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9화 (18/450)
  • 5화. 산적 (1)

    사건이 종결되고 두 달이 흘렀다.

    운화장은 사건을 공표하진 않았다. 자칫하면 투사들이 동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문은 알음알음 퍼졌기에 보표들은 일하는 와중에도 강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정작 강엽은 무관심했다.

    ‘음... 투로를 저런 식으로 연결할 수도 있었군?’

    투사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적수공권을 쓰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눈이 빠지도록 자세히 관찰했다.

    열화장과의 싸움으로 무공에 더 열의를 갖게 된 것이다.

    힘과 속도에서 앞섰는데도 내상을 입은 열화장을 압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돌이켜보면 거산중권이나 빙궁의 아설하, 모산혈조를 따랐던 흑포무인도 마찬가지였다.

    흡혈귀의 능력만 믿고 싸우기엔 강호무림에 너무나 많은 강적들이 살고 있었다.

    강적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도산검림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시도 안주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배우고 강해지기 위해서 투사들이 주먹을 쥐는 자세, 손을 뻗는 방향, 무릎의 각도, 발을 내딛는 법 등등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흡수한다.

    그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왜 그러한 선택을 내렸는지, 후속대처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운화장에 출근한 지 어언 두 달.

    그동안 강엽은 투사들의 싸움을 보면서 그들의 무공을 훔쳐배우고 있었다.

    남의 무공을 본다고 따라하거나 터득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강엽은 비상식적인 짓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본 것을 모두 터득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 안에서 배울 만한 것들을 간추려서 남몰래 연습하고 있었다.

    이는 강엽이 흡혈귀라서가 아니라, 진조의 후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산혈조의 술법서를 봤을 때도 느꼈지만, 목내이에게 물려받은 진조의 영성은 그에게 무궁무진한 재능을 안겨주었다.

    지식을 갖추고 견문을 넓히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정도로.

    이제 강엽은 피를 먹을 때를 빼면 자나 깨나 무공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부족해. 시습(時習)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우면 실천하라는 논어의 구절이다.

    실전을 겪어봐야 실수를 깨닫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법.

    강엽은 당장 투기장에 뛰어들어 투사들과 무공을 견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지만, 그전에 사회자의 일장연설이 투기장을 울렸다.

    “아쉽지만 금일 결투는 이걸로 마무리됩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귀중품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보표들의 안내를 따라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투기장이 파하고, 관객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자리를 떠난다.

    오늘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강엽 역시 다른 때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드디어 휴식기로군.

    “한동안은 푹 잘 수 있겠어.”

    투사들도 휴식이 필요하거니와, 운화장 역시 새로운 투사들을 들여와야 하는 시점이다.

    관객들 역시 같은 사람이 계속 싸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지겨움을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투사들을 들여오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 휴식기가 거의 보름이나 이어지기 때문에 그동안은 보표들의 업무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표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강엽만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휴식기엔 투사들의 싸움을 견식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를 구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다들 힘들어하는 분위기에서 투덜대자니....

    ‘그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지.’

    강엽은 쓰게 웃었다.

    그러나 피를 구할 수 없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장경에게 말은 해뒀지만 조건에 맞는 의뢰를 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장경 역시 시일이 걸릴 수 있다고 한 만큼, 강엽은 여차하면 다른 분타로 가는 것도 염두에 뒀다.

    * * *

    늦은 새벽에도 장경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강엽은 장경이 언제 쉬는지 궁금해졌다.

    전강과 함께 일하니 번갈아가며 쉬는 것도 아닐 텐데 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혹시 낮엔 객잔을 닫나?”

    “뭔 뜬금없는 소리여?”

    “밤에 일하면 낮엔 쉬는 건가 싶어서.”

    오자마자 이상한 소리부터 하는 강엽의 모습에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고개를 갸웃했던 장경은 그제야 강엽의 말뜻을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뭐, 낮엔 쉬지. 그땐 다른 점소이 녀석이 객잔을 본다. 그래봤자 간단한 음식만 팔지만.”

    어차피 낮에 파는 음식이래봤자 허여멀건한 닭죽이 전부라서 어지간히 돈이 없는 게 아니면 굳이 객잔에서 밥 먹는 사람이 없었다.

    “참고로 나도 낮엔 우리 객잔 밥 안 먹는다.”

    “...참 자랑이다.”

