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0화 (19/450)

5화. 산적 (2)

“얘기는 해봤냐?”

“의뢰를 하기로 했다.”

강엽은 흑수양과 나눈 얘기를 들려주면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넌 그렇다 치고 전강도 많이 신뢰받던데.”

전강이 평범한 점소이가 아니라는 건 바윗덩이처럼 잘 짜인 거구의 근육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은패급 낭인이 그 정도로 굳건히 신뢰할 만큼 고강할 줄은 몰랐다.

“흐흐, 전강이 난동을 피우는 놈들을 제압한 적이 있거든.”

대부분의 낭인들은 제멋대로다.

전부가 그렇진 않더라도 그런 부류가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제대로 말하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일단 들이받고 보는 미친놈들이었다.

“아까 흑풍사우랑 말다툼을 벌였다고 했지? 그 정도면 굉장히 온건한 편이야.”

인내심이 짧은 낭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낭인놈들이 자기가 무시받았다고 생각하면 주먹부터 날리지. 맛간 놈들은 분타주고 뭐고 들이받고 보는 거야.”

“너한테도 그런다고?”

아무리 낭인전의 규율이 느슨하다지만 분타주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강엽이 할 말을 잃자 장경이 킬킬거렸다.

“뭣도 모르는 애송이들이지. 그런 짓을 한 놈들은 전강이 죄다 제압해서 저 너머로 던져버리는데 말이야.”

장경은 그렇게 말하며 입구를 가리켰다.

“...오늘은 안 보이는군.”

“잠깐 일이 있어서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의뢰를 나가있는 동안 집을 알아봐줄 수 있나?”

처음엔 언제 중경을 떠날지 몰라서 객잔을 잡았지만, 객잔에서 장기 투숙을 하는 건 생각보다 불편했다.

일단 공간이 협소해서 수련하는 게 여의치 않았다.

낮에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무엇보다 나갈 때마다 혹시 좀도둑이 들어와서 방에 숨겨둔 모산파의 술법서를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 도둑이 들어온다면 술법서보다는 푼돈을 노리겠지만 말이지.’

어쨌든 당장 떠나지 않을 거라면 월세라도 집을 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경에 부탁을 한 것이다.

분타주의 업무는 낭인들에게 의뢰를 알선하는 것이지만, 낭인들이 의뢰에만 집중하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도 맡고 있으니까.

당연히 공짜는 아니었다.

“돈만 낸다면야 뭔들 안 될까. 수련할 공간이 딸린 집이 필요하겠지? 월세?”

“그래.”

“흠, 크기나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은전 서른 냥은 든다고 보면 돼.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소문난 데는 그보다 싸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집은 좀 그렇지?”

“연공실만 있다면 상관없어.”

과연 귀신이 나와도 흡혈귀를 위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모산파의 술법에 귀신을 다루는 것도 있는 것 같던데....’

술법만 쓸 수 있다면 귀신 나오는 집에 살아도 나쁘지 않았다.

장경이 두터운 턱을 쓸었다.

“매물이 좀 있긴 한데...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라서 한번 알아봐야겠다.”

“부탁하지.”

강엽은 당부의 말을 남기고 객잔을 나왔다.

* * *

강엽이 중경을 나온 건 다음날 날이 저물 무렵이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면서 강엽은 이전과는 달리 당당히 중경의 성문을 통과했다.

중경의 관병들은 강엽을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무더운 여름에도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두꺼운 흑의로 감싼 강엽을 이상하게 쳐다볼 뿐.

강엽은 구구절절 변명하는 대신 죽립을 머리에 쓰고 관도를 따라 밤길을 거닐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 달리기 시작했다.

중경에서 팽수현까지는 팔백 리.

‘제때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말을 타면 시간을 아낄 수 있겠지만, 그는 가난한 유생이었는지라 기마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흡혈귀의 육체능력을 십분 활용한다면 웬만한 준마보다 빠르게 내달릴 수 있었다.

