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6화 (25/450)
  • 6화. 정비 (1)

    요살마녀의 현상금은 강엽의 예상보다 많았다.

    무려 은전 일만 냥이었다.

    “이렇게 많나?”

    한꺼번에 목돈을 쥔 강엽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뒷골목 싸움이나 투기장에서 번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액수였다.

    “거기서 놀라면 섭섭한데?”

    장경이 실실 쪼갰다.

    “뭔데 그래?”

    “듣고 놀라지나 마라. 흑수양이 네게 집을 남겼어.”

    “...뭘?”

    “집. 흑풍사우가 다 함께 살던 집. 네가 돈값 이상의 일을 했는데 줄 게 집밖에 없다더라.”

    흑풍사우는 은퇴했다. 흑수양은 물론 홍일점인 막도희와 큰 부상을 입은 문경우도 함께.

    알고 보니 막도희는 흑수양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고, 문경우는 막도희의 친척 동생이었다.

    죽은 호종산은 두 사람의 고향 형님이었고.

    강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흑수양이 나이가... 좀 많지 않나?”

    “쉰 줄은 넘겼지.”

    “막도희는?”

    “서른은 안 될... 잠깐, 이거 이제 보니 순 도둑놈이잖아!?”

    일전에 헤어졌을 때 낭인의 업을 계속하기엔 너무 늙었다며 한탄했던 흑수양이었다.

    하지만 돈도 많고 여우 같은 마누라도 얻었으니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가 아닐까?

    “부럽냐?”

    “하씨,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졸라게... 에휴, 역시 될 놈은 뭘 해도 되는 건가....”

    “부러우면 여자를 사귀어.”

    장경이 잘생긴 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를 들을 얼굴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모근인데,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대머리는 아니니 괜찮지 않겠는가?

    강엽의 시선이 유난히 반들반들거리는 어딘가로 향한 것을 본 장경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딜 보는 거야?”

    “...딱히?”

    강엽이 딴청을 피웠다.

    잠시 째릿하게 노려본 장경이 물었다.

    “암튼 집은 어떡할 건데?”

    “덥석 받기는 그런데.”

    “하긴 자기가 살 집인데 둘러보고 결정해야지.”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리 목숨을 구해줬어도 집을 받기는 부담스러웠다. 집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역시 공짜로 받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둘러본 뒤에 마음에 들면 값을 치른다고 전해줘.”

    “막도희가 좋아하겠네. 흑수양이 호인이라서 말이야. 마음에 든 사람한텐 막 퍼주는 성격이거든.”

    “그런 것 같긴 했지.”

    강엽이 쓰게 웃었다.

    흑수양은 같이 술을 마셨을 때도 낭인 생활을 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말해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잔소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덕분에 많이 배웠으니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이었다.

    예를 들어 일거리를 고르는 기준이나 의뢰인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아보는 방법 등이 그랬다.

    아무래도 동종업계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다 보니 조언의 무게감도 남달랐다.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 * *

    “괜찮은데.”

    “그렇지?”

    중경 북쪽 평정산(平頂山)의 산기슭이었다.

    마침 말이 나온 김에 강엽은 장경과 함께 흑풍사우가 살았던 집에 들른 것이다.

    동네 야트막한 뒷산이라서 민가에서 그렇게 멀진 않았다. 실제로 주변에 다른 집들도 좀 있었고.

    “다 떠나서 조용한 게 마음에 드는걸. 물론 혼자 살기는 좀 넓긴 한데....”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게, 남는 공간은 그냥 연공실이나 창고로 쓰면 되었다.

    “집값이 얼마라고?”

    “팔천 냥.”

    요살마녀의 현상금을 빼도 이천 냥이 남는다.

    세간살림은 그대로여서 몸만 들어오면 되었다.

    “남은 돈은 전장에 맡겨둘 거지?”

    “그것 말인데.”

    강엽은 잠시 망설였다.

    과연 장경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하지만... 협조받으려면 나도 솔직해져야겠지.’

    처음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흡혈귀의 비밀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자신을 이용하거나 괴물로 취급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하는 한 언제까지나 ‘햇볕에 취약한 약점’을 달고 살 순 없다.

    ‘장경의 도움은 필수다.’

    그런 절실함이 그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혹시 햇볕을 막는 방법이 있을까?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햇볕을... 막아?”

    “그래.”

    “중요한 거냐?”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경도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보기에 그건 네가 낮에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

    “햇볕을 받으면 몸이 아프거든.”

    “혹시 현기증도 나고 그래?”

    “뭐?”

    “아니, 예전에 그런 놈을 본 적이 있어서. 햇볕을 받으면 막 어지럽고 토하고....”

    “...그, 그렇지.”