    객잔의 주인장이란 놈이 자기네 객잔밥이 맛없다고 대놓고 떠벌리다니.

    강엽이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는데도 장경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 당당했다.

    “그래도 밤엔 제대로 된 음식이 나와. 왜냐하면 전강이 요리하니까!”

    자기 객잔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태도였다.

    헛웃음을 흘린 강엽이 화제를 바꿨다.

    “의뢰는?”

    “아, 그것 말이지.”

    장경이 식당에서 밥 먹는 누군가를 불렀다.

    “이봐, 기다리던 사람 왔다!”

    그 말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낭인들 중에 한 명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뭐냐.”

    “뭐겠냐. 이쪽으로 와달란 뜻이지. 흑풍사우(黑風四友)가 낭인들을 모집하고 있어.”

    “잠깐. 흑풍사우라면....”

    중경 분타에 속한 낭인들은 많다.

    하지만 흑풍사우는 강엽도 몇 번이나 들어본 이름으로 전원이 은패급의 낭인들이었다.

    가장 낮은 은인패조차 강호에서는 일류고수로 대접받으며, 실제로 그만한 실력을 지녔다.

    흑풍사우는 대형인 흑풍도 흑수양이 은지패의 실력자였고, 나머지는 전원 은인패였다.

    “일단 가봐. 네 구미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하더라도 들어는 봐야 할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엽이 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흑풍사우가 앉은 탁자로 자리를 옮기자 손을 흔든 중년인이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드디어 만나는구만. 자네 소문은 많이 들었어. 거산중권을 잡았다지? 아, 서 있지 말고 앉게. 난 흑수양이라고 하네. 낭인전의 친구들은 과분하게도 흑풍도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지.”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흑풍사우의 대형인 흑수양은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럼에도 흑수양은 소탈한 태도로 강엽의 손에 잔을 쥐여주고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잠시 상대를 어찌 대할지 고민했던 강엽은 술잔을 내려놓고 정중하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강엽입니다.”

    뒤이어 흑풍사우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자 다들 짧게 자기 이름을 내뱉었다.

    “호종산이라고 하는구만.”

    “...막도희.”

    “문경우다.”

    개성적인 조합이었다.

    호종산은 낭인답지 않은 통통한 체구에 큼직한 도끼를 낀 채 술을 마시고 있었고, 흑풍사우의 유일한 홍일점인 막도희는 활과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나이가 어린 문경우만 흑수양과 비슷하게 유엽도를 패용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다시 흑수양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을 나갔다고 들었는데 배가 고프진 않나? 넉넉하게 시켰으니 같이 들어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흡혈귀가 된 뒤로 입맛이 변했다.

    단맛이나 짠맛 등 맛을 느끼는 미각은 그대로이되, 강엽은 더 이상 다양한 맛이 자아내는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

    오로지 선천지기가 충만한 고수의 피를 마실 때만 고양감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

    ‘먹을 수는 있고 소화도 할 수 있지만... 먹어봤자 내 몸에 아무런 효과가 없지.’

    고기나 쌀밥을 먹어도 피를 마시지 못하면 결국 갈증에 시달리다 흡혈욕이 폭주할 뿐.

    이미 자신의 몸으로 겪어봤기에 강엽은 요 두 달간 피 말고는 아무것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강엽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감지한 흑수양은 입맛을 다시면서 용건을 꺼냈다.

    “장 분타주가 잠깐 얘기한 것 같지만 다시 설명하겠네. 얼마 전부터 우린 낭인들을 모으고 있네.”

    흑수양의 설명은 이러했다.

    인근을 지나는 상인들을 통해 소문이 퍼졌다.

    중경에서 팔백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팽수현(彭水縣)에 커다란 산적 소굴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팽수현엔 묘족이나 투가족 등 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힘없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적들은 그 점을 노려 마을을 점거하고 패악질을 일삼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잔인하게 죽인다고 하더군. 살인, 약탈, 강간... 그놈들은 도를 넘었네. 문제는 그놈들이 무공을 익혀서 토벌하기 어렵다는 거야. 특히 우두머리의 무공이 상당하다고 들었네.”

    “그래서 실력 있는 낭인들을 모은다는 겁니까?”

    “그렇지.”

    “의뢰비가 감당이 된답니까?”

    산적들의 폭거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분명히 정의롭고 가치있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낭인들은 협객이 아니다.