강엽은 이것도 수련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동패무고에서 읽은 경공 비급의 구결을 떠올리며 혈공진기를 발바닥의 혈자리로 인도했다.

처음엔 어설퍼도 하면 할수록 익숙해져서, 한 시진이 지날 때쯤엔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지면을 쭉쭉 미끄러지고 있었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암신을 같이 쓰면 어떻게 될까?’

암신은 상대의 감각을 현혹하는 환술이다.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그런 식으로 작용할 뿐, 상대를 속이는 것은 암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과 동화되는 것이야말로 암신의 본질이다.

과연 암신과 경공을 같이 펼치면 어찌 될지 자못 궁금해진 강엽은 호기심을 참지 않았다.

암신을 펼친 그의 몸이 시커먼 어둠에 녹아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기감이 한층 예민해지며 멀리까지 감각이 닿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오 장, 십 장, 그 너머까지...!

‘최대 이십 장. 지금은 이게 한계인 것 같군.’

그 이상은 감각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큰 이점이었다.

달리는 와중에 기습을 받는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강엽의 경공은 매끄럽게 이어졌기 때문에 웬만한 준마보다 빨리 달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빼면 모조리 경공을 쓰며 내달린 강엽은 세 시진이 지나서야 이름 모를 깊은 야산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응달진 곳을 찾아서 푹 쉬었다가 날이 저물면 다시 내달릴 생각이었다.

물주머니에 담은 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볕이 들지 않는 바위 틈새를 찾아 몸을 뉘였다.

그리고 적당히 쉬다가 가부좌를 틀었다.

목내이가 물려준 혈공진기는 특별히 운기조식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경맥을 주천한다.

말하자면 동공(動功)이라 할 수 있었다.

알아서 움직이니 구태여 따로 운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강엽은 틈이 날 때마다 혈공진기를 운기했다.

내부의 경맥을 관조하면서 혈공진기를 갈고 닦을수록 진기를 다루는 기감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반사신경이나 육체를 통제하는 감각 역시 함께 발전했다.

기실 흡혈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엽은 몸 쓰는 재주가 일절 없는 몸치였다.

하지만 흡혈귀가 되고, 혈공진기를 수련한 뒤로는 어떤 어려운 동작이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때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기민하게 반응했다.

‘너무 달라져서 내 몸 같지가 않단 말이지.’

예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피를 마시는 괴물이 된 대가로 괴물같은 재능을 얻은 것이다.

흡혈귀가 되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으니 이 정도쯤은 해줘야 덜 억울했다.

그렇게 수련하기를 한참.

정확히 여섯 시진이 지나서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강엽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팽수현은 운남의 운귀고원에서 발원한 오강이 지나는 곳에 자릴 잡고 있었다.

산길을 주파했던 강엽은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넓은 물줄기를 보고 직감적으로 오강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뒤부터는 강변을 끼고 움직였다.

오강이 이정표가 되어준 덕에 방향을 잡기는 쉬웠다.

덕분에 동이 트기 전에 합류하기로 약속한 한가진이라는 마을에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딱 봐도 마을 분위기는 흉흉했다.

가까운 곳에 커다란 산적 무리가 떡하니 자릴 잡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니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도착한 건가?’

하긴 흑풍사우는 낭인들을 모은다고 했으니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만나기로 한 객잔에 들어간 강엽은 볕이 적게 드는 방에 짐을 풀고 한숨 늘어지게 잤다.

그렇게 한창 자고 있자니 별안간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강엽은 누군가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눈을 떴다.

창문에 암막을 쳐서 바깥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씩 볕이 들이치는 걸로 봐서는 아직 한낮이리라.

“문경우다. 대형께서 널 부르신다. 아래로 내려오도록.”

이틀 전 청송객잔에서 만난 흑풍사우의 막내였다.

강엽은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알았어. 곧 간다고 전해라.”

실내이기는 해도 창문을 통해 볕이 들이치는 만큼 강엽은 옷을 단단히 둘렀다.

