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5화 (24/450)

5화. 산적 (7)

강엽은 요살마녀의 피로 갈증을 채웠다.

피냄새가 어찌나 달콤한지 이성을 유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신줄을 놓았다면 짐승처럼 게걸스레 피를 탐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효과는 탁월하지만.’

요살마녀의 피를 마신 것만으로 단전의 내공이 두 배로 늘어났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내들의 정기를 빼앗은 요살마녀의 선천지기는 동급의 고수들을 능가한 것이다.

강엽은 요살마녀가 어떤 방법으로 이토록 많은 선천지기를 이룩했는지 몰랐으나, 그녀의 무공과 관련이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가 사람의 피를 마시고 혈공진기를 수련했듯 요살마녀 역시 수많은 업보를 쌓은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나나 그녀나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지.’

타인의 악행을 보면서 자신은 그런 쓰레기는 아니라고, 혼자만 깨끗한 것처럼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 역시 인륜을 저버린 비인외도의 마인일 테니까.

다만 목적과 수단은 구분해야 할 터.

흡혈은 어디까지나 생존 수단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는 흡혈을 함으로써 강해질지라도, 본래의 목적을 혼동해선 안 된다.

힘과 쾌락에 취해 아무나 죽이고 피를 빨면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내다버린 괴물로 전락할 뿐.

그런 삶은 강엽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피를 마시되 이미 죽은 시체나 적의 피만 마신다.... 원칙을 견지하는 게 중요하겠지.’

요살마녀의 목을 베고, 시신은 적당한 곳을 찾아서 경파로 흙을 파낸 다음 묻었다.

마을로 돌아갔을 땐 싸움이 끝났는지 살아남은 낭인들이 땅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

곳곳에 피웅덩이가 지고 시체가 널브러졌지만 피로에 지친 낭인들은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강엽을 발견한 몇 명만 손은 흔들어 아는 체를 할 뿐, 대부분은 대 자로 뻗은 채 피로에 허덕인다.

낭인들 사이를 지나친 강엽은 흑풍사우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한바탕 사투를 치른 그들의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머리가 풀어진 것은 물론,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상처 부위엔 피가 흐른 자국이 역력했다.

강엽은 요살마녀의 피를 마신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흑풍사우의 몸에서 나는 피냄새로 인해 현기증이 났을 테니까.

요살마녀의 목을 보여준 뒤에 말했다.

“약속 지켰다.”

“아... 고마워.”

막도희는 기뻐하지 못했다.

흑수양도 마찬가지였다.

이겼다는 기쁨보다, 복수했다는 기쁨보다 호종산을 잃은 슬픔이 더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경우의 상태도 심각했다.

지붕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다리뼈가 박살났는데, 허리까지 좋지 않았다.

어쩌면 부상을 치료하더라도 더 이상 무공을 쓸 수 없거나 장애가 남겠지.

강엽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암울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어설프게 위로하는 대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산적 두목은?”

“그놈은 죽었네.”

흑수양이 아쉬워했다.

“사로잡았다면 정체를 추궁했을 텐데....”

그럴 기회도 있었다.

막도희가 먼 거리에서 화살로 지원한 덕에 상대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순간, 비웅채주는 살기를 포기하고 동귀어진의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되자 흑수양과 막도희 역시 비웅채주를 생포하겠다는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얘기에 강엽이 입맛을 다시자 흑수양이 의미심장한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단서가 없는 건 아니네.”

“그런 게 있습니까?”

“놈이 마공을 썼을 때 교의 신공 운운했거든. 요살마녀도 놈을 교위라고 불렀고.”

모두 교(敎)라는 말이 들어간 게 우연일 리가 만무했다.

“아마 마교도였을 게야.”

“마교... 말입니까?”

“아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엔 마교라 불리는 놈들이 꽤 많았네. 그중 혈교라는 족속들이 있었지.”

“...!”

강엽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설마 흑수양의 입을 통해 혈교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내가 알기로 교위는 혈교의 직위 중 하나일세. 수많은 마교 중에 혈교만이 교위라는 명칭을 썼지.”

혈교가 창궐했던 시기는 흑수양의 어린 시절이었다.