    강엽이 얼떨결에 긍정하자 장경은 이해했다는 듯이 턱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옳거니. 그런 이유라면 낮에 일하지 못할 만하네. 그래서 햇볕을 막을 방법을 찾는구만? 옷을 두껍게 입으면 안 되나?”

    “한계가 있어.”

    강엽도 여러 시도를 해봤다.

    단순히 옷을 두껍게 입는 것을 넘어 옷의 재질을 바꿔보면서 햇볕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대마포(大麻袍, 삼베)가 가장 효과가 좋아서 면포 아래 여러 겹을 겹쳐입으면 흐린 날씨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강엽이 찾는 것은 근본적인 수단이었다.

    ‘모산혈조의 술법서에도 없었으니.’

    모산혈조의 술법서에 햇볕을 막는 술법이 있었다면 그것부터 익히고 봤을 것이다.

    “진법이나 술법, 혹은 기물... 뭐든 좋아. 햇볕을 막을 수 있는 걸 찾아줬으면 좋겠다.”

    “으음.”

    장경이 턱을 매만졌다.

    “뭔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아는 정보상인이 있으니 그쪽에 알아보지.”

    “...고맙다.”

    말을 하고 보니 편안했다.

    왜 그동안 속으로 앓고만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장경도 강엽이 큰 용기를 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선 최선을 다해 돕기로 마음먹었다.

    “고마우면 술이나 사.”

    “객잔에서?”

    “이런 미친. 사내새끼들 땀내 나는 곳에서 뭔 맛으로 술을 처먹어?”

    “...기루 가자는 말이군.”

    “흐흐.”

    하긴 안 될 것도 없긴 했다. 다만 장경을 데려가자니 다른 사람이 눈에 밟혔다.

    “좋아. 대신 전강도 불러서 가자.”

    “켁! 저, 전강까지?”

    “그럼 너 혼자 농땡이칠 생각이냐? 놀 거면 다 같이 놀아야지.”

    “...그, 그래. 놀 거면 다 같이 놀아야지.”

    장경이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뜻밖에도 전강은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밤늦은 야심한 시간이어도 자리를 비울 순 없었기에 세 사람만의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기루에 가지 못한 장경만 입이 댓발로 튀어나왔다.

    “젠장,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여자 없이 술 마시니 우중충하네.”

    “여태 잘만 마셔놓고 왜 또 그러시오.”

    전강이 푸근하게 웃었다.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는 모습에 강엽은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단순한 부하 상사라고 보기엔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습니까?”

    내밀한 질문이라 대답을 못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강은 선선히 대답했다.

    “나는 장 분타주 가문의 가복이었소.”

    “가복은 개뿔. 그런 거 아니야. 우리 가족은 가복 취급한 적 한 번도 없었어.”

    두 사람의 말은 달랐지만 어쨌든 전강이 장경의 가문에 속한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았다.

    “가복이든 뭐든 허물없는 모습이 보기 좋다.”

    “...술이나 마셔라. 엉?”

    말은 그렇게 해도 장경의 입가엔 객쩍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곧 동지패도 나올 것 같은데... 투기장은 계속 다닐 거냐?”

    “오래 다녀야 한다면서?”

    처음 일을 소개시켜줬을 때 장경 본인이 몇 달은 일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크흠! 그,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솔직히 실력이 아깝잖냐. 요살마녀를 죽인 녀석이 보표일을 하는 게 말이 돼?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볼걸.”

    “그런가?”

    갓 보표일을 했을 때도 비슷한 말이 나오긴 했다.

    이젠 그때보다 명성이 더욱 커졌으니 계속 보표일을 한다면 구설수에 오르리라.

    ‘하긴 그만둘 때가 되긴 했지.’

    투사들의 무공을 훔쳐배워서 알차게 써먹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강해지는 건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더 강해지려면 명사에게 지도를 받거나, 격이 맞는 고수와 싸우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리라.

    “안 그래도 보표일은 관둘 생각이다. 수련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요살마녀의 피를 마셨을 때 깨달았다.

    피에 깃든 막대한 선천지기를 소화시킬 때까지는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비유하자면 너무 많이 먹어 체한 상태와 비슷했다.

    당분간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섭식만 해도 사는 데 지장없다.

    강엽은 이 기회에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흠, 그래. 어차피 그쪽도 네가 오래 일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근데....”

    운화장이 순순히 놔주진 않을 것이다. 요살마녀를 죽인 고수가 아닌가?

    “그쪽에서 태화문에 들어오라고 할 수도 있어.”

    “....”

    “나쁘지는 않겠지. 너만한 고수라면 태화문에서도 중히 쓸 테니까. 대우만 좋다면 낭인으로 굴러먹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나 나가면 손해 아닌가?”

