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산적 (3)
흑수양은 서둘렀다.
마을에 도착한지 한 시진도 안 되어 커다란 배를 수소문해서 오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붉게 물든 노을을 배경으로, 옥색의 강에 부딪친 햇살이 별빛처럼 부서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넋을 잃을 만한 절경이었다.
하나 그걸 즐기는 사람들은 없었다.
싸울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낭인들은 풀잎을 질겅질겅 씹거나 면사포로 칼날을 닦을 뿐.
일부 말 많은 작자들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에 동참하고 있었다.
강엽은 그들보다 더 심했다.
머리까지 두건을 푹 눌러쓰고 죽립까지 뒤덮은 행색으로, 그나마 볕이 덜 드는 뱃전 구석에 구겨지다시피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몇몇 낭인들이 해괴하게 바라봤지만, 강엽은 변명을 주워섬길 정신머리도 없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도 인두로 지저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일전에 햇볕에 노출되었을 때처럼 연기가 나진 않았지만 화상을 입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나마 혈공진기가 성장해서 이렇게라도 버티는 거지.’
처음에 햇볕에 노출되어 부상을 입었을 땐 혈공진기를 깨우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모산혈조를 따른 흑포무인을 죽이고 그 피를 흡혈했을 때 비로소 혈공진기를 깨우쳤다.
중경에 와서 낭인전의 낭인으로 활동한지도 어언 두 달.
꾸준히 무림인들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단전에 깃든 혈공진기는 많이 성장했다.
치이익!
‘그래도 아직은... 많이 멀었어.’
예전에 비하면 조금 나아졌지만 햇볕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다.
“이봐, 괜찮나?”
“끙끙 앓는 것 같은데.”
나름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가까운 곳에 있는 낭인들은 들은 모양이었다.
“괜...찮다.”
괜찮은 사람의 목소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낭인들은 흑수양에게 말해야 할지 헷갈렸다.
강엽이 다시 말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져.”
“뭐 배탈이라도 났나 보구먼.”
이를 악문 강엽은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다행히 태양이 서녘으로 기울고 있는 데다 산들이 햇볕을 가려준 덕에 밤은 금방 찾아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강엽은 고통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서야 두건과 죽립을 벗었다.
검게 물든 강과 밤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후....”
강엽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만졌다.
좀 전까지 화상을 입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피부가 느껴진다.
다만 식은땀에 절어있는 데다 얼굴은 허옇게 질려있고, 눈가는 퀭해서 병자처럼 보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 흑수양이 다가왔다.
“괜찮나?”
강엽이 아프다고 생각한 낭인들 중 한 명이 쪼르르 달려가서 미주알고주알 떠든 것이다.
“부상을 당한 것 같진 않은데....”
“문제 없습니다.”
따끔한 고통이 조금 남아있긴 해도, 숨 몇 번 쉴 동안에 강엽은 신색을 되찾았다.
“아프면 돌아가는 게 어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끼치지 말고.”
흑풍사우의 막도희가 비아냥거렸다.
첫 만남부터 미운털이 박혔기에 꼬투리를 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흑수양이 타박했다.
“넌 또 왜 그러는 게야?”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뭘 잘못 처먹었는지 몰라도 아프면 쉬어야죠.”
흑수양은 부정하지 못했다.
가시가 돋긴 했어도 막도희의 말 자체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배 위에 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을 건넜는데 이제 와서 배를 돌리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강엽.”
“전 정말 괜찮습니다. 의뢰를 수행하지 못할 만큼 아프면 알아서 빠지겠습니다.”
결국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머리가 약간 젖은 것 말고는 무탈한 것처럼 보였기에 흑수양도 강엽을 말리지 못했다.
게다가 한 명의 전력이 아쉬운 상태에서 강엽이 빠지는 것은 정말로 큰 손실이었다.