목 위쪽까진 완전히 가리고, 손에도 장갑을 끼고, 마지막으로 피풍의에 달린 두건을 눌러써서 피부가 햇볕에 닿지 않도록 했다.

‘끄응, 이렇게 해도 완전히 막진 못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의뢰는 이래서 불편하다.

완전 무장을 한 강엽이 일층의 식당으로 내려가자 무기를 휴대한 무리의 시선이 모였다.

청송객잔에서 몇 번 봤던 낭인들의 면면을 확인한 강엽은 흑수양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창 단잠을 자던 것 같은데 깨워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한데 이게 전부입니까?”

흑풍사우와 강엽을 포함해도 스무 명 가량이었다.

짧은 시간에 급히 사람을 모으다 보니 이 정도가 한계였던 모양이다.

흑수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됐네.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이보단 많이 모았겠지만....”

하나 아무리 급해도 이미 의뢰를 하고 있는 사람이나 어중이떠중이를 데려갈 수는 없지 않나.

따지고 보면 낭인전에 들어오자마자 거산중권을 잡은 강엽이 비상식적인 거지, 원래 동인패급의 낭인들은 무림인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부류였다.

“아니, 시벌! 우리면 충분하지! 산적 나부랭이쯤은 몇 놈이든 거뜬하다고, 흑 선배!”

“고럼! 그 말 취소해라, 애송이!”

낭인들이 이죽거리며 야유를 퍼부었다.

흉악한 산적들을 상대하는데도 여유로운 게 비슷한 의뢰를 해본 경험이 많은 것 같았다.

더러는 강엽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나저나 저 친구가 거산중권 그 씹새를 죽였다고? 생각보단 비리비리하게 생겼는걸.”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소문으론 그 인왕(仁王)이 추천했다고 하던데....”

“인왕?”

강엽이 처음 듣는 별호에 고개를 갸웃하자 흑수양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전강 그 친구의 별명이지. 장 분타주가 곤란을 겪거나 청송객잔에서 싸움질이 벌어질 때마다 전강이 나타나서 진압해버렸거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처럼 분타주와 청송객잔을 지킨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었다.

“게다가 누가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어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싸움이 나더라도 상대방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만 제압하지. 인왕이라는 별명이 붙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렇군요.”

아무래도 자신이 막연히 생각하던 이상으로 전강이 굉장한 고수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날 인정해줬단 말이지....’

거산중권을 죽여서 그런 걸까?

강엽은 나중에 청송객잔에 돌아가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짝짝!

박수와 함께 흑수양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들 날 따라와줘서 고맙네.”

흑풍사우, 특히 은지패인 흑수양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경력이 길었다.

강엽은 몰랐지만 중경 분타의 낭인들 중에 흑수양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다들 크고 작은 빚을 진 만큼 같이 산적들을 토벌하자는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일부는 원래 하기로 했던 의뢰를 미루거나 취소하면서까지 달려온 마당이었다.

“우리는 저 무릉산맥의 어딘가에 똬리를 튼 산적놈들을 박멸할 걸세. 일전에 말했듯 놈들은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고 이 주변을 약탈했네.”

모든 낭인들이 협을 추종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돈만 준다면 위험한 격전지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게 낭인이라는 족속이었다.

하물며 흑수양은 그들을 여러모로 도와준 선배였던 만큼 돈은 필요없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흑수양은 그들이 사양한다고 해서 돈을 떼어먹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후배 낭인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으리라.

“평범한 산적들이 아닌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야. 그래도 힘을 모으면 이길 수 있을 터. 난 우리가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당연하고말고! 우리가 누구인데! 선배랑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수다!”

“오오!”

낭인들이 환호한다.

이제 합류한 강엽조차 흑수양이 낭인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런 점은 본받을 만하군.’

흑수양처럼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그로서는 다른 낭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으니.

다만 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훗날 도움을 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괴물이 되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을 홀로 살 필요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