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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7화 (26/450)
  • 6화. 정비 (2)

    행인들로 북적이는 아침 거리.

    새벽부터 내린 비로 인해 흐릿한 하늘 아래에서 강엽은 당당히 대로를 활보했다.

    하늘이 흐릴지라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건 아니기에 살갗이 조금 따끔했다.

    그간 햇볕에 당한 고통에 비하면 사소하긴 해도,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외출을 한 것은 급한 일부터 빨리 처리하기 위함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보표일을 그만둘 거라면 휴가가 끝나기 전에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오는 건 처음인가?’

    한낮의 운화장은 처음 보는지라 새삼 낯설게 다가왔지만, 이걸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터.

    안면이 있는 몇몇 이들이 어색하게 건네는 인사를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엇, 강엽?”

    “...?”

    “오연석일세. 저번에 이름 말해줬는데... 까먹었나?”

    “...아아.”

    이름을 듣고서야 떠올랐다.

    사수였던 사이준이 부상으로 빠진 동안 일을 가르쳐준 보표들 중의 한 명이었던 것.

    다만 그 뒤에 밤 근무가 힘들다면서 낮 근무로 바꾼지라 바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일하는 시간이 다르니 만나기가 어렵구만. 근데 자네 휴가 아닌가? 휴가 반납했나?”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잠깐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혹시 총관님을 뵈러 왔나?”

    “예.”

    “쯧쯧, 때를 잘못 맞췄구만. 총관님은 지금 굉장히 바쁘시네. 못 뵐지도 몰라.”

    “무슨 일 있습니까?”

    “태화문에서 손님이 오셨거든. 무려 이공녀가 찾아왔지 뭔가. 다들 장난 아니게 긴장했어.”

    “...!”

    운화장에서 일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태화문의 고수들을 본 적은 없었다.

    ‘어쩐지 사람들 표정이 이상하더니만.’

    그땐 자신과 서먹서먹한 탓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언제 나온답니까?”

    “그야 모르... 아, 저기 나오시는구만!”

    오연석이 말을 하기 전부터 강엽은 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린 상태였다.

    장주가 기거하는 내원에서 십수 명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굳이 길을 막아서 좋을 게 없기에 오연석과 함께 옆으로 물러나서 고개를 숙였다.

    강엽은 살짝 고개를 틀어서 대열 사이에 있는 총관과 보표대주를 곁눈질했다.

    마침 그들도 강엽을 알아봤는지 미간을 좁혔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나치려는 때....

    “장주님.”

    말문을 뗀 것은 선두의 여인이었다. 강엽을 보고 이채를 발했다.

    “예, 공녀님.”

    오척 단신의 노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혹시 저자도 장주님의 수하인가요?”

    “저자라 하심은...?”

    여인을 따라 고개를 돌린 운화장주가 고개를 숙인 강엽을 발견하고 이맛살을 한껏 찌푸렸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뜻인지요?”

    “본장에 속하되 바깥에서 온 자입니다. 급하게 사람을 구해야 해서 쓴 낭인이지요.”

    운화장주는 강엽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강엽이 열화장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 쭉 주시해왔던 것이다.

    그가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총관을 통해 회유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

    “아하, 낭인... 혹시 낭인전인가요?”

    알쏭달쏭한 질문이었다. 내용은 명확하되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으니.

    눈을 뒤루룩 굴린 운화장주가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재밌네요. 이름이 뭔가요?”

    “강엽입니다.”

    그때 측근으로 보이는 자가 여인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여인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하하, 진짜 재밌네. 이봐요. 강엽이라고 했나요?”

    강엽은 말을 섞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묻는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습니다만.”

    “저잣거리에서 소문을 들었어요. 낭인전의 낭인이 요살마녀를 죽였다고. 마치 귀신의 그림자(鬼影)처럼 신출귀몰한 무공을 구사한다지요?”

    강엽이 요살마녀를 죽였다는 소문이 같이 토벌에 참가했던 낭인들에 의해 솔솔 퍼지고 있었다.

    아직은 중경에만 퍼진 소문이지만 여인의 측근들이 그 사실을 듣고 여인에게 전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제가 들은 이름과 앞에 있는 분의 이름이 같군요. 게다가 둘 다 낭인전의 낭인이기까지. 이게 과연 우연일까 싶은데....”

    여인이 눈을 흘기자 운화장주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강엽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장주님도 너무하시네요. 이런 고수를 거느렸으면서 한마디 말씀도 안 해주시다니.”

    “...송구합니다. 낭인전에 속한 사람이라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저어되어....”

    왜 알리겠는가? 운화장주는 강엽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공녀가 인재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구했던 것이다.

    ‘저 빌어먹을 놈이!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나타나가지고 잿밥을 뿌린단 말이냐!’

    설마 강엽이 휴가 기간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운화장주였다. 세상 어떤 미친놈이 휴가 중에 일터를 기웃거리겠는가?

    “만나서 반가워요, 강 무사. 난 조영옥이라고 해요. 태화문의 이공녀입니다.”

    “아, 예. 강엽입니다.”

    강엽은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고 발음이 또렷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전문적으로 화법을 훈련한 사람처럼 의미와 감정을 생생히 전달하고 청자의 이목을 끌어모은다.

    “요살마녀는 무림공적이 되고도 살아남았는데, 그런 악녀를 잡다니... 정말 큰일을 해냈어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가요?”

    조영옥이 눈웃음을 쳤다. 운만으로 어찌 요살마녀 같은 고수를 잡겠냐는 듯이. 그럼 요살마녀를 놓친 고수들은 운이 없었겠는가?

    “당신의 무용담을 듣고 싶네요. 조만간 날을 잡아서 유력인사들을 초청할 건데, 당신에게도 초대장을 보낼게요. 참석해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러지요.”

