?”

    “하, 왜 쓰러졌나 했더니....”

    강엽이 싸늘한 눈빛을 뿌렸다.

    “앵속쟁이한테 걸렸군.”

    “...!”

    배불뚝이의 눈은 붉게 물든 채 흐리멍텅했다.

    주먹패들의 싸움에 몇 번 끼면서 뒷골목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앵속에 취한 자들도 많이 봤다. 약에 취한 앵속쟁이의 전형적인 몰골.

    다만 여기는 뒷골목이 아닌데 앵속쟁이가 어슬렁거린 것이다.

    “목적은 돈인가?”

    “이 씨발! 저리 안 가!?”

    단도를 허공에 붕붕 휘둘렀지만 위협이 될 턱이 없다.

    틈을 봐서 간격을 파고들어 칼을 쥔 손목뼈를 분지르고, 비명을 지르는 놈의 턱주가리에 한 방 먹이니 놈이 망가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예, 예. 어떻게든....”

    “피가 많이 나니 의원부터 찾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저쪽 사거리에 있던데.”

    “가, 감사합니다.”

    파리하게 질린 중년인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아, 잠깐.”

    강엽은 엄지손가락만한 자기병을 꺼내 중년인의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담았다.

    해괴한 짓거리였지만 겁을 단단히 먹은 중년인은 무슨 짓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피를 채우고 나서야 중년인을 보낸 강엽은 자기병에 담긴 피를 절반쯤 마셔봤다.

    무림 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이제 피를 마시는 효과가 떨어지는 것이다.

    알고 있는데도 피를 짠 이유는 혈종술 때문이었다.

    혈종술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앞서 썼던 자신의 피를 이용한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찾고자 하는 사람의 피를 이용한 방법이었다.

    후자는 아무한테나 피를 달라고 할 순 없어서 나중으로 미뤄뒀는데 마침 기회가 온 것이다.

    깨끗한 양피지에 자신과 중년인의 피를 떨어트리고 진언을 외우자 두 개의 혈점이 생겨났다.

    강엽은 중년인이 자신이 알려준 대로 사거리에 있는 의원에 갔다는 것을 알고 씩 웃었다.

    이로써 두 혈종술을 모두 터득한 것이다.

    * * *

    모산혈조의 술법서는 방대하다.

    전부 익히는 건 무리였기 때문에 자신과 잘 맞는, 혹은 쓸 만한 술법부터 익혀야 했다.

    혈종술은 두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다.

    아무래도 피를 이용하다 보니 궁합이 좋았고, 사람 찾는 용도다 보니 쓸모도 많았던 것이다.

    물론 무공 수련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무공은 방구석에서 혼자 익혀봤자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엽은 이론을 중시하지만, 자신이 감각파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수를 찾아갔다.

    “문주님을 뵈러 왔소.”

    홍성문(虹城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장원.

    대문을 지키는 젊은 제자들이 물었다.

    “약속을 하고 오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문주님께서 안에 계시면 서찰을 전해줬으면 좋겠소. 낭인전에서 왔소.”

    낭인전이란 말에 제자들이 흠칫했다. 홍성문은 낭인전 출신의 낭인이 문주로 있는 작은 문파였다.

    정확히는 과거 낭인전에 속했던 현 문주가 전 문주의 데릴사위가 되어 문파를 물려받은 것이다.

    “혹시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강엽.”

    “낭인전의 강엽이라면... 설마 귀영!?”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요살마녀를 죽인 강엽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에 그들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색이 바뀐 제자들 중 한 명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강엽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홀로 남은 다른 제자만 침을 꿀꺽 삼키며 강엽을 곁눈질했다.

    “그, 저....”

    “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요살마녀를 어떻게 쓰러트리셨는지 여쭤봐도 될런지요?”

    그렇게 묻는 제자의 눈빛은 묘한 기대감과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죄, 죄송합니다!”

    강엽의 눈매가 꿈틀거리는 것을 불쾌감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제자는 사색이 되어 머리를 숙였다.

    강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재밌진 않을 텐데...?”

    “괜찮습니다! 꼭 듣고 싶습니다!”

    “음, 그렇게 듣고 싶다면야. 대가리를 땄소.”

    “예?”

    “내상도 입히고, 등짝도 찢고... 뭐, 죽인 건 다른 수법이긴 한데, 마지막에 대가리를 땄지.”