“...알겠네. 하나 돈 때문에 괜한 고집은 부리지 말도록. 싸움이 시작되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강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흑수양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흑풍사우의 다른 이들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반대를 하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안간 흑수양이 눈을 빛냈다.
“도착했군.”
* * *
그들을 태운 배는 돌아갔다.
오강을 오가며 사람들을 싣어나르는 배는 원래 이 밤에 강물을 거슬러 오를 계획은 없었다.
그저 흑수양이 객잔에 쉬고 있는 뱃사람들을 찾아가서 정중히 부탁했기에 들어준 것뿐.
산적이 활동하는 영역과 뱃사람의 영역이 다르긴 해도 그들 역시 수적에게 뜯긴 경험이 있는 데다 흑수양의 부탁이 워낙 간곡했기에 들어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산적들이 점거한 마을로 들어간다.”
낭인들을 모은 흑수양이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산적들의 머릿수는 최소한 백여 명. 어쩌면 그보다 많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우리가 훨씬 강하다고 믿네. 게다가 야밤에 기습하니 산적들 역시 허를 찔릴 터.”
이제부턴 도보로 가야 하는 거리였다.
마을까지의 거리는 삼십 리쯤.
무릉산맥의 줄기를 두고 작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있었는데, 산적들이 점거한 마을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릴 잡고 있었다.
야밤에 산길을 타는 게 위험하긴 해도 이쪽이 고향인 흑수양은 비교적 안전한 길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인도 하에 낭인들이 산길을 타니 사경 무렵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기슭을 계단처럼 깎은 논밭 위에 백 호쯤 될 법한 제법 큰 마을이 있었다.
나무를 잘라만든 목책이 마을을 두르고 있었으며,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까지 곳곳에 있다.
목책이라면 산짐승을 막기 위해 만들 수 있다고 쳐도 망루까지 있는 건 상식적이지 않았다.
필시 산적들이 토벌대를 염려하여 만들었을 터.
“보초를 세워뒀군....”
흑수양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목책과 망루를 만들었는데 보초를 세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졸려하는 기색 없이 똑바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서인지 다른 보초들과 얘기를 나누긴 해도 경계를 소홀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형, 어찌하오? 놈들이 졸 때까지 기다리우?”
흑풍사우의 둘째인 호종산이 물었다.
흑수양은 고민에 잠겼다.
‘보초들을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망루에 있는 인원까지 합치면 숫자가 많다.’
자칫 실수하면 들킬 판이다.
혹여 토벌대가 왔다는 소식이 산적들의 귀에 들어갈까 봐 서둘러서 왔는데, 겨우 문전을 앞두고 기습의 이점을 포기할 순 없었다.
“대형, 제가 망루에 있는 놈들을 쏠게요.”
“들키지 않고 전부 죽일 자신 있느냐?”
막도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고작 백 호 남짓한 마을을 둘러싼 목책에 망루가 네 개나 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궁의 달인이니 야음 속에서도 멀리 있는 보초를 화살로 쏴맞힐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보초가 소리를 낸다면?
그땐 다른 보초들까지 적이 왔음을 알고 산채에 그 사실을 알릴 것이다.
그 시점에서 기습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럼 어떡할거요, 선배?”
다른 낭인이 물었다.
흑수양은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긁적이다 낭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가 한 놈 정도는 암기를 던져서 죽일 수 있을 것 같네. 자네들 중에 암기에 능한 사람이 있나?”
“....”
다들 눈치만 볼 뿐 손을 들지 않았다.
그들이 숨은 논두렁에서 목책까지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암기로 적을 죽이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였다.
흑수양도 답답한 마음에 물어봤지만 암기의 명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강엽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은신술을 쓸 줄 압니다.”
암신을 쓰면 어렵지 않다.
어둠과 동화되어 몰래 접근하면 보초들의 멱을 따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암신의 효능을 일일이 설명할 순 없으니 은신술로 퉁쳤다.
“...증명할 수 있나?”