    강엽은 연회에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조영옥의 체면을 생각해서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시간이 안 맞으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조영옥이 사람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오연석이 가슴을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심장 떨려 뒈지는 줄 알았네. 자네는 아무렇지 않나?”

    “죄진 것도 아닌데 왜 떱니까.”

    “하여튼 강심장이야. 그래도 이공녀라는 여자, 예쁘기는 우라지게 예쁘더만.”

    그건 강엽도 동의했다. 살면서 본 예쁜 여자들은 빙궁의 야율산산과 아설하였는데, 조영옥은 그녀들과 다른 고고한 매력이 있었다.

    다만 그녀의 아름다움보다는 한순간 느꼈던 기도에 더 주목했다. 빙궁의 장로인 빙오선과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위험한 느낌을 풍겼던 것이다.

    * * *

    총관이 돌아온 것은 한 시진 뒤였다.

    투기장을 둘러보고 싶다는 조영옥의 부탁으로 장주와 함께 그녀를 안내했던 것이다.

    이후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강엽의 말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얼마 전에 내상을 입어서....”

    물론 강엽은 멀쩡했다.

    그러나 총관은 요살마녀와의 싸움에서 강엽이 다쳤다고 생각해서 혀를 찼다.

    “그러게 좀 조심하지 그랬나.”

    “죄송합니다.”

    사실 강엽이 일방적으로 그만두겠다고 강짜를 부려도 총관이 말릴 명분은 없었다. 언제까지 일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구실이 있어야 서로 부드럽게 넘어가지.’

    굳이 말하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내상이 다으면 다시 일할 건가?”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긴. 나도 자네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네. 자네 같은 고수가 보표일을 하는 게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막상 떠나보내려니 아쉽구만.”

    솔직한 마음 같아선 직위든 돈이든 다 줘서라도 강엽을 붙잡아놓고 싶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그래. 잘 가게.”

    총관은 씁쓸하게 강엽을 보냈다.

    그러다 뭔가 떠올리고 급히 불렀다.

    “아, 잠깐. 기다려보게.”

    “예?”

    “이공녀님의 연회는 보름 뒤에 열리네. 그날은 일정을 비워놓게나. 자네에게 초대장을 보내겠지만,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보름이라.

    ‘그때까진 버틸 수 있겠지.’

    요살마녀의 선천지기는 세맥(細脈)과 낙맥(絡脈)을 포함한 전신 경맥에 녹아들었고, 강엽은 조금씩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걸 완전히 녹여내기 전까진 흡혈욕에 시달릴 일이 없을 터.

    “그리고....”

    총관이 뭔가 말하려다 입맛을 다셨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할 말 끝났으니 가보게. 쭉 건승하게나.”

    * * *

    부하들이 조영옥을 찾아왔다.

    야심한 시간이었지만 조영옥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부하들을 부른 게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알아봤니?”

    “예, 누님.”

    그는 조영옥의 배 다른 동생인 조영빈이었다.

    태화문주 번천광야(翻天狂爺) 조광해는 세 명의 정실 말고도 첩들을 들였는데, 그는 첩실 소생의 서자였다.

    “같이 토벌전에 참여했던 낭인에게 들었습니다. 귀영(鬼影)은 홀로 요살마녀를 죽였답니다.”

    귀영은 낭인들이 강엽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암신의 환술을 보고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 같다 하여 그리 부른 것이다.

    “귀영이라....”

    “그전엔 거산중권과 열화장을 죽였고요.”

    “둘 다 모르겠네. 누구지?”

    “거산중권은 중경 흑도에서 이름 좀 날린 놈이고, 열화장은 투기장에서 오 위 안에 꼽힌 투사였습니다. 열화장은 도망치려고 했다가 걸려서 죽었답니다.”

    “그전의 행적은?”

    “알려진 게 없습니다. 같이 일한 사람들도 몰라요. 근데, 수상할 정도로 밤에만 일한다고 하는군요. 낮에 일하는 걸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답니다.”

    “특이한걸.”

    다만 두 사람은 낮이, 정확히는 햇볕이 강엽의 약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발상일뿐더러, 바로 오늘 아침에 강엽을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영옥은 뭔가 예감을 느끼고 유려한 아미를 찡그렸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더 알아볼까요?”

    조영옥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감춘 사내라면 증언만으로는 알기 힘들지.”

    “낭인전 분타주를 심문하면....”

    “안 돼.”

    단호한 명령이었다.

    사람 한 명 뒷조사하자고 분타주를 건드리는 건 너무 큰 손해였다.

    조영옥이 생각에 잠기자 조영빈이 떫은 얼굴로 물었다.

    “누님, 꼭 그를 영입하셔야 합니까? 주제 넘은 참견인 줄은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밀이 많은 작자는 좀.... 혹시 사대마교의 후예는 아닐지 걱정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태화문 역시 흑도지만, 사대마교는 흑도마저 치를 떠는 비인외도의 마인들이 모인 집단.

    차기 문주를 노리는 그녀로서는 마교와 엮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녀와 경쟁하는 후계자 후보들이 꼬투리를 잡을 테니까.

    ‘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단념하기는 아까운데.’

    강엽을 지나쳤을 때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기운을 너무 완벽하게 숨겼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어렸을 적부터 사람 보는 눈은 좋았던 그녀인지라 강엽의 범상함 속에서 특별함을 느꼈다.

    “걱정 말거라. 마교와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모르고... 당장 영입할 생각은 없단다. 일단은 지켜봐야지. 내 사람으로 만들 가치가 있는지.”

    그녀가 금고를, 정확히는 금고 안에 숨겨진 보물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강한지는 보름 뒤에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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