    중간 과정을 전부 생략해버린, 너무 건조해서 목구멍이 콱 막혀버릴 것만 같은 무용담이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된 홍성무관의 제자를 보며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재미없을 거라니까.”

    만약 매담자(賣談者)라면 실감나고 극적으로 꾸몄겠지만, 강엽은 글재주는 있어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는 절망적으로 없었다.

    그때 안쪽으로 갔던 제자가 돌아왔다.

    “문주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 * *

    석파검(石破劍) 유성홍.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열다섯 무렵에 병사가 되어 이민족들과 싸웠고, 퇴역한 이후엔 낭인전에 들어가서 강호에 뛰어들었지.”

    다른 낭인들처럼 그 역시 배경이 한미했기에 동패무고의 무공에 의존했다. 하지만 천재는 아니었기에 비급만 봐선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낭인들이 그랬듯 나 역시 업계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청했네.”

    공짜는 아니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비위를 맞춰야 했으니까. 때론 힘들게 번 돈을 갖다 바쳐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익힌 무공으로 조금씩 위로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은패급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홍성문의 의뢰를 받았다네. 홍성문이 흑도방회와 시비가 붙었거든. 홍성문 입장에선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낭인을 고용한 게지.”

    홍성문에 쳐들어온 흑도방회에 맞서 싸웠다. 어쩌다 보니 홍성문의 제자들보다도 용감히 싸웠다.

    “그 뒤에 전대 문주님이 그러셨지. 혹시 당신의 제자가 될 생각이 없느냐고.”

    홍성문의 무공이 평생을 고생하며 익힌 실전무공보다 강하진 않았다. 하지만 오랜 낭인생활에 지쳐있던 그는 전대 문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사람을 만났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다행히 잘 극복했네. 자식들도 장성했고.”

    열다섯의 어린 병사는 어느덧 예순을 넘은 노강호가 되었다.

    노강호가 씩 웃으며 날카로운 기세를 뿜었다.

    “한데 이 나이 먹고 젊은 친구에게 비무첩을 받다니, 참 감개가 무량하네그려.”

    제자들이 들었다면 놀랐을 것이다.

    강엽이 유성홍에게 보낸 서찰은 한수 가르침을 바란다는 도전장이었다.

    “자네에 대한 소문은 들었네. 거산중권과 요살마녀를 죽였다지? 그 외에도 자잘한 소문들이 많이 들리던데...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음?”

    “제가 무공을 좀 주먹구구식으로 익혀서요. 점검을 좀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요.”

    “요살마녀를 죽인 고수가 무공을 주먹구구식으로 익혔다... 허허.”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그렇겠지.”

    유성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맹랑한 후배놈은 비무첩 안에 전표를 넣어놨다. 무려 오백 냥이나 되는 전표를 말이다.

    그건 일종의 성의 표시였다.

    “비무 한번 하는 대가로는 좀 많군.”

    “그렇지도 않습니다. 은지패의 낭인에게 일을 맡기는 대가라면 말입니다.”

    유성홍은 낭인전에서 은지패까지 올랐다.

    만약 그대로 낭인전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은천패는 확실히 갔을 테고, 어쩌면 금패까지 올라갔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낭인이 아니네.”

    “제가 드릴 게 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건 한 번의 비무가 아닙니다.”

    “그 말은?”

    “서로 다치지 않는 선에서 몇 번이고 겨뤄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가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서야 유성홍은 정말 강엽이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인가? 나는 늙었네. 전성기는 옛적에 지난 몸이야.”

    무인의 기량은 세월과 함께 농익었어도 육신은 그렇지 못했다. 열심히 내공 수련을 하고 보약을 먹어도 세월을 이길 순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당연히 했던 것을 지금은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강엽의 대답은 단호했다.

    “제자를 많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강한 것과 잘 가르치는 건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무공만 놓고 본다면 유성홍보다 강한 사람을 찾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유성홍은 자신이 걷는 길을 앞서 걸었던 사람.

    당장 찾을 수 있는 고수 중에서 유성홍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그라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려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터.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허허.”

    유성홍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강엽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비굴한 기색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돈은 됐네.”

    “그럼....”

    “대신.”

    일부러 힘주어 말하면서 강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순간을 잊지 말라는 듯이.

    “훗날 우리 제자들이 위험에 처하면 도와주게. 그런 조건이면 내 자네를 도와줌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