지금 여기서 해보라는 뜻이다.
강엽이 암신을 펼치자 낭인들은 괴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그들의 앞에 강엽이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밤의 어둠과 섞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예 숨은 건 아닌데?’
존재감이 흐려졌으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막도희가 코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별거 없잖아. 별 이상한 잡재주로....”
빈정거림은 이어지지 않았다.
싸늘한 한기가 뒷목에 닿는 순간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계속 떠들어보지 그러나?”
“헙!”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강엽을 뻔히 보고 있던 낭인들 모두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헛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앞에 있었던 강엽이 어느새 막도희의 배후로 돌아가서 그녀의 목에 화살촉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갖고 있던 화살이었다.
“어, 언제...!”
“처음부터. 그래도 한 명쯤은 간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군.”
강엽이 생각한 사람은 흑수양이었다.
하나 흑수양조차 막도희의 뒤에 나타난 강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강엽이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아무도 그의 살수를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방금 그게... 자네 은신술인가?”
“이 정도면 대답이 됐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대답이 되었다 뿐일까.
바로 앞에 있었던 강엽의 움직임을 놓친 시점에서 낭인들은 이의를 제기할 자격을 잃었다.
흑수양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부탁하지.”
앞서 얘기한 대로 그와 막도희가 각각 한 명씩 맡기로 했다.
강엽도 굳이 자기가 다 하겠다고 하진 않았다.
조용히 어둠 속에 녹아든 채 경공을 전개해 단숨에 목책을 넘어 망루에 올랐다.
막도희가 그랬듯 망루를 지키는 보초는 바로 뒤에 강엽이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강엽은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보초의 목을 그었다.
“...!”
부지불식간에 닥친 죽음의 손길에 당황한 보초가 발버둥친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쥔 손으로 인해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속에서만 메아리쳤다.
강엽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보초를 뉘이고, 곧장 옆의 망루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때맞춰 흑수양이 던진 암기와 막도희가 쏜 화살이 망루를 지키는 보초들을 꿰뚫었다.
두 사람 모두 첫 공격으로 보초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막도희가 맡은 보초였다.
가슴에 화살을 맞았음에도 즉사하지 않은 것이다.
보초가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잡고 답답한 신음을 토하다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앗!”
실수를 저지른 막도희가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뱉을 때였다.
두 번째 보초를 해치운 강엽이 떨어지는 시체를 낚아채서 조용히 땅에 내려놨다.
목책에 가려졌기 때문에 막도희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입구를 지키는 보초들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였다.
강엽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막도희의 심사는 복잡해졌다.
첫 만남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지껏 시비를 걸었던 놈에게 뒤를 잡힌 것도 모자라 도움까지 받다니.
이래서야 업계 선배를 자처할 자격이 없지 않나.
강엽이 그동안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비웃었을까 생각하니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빌어먹을....’
* * *
입구를 지키는 보초들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강엽은 그들이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은밀히 배후를 점하면서 한 놈의 목을 틀어쥐었다.
뼈가 뚝 부러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보초가 허물어지자 옆에 있던 동료가 식겁했다.
그제야 적이 왔다는 것을 알고 호각을 꺼냈다.
그렇게 호각을 불려는 찰나.
쐐액!
밤하늘을 가르면서 날아온 화살이 몸통에 꽂히면서 보초가 크게 주춤거렸다.
“커헉!”
강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뛰어들어 주먹을 꽂는다.
딱히 힘조절을 하지 않았기에 흡혈귀의 괴력을 고스란히 맞은 보초의 안면이 참혹하게 뭉개졌다.
주먹에 묻은 피를 힐끔거린 강엽은 낭인들을 등진 채 입가를 훔치는 척 피를 핥았다.
거산중권이나 열화장의 피보단 못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굴러먹은 칼잡이들보단 선천지기가 풍부했다.
‘그놈들보다는 강한 건가?’
강엽이 낭인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입구를 제압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