흉흉한 시절이라 그가 살았던 산골 마을에도 혈교에 대한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을 안 들으면 혈교의 마귀들이 잡으러 올 거라고 겁을 줬을까.

“그럼 이해가 되지. 한낱 산적 소굴에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고수들이 있었는지, 무림공적인 요살마녀가 산적들과 동행하는 것도....”

다만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긴 했다.

“문제는 혈교는 패망했다는 것일세. 삼십여 년 전의 일이지.”

간혹 혈교의 후신을 자처하는 놈들이 나타나서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진짜 혈교의 마공을 쓰는 고수들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놈들도 그런 부류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혈교가 부활했다고 보십니까?”

“글쎄....”

흑수양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강엽은 후자를 의심했다.

그를 흡혈귀로 만든 원흉인 모산혈조가 혈교의 장로 아니던가.

당시 모산혈조를 보좌한 자들 중에 엄청난 고수는 없었지만, 모산혈조가 혈교의 인물인 이상 비웅채의 일을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이렇다 할 말을 못 찾고 무거운 침묵에 빠져있을 때였다.

“흑 선배, 마을 사람들 찾았수다!”

한 낭인이 중요한 소식을 가져왔다.

* * *

모든 산적들이 죽기를 각오한 건 아니었다.

잡졸에 불과한 자들은 요살마녀가 도망치고, 비웅채주가 죽자 전의를 잃고 항복했다.

항복한 자들은 비웅채주의 정체를 몰랐다. 심지어 요살마녀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다.

비웅채주가 주변의 작은 산채들을 굴복시키면서 지금의 비웅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비웅채주의 입장에서 그들은 부리기 편한 장기말일 뿐, 뜻을 같이하는 동료는 아니었으리라.

산적들 역시 두령이 죽자 목숨을 구걸하며 마을 주민들이 잡혀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산 속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일종의 뇌옥이었는데, 산적들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찾아간 낭인들이 구역질을 할 정도로 끔찍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흑수양도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악귀 같은 놈들 같으니....”

마을 주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노인들은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여인들은 산적들의 노리개가 되어 학대당했으며, 사내들은 요살마녀의 먹잇감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정기를 빼앗겼다.

아이들 역시 목숨을 연명할 정도로만 숨을 붙여뒀다.

“심문 끝났어요, 대형.”

막도희가 살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산적들이 마을 주민들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심문하고 있었다.

그 심문이 과격했음은 그녀의 얼굴에 튄 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새끼들, 부모는 죽이고 애들은 노예상인에게 팔려고 했어요. 그 뒤엔 다른 마을로 가려고 했고요.”

강엽이 물었다.

“산적들은 어떻게 했지?”

“전부 죽였어.”

항복한 이들을 죽이는 건 지탄받을 일이지만, 그녀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을 인간 대접해줄 생각이 없었다.

흑수양 역시 미간을 좁히기는 했지만 특별히 나무라지는 않았다.

막도희가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관부에 압송할 생각이었다. 마을 주민들을 해친 산적들은 재판 끝에 사형에 처해졌을 터.

“근데 마을 주민들은 어쩌실 거예요?”

“당연히 구해줘야지.”

엄밀히 말하면 산적들을 토벌한 시점에서 의뢰가 끝난 셈이지만, 측은함을 느낀 낭인들은 군말없이 마을 주민들을 구했다.

피골이 상접한 마을 주민들은 산적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로 나온 중년인은 무장한 낭인들을 보고 겁을 먹으면서도 용기를 내서 예를 갖추었다.

흑수양이 물었다.

“당신이 촌장이오?”

“...아버지께서 촌장이셨지요.”

중년인이 울적해했다.

애써 슬픔을 참는 표정만 봐도 촌장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춘부장의 일은 유감이오.”

흑수양은 중년인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이다.

산적들이 미곡은 물론 소돼지까지 죄다 잡아먹은 바람에 식량이 바닥난 것이다.

산에서 나물을 캐거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걸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낭인들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흑수양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 역시 근처 마을에서 나고 자란 몸. 고향 사람들에게 말하면 약간의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거요.”

“그, 그렇습니까?”