    중경 분타에 있는 낭인들을 긁어모아도 강엽만한 유망주는 없을 터.

    “큭큭, 당연히 손해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근데, 내가 붙잡는다고 나갈 사람이 안 나가겠어?”

    실제로 상단들이나 표국들, 무림 방파들에게 거액의 보수를 약속받고 나간 낭인들도 많았다.

    조금만 명성을 날려도 그러는데 요살마녀를 죽인 강엽은 얼마나 탐스러운 먹잇감처럼 보이겠나.

    “뭐, 걱정 마라. 네가 알아봐달라고 한 건 책임지고 알아봐줄 테니까. 돈은 받겠지만....”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야, 장담하지 마. 그쪽에서 거절하기 힘든 대가를 주면 너도 마음 흔들릴걸?”

    “이미 거절했다.”

    “...어?”

    “물론 요번 일을 나가기 전이긴 한데, 이것저것 챙겨주겠다면서 태화문에 들어오는 게 어떻냐더군. 그래서 싫다고 했지.”

    “대, 대가가 별로였나?”

    “아니.”

    강엽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한 대가였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걸 주지 못했을 뿐.

    “가면 비슷한 제안을 또 듣겠지. 그래도 난 똑같이 대답할 거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와 피를 구할 기회. 이 둘이 충족되지 않으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당장은 낭인전에 있는 것이 이득이라는 생각.

    “차라리 점수 더 쌓고 은패를 따는 게... 뭐야?”

    “아, 아니.”

    장경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네가 그렇게 낭인전에 진심인 줄은 몰라서... 그래, 사내대장부라면 야망이 있어야지! 위로 올라가겠다는 야망이! 안 그러냐!”

    “...?”

    그런 야망 없는데...?

    뭔가 요점이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장경은 호쾌하게 자기 가슴을 두들길 뿐이었다.

    “으하하! 이 장경만 믿어, 인마! 내가 너한테 어? 좋은 일감 팍팍 몰아준다! 넌 은패 올라가고! 난 출세하고! 같이 가즈아아아!”

    “잘 생각하셨소.”

    전강도 흐뭇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

    왠지 자신의 뜻을 잘못 전해진 것 같지만... 강엽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모로 가도 경성만 가면 된다고, 대충 알아먹었으면 되지 않은가?

    ‘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아마도.’

    아님 말고.

    * * *

    장경은 변복을 하고 정보상인을 찾아갔다.

    “오랜만이오, 누님.”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버젓이 장사하고 있는 포목점의 주인이 정보상인이었다.

    가지런히 쌓아둔 원단 앞에 멍하니 앉아있던 여인이 장경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푸핫! 꼴이 왜 그래?”

    평소 허름한 차림새를 고수한 장경답지 않게 귀공자처럼 차려입고 섭선을 살랑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없던 것까지 생겨난 게 아닌가?

    “동생 머리털 가출하지 않았어? 그건 누구 머리털을 빌린 거야? 옷은 또 왜 그래?”

    장경은 가발을 썼던 것이다. 여인이 까르르 웃자 장경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가출이라니... 난 자발적 민머리라니까.”

    “뭐 여자라도 만나러 가니?”

    “그랬으면 좋겠수다. 빌어먹을. 누님 만나려고 변복하고 나온 거요.”

    낭인전 분타주인 장경은 낭인들뿐만 아니라 중경의 무림인들에게도 얼굴이 팔렸기 때문에 평소 모습으로 사람 만나면 눈에 띄기 십상이었다.

    “그나저나 손님은 많소?”

    “보다시피 파리만 날리고 있단다. 우리 가게 원단도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사갈까 몰라.”

    “이 동생이 넉넉하게 사드리지.”

    “어머, 웬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짐짓 과장된 태도로 고개를 숙인 여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그래서 진짜 용건은 뭔데?”

    “혹시 햇볕을 완벽하게 막는 방법 있소?”

    “건물 안에 들어가면 되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에잇, 바깥에 나다니는데 햇볕을 피할 방법이 있냐는 거요. 진법이나 술법이나 귀물 같은 걸로 말이오.”

    “글쎄, 동생이 얘기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진법이라면 있을 거야.”

    “저, 정말로 있소?”

    “응. 흑룡교(黑龍敎)의 진법이지만.”

    “잠깐. 흑룡교라면...?”

    “멸망한 사대마교지.”

    “그놈들의 진법이 햇볕을 막을 수 있소?”

    “아마도.”

    “구할 방법은?”

    “글쎄.”

    “한번 알아봐주시오. 그 진법인지 뭔지가 안 되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찾아주시고.”

    “그러지 뭐.”

    여인이 씩 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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