중년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내하기도 전에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 걱정해야 했는데, 흑수양의 말 덕분에 희망이 생긴 기분이었다.

물론 흑수양이 말한 대로 그의 고향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의 고향 역시 산적들에게 수탈당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흑수양이 산적들을 토벌했음을 알리고, 그걸 구실로 협력을 부탁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흑수양은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낭인일을 때려치우고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고향 사람들도 마을에 강한 무인이 있다면 쌍수 들고 환영할 테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

* * *

강엽은 하루 뒤에 마을을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흑수양은 아쉬워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이제는 강엽이 할 만한 일이 없었다.

학대당한 마을 주민들을 보살피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그저 밤이 찾아왔을 때 조용히 불러 술잔을 나누었다.

비웅채주의 목옥에서 술을 찾았던 것이다.

흑수양이 엷게 미소 지었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토벌은 실패했을 거야.”

강엽은 부정하지 않았다.

비웅채주만 있었다면 모를까, 흑풍사우의 힘으로 요살마녀까지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덕분에 저도 얻은 게 많습니다.”

요살마녀의 피를 마시면서 내공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흑수양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강엽은 요살마녀가 쓴 걸로 짐작되는 거처에서 비급을 입수했다.

환희요오공이라 적힌 비급.

미혼술이나 채양보음 같은 것은 배울 가치가 없지만 강엽은 진조의 영성으로 환희요오공의 구결에서 새로운 무학의 이치를 느꼈다.

‘잘하면 혈공진기에 적용할 만한 부분이 있을지도.’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강엽은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는 목내이가 물려준 진조의 영성을 믿었다.

환희요오공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빼내서 적용시킨다면 혈공진기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터.

어쩌면 요살마녀의 피를 마신 것보다 더 큰 수확이 아닐까.

하나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한 흑수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요살마녀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말하나 보군.”

지난날 요살마녀의 악행으로 제자를 잃은 문파들에서 그녀의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던 것이다.

“현상금은 수수료가 들지 않지. 다만 실적에 반영되지는 않네.”

낭인전의 실적은 의뢰에 걸린 돈으로 매겨진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하찮은 의뢰라도 의뢰주가 거액을 걸면 점수가 높다.

반대로 걸린 돈이 많지 않다면 점수가 짜다.

낭인전에게 있어 의뢰는 사업일 뿐, 협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번 의뢰는 어떤 것 같습니까?”

“하하, 동지패로 올라가기엔 충분할 걸세.”

물론 강엽의 실력은 동지패 정도가 아니다.

흑수양은 강엽의 실력이 은지패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자네 실력이라면 나 정도는 금방 추월할 거야. 어쩌면 금패에 닿을지도....”

대륙 전역에 분타를 둔 낭인전이지만 금패급의 낭인은 한 줌에 불과하다.

사실 금패급쯤 되면 구대문파나 팔대세가의 최정예 수준이었다.

“나는 은지패지. 하지만 그건 내가 오랫동안 낭인전에 몸 담았기 때문일 뿐. 순수하게 실력만 놓고 보면 나보다 강한 놈들이 수두룩해.”

하물며 한 단계 윗줄인 은천패나 그 이상인 금패급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화산파에 매화검수라는 자들이 있네.”

구파인 화산파의 일대제자들 중 무력으로 손에 꼽히는 고수들.

“과거 금인패의 낭인 하나가 매화검수와 겨룬 적이 있었는데, 천 초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더군.”

금패급에서 가장 약한 금인패가 매화검수와 동수를 이루었는데 금지패나 금천패는 얼마나 강하겠는가?

“금지패쯤 되면 사실상 구파의 장로급, 그리고 금천패급 되면 장문인과도 비벼볼 수 있다고 하더군. 물론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지. 어디까지나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이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낭인전의 정점에 군림한 낭왕께선 천하팔존(天下八尊), 즉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절대고수 중의 한 분이라는 것.”

“....”

천하팔존이니 구파 장문인이니 하는 얘기를 들어봤자 실감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강엽의 가슴에 강한 울림을 주었다.

“자네가 어디까지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풍파에 휩쓸리는 사람이 되지 말게. 차라리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게나. 중심을 단단히 잡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