    “산골 마을이라면 가진 재산이 넉넉하지 않을 터. 그나마 있는 것도 산적들에게 다 빼앗겼을 겁니다. 낭인을 얼마나 모으려는 건지는 몰라도 마을 사람들의 재산으로는 의뢰비를 못 맞출 것 같습니다만.”

    “걱정하지 말게.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어차피 강엽은 돈 때문에 낭인을 하는 건 아닌 만큼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흑수양은 엄지를 척 치켜들더니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내가 낼 거거든.”

    “...어째서 그런 일을?”

    가장 낮은 동인패의 낭인을 고용하려고 해도 은전 열 냥이 깨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 위의 동지패와 동천패쯤 되면 두 배, 세 배로 뛰니 보수적으로 잡아도 수백 냥이 깨질 각오를 해야 한다.

    흑수양이 은패 등급의 낭인으로서 재산을 꽤 모았다고 해도 상당한 지출일 터.

    굳이 사비를 내면서까지 낭인들을 모집하고, 산적들을 치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내 고향이거든.”

    “산적들이 점령한 마을이 말입니까?”

    “거기 말고 다른 곳. 하지만... 그 마을도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멀진 않지.”

    산적들이 마을을 가리지 않고 난장을 피웠다면 흑수양의 고향도 화를 입었을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고향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모른 척할 만큼 흑수양은 매몰차지 못했다.

    “게다가 나도 슬슬 낙향할 생각이거든. 애먼 놈들이 고향을 짓밟으면 내 야무진 은퇴 계획이 망하지 않겠나?”

    흑수양의 뜻은 알았다.

    그가 왜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낭인들을 모집하는지까지도 이해했다.

    “전 동인패입니다만.”

    “거산중권을 잡은 동인패지. 그만하면 사실상 은패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낭인은 몇 명입니까?”

    “자네까지 포함하면 열하나. 좀 더 모으는 대로 출발할 예정이야. 의뢰비는 은전 백 냥씩 주겠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후한 의뢰비였다.

    이만하면 은퇴 후 낙향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작정하고 돈을 풀었다고 봐야 하리라.

    그러나 강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어도 낮에 싸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감안하면 섣불리 확답을 줄 순 없었다.

    그러자 흑수양이 기억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깜빡할 뻔했군. 당연히 우리도 대낮부터 공격할 생각은 없네. 날이 저물면 기습할 거야. 충분한 인원이 모이면 함께 중경을 나가서....”

    “팽수현에서 합류한다면 의뢰를 받겠습니다.”

    야음을 틈타 이동한 다음 적절한 시기를 봐서 합류하면 산적 토벌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

    만약 흑수양이 거절한다면 강엽은 미련없이 다른 의뢰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신입 주제에 건방지네.”

    흑풍사우의 다른 사람들이 불쾌감을 표했다.

    말한 것은 막도희였지만, 호종산과 문경우도 싸늘한 안광을 피워올리며 강엽을 노려봤다.

    “거산중권을 잡았다지만 아직은 동패급. 의뢰에 조건을 붙이는 게 좋아보이진 않은걸.”

    “이 녀석들아,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래?”

    흑수양이 말렸어도 흑풍사우의 삼인방은 강엽을 향한 무언의 압박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 막 낭인전에 들어온 신입이 은전 백 냥짜리 의뢰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들이 그만한 의뢰를 받기까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이 걸렸다는 걸 감안하면 강엽이 받는 대우는 후하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다른 낭인들과 같이 출발하는 건 원활한 토벌을 위해서야. 네가 신입치고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혼자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협상은 결렬이군.”

    강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볕이 극독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있어 낮에 다 함께 이동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니까.

    다만 흑풍사우는 강엽이 일말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박찰 줄은 몰랐던지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토벌 얘기는 안 들은 걸로 하지. 서로 조건이 안 맞는데 어쩌겠나.”

    의뢰가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정 안 되면 다른 분타로 가버리면 그만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산적 소굴로 들어가서 한 명만 슬쩍 빼내도 괜찮고.’

    몸을 돌리려는 그때였다.

    “잠깐만.”

    흑수양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약간은 가벼웠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기에 강엽도 매정하게 뿌리치진 못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네.”

    “대형!”

    “형님! 어찌...!”

    흑풍사우의 삼인방이 눈을 부릅뜨고 만류했어도 흑수양의 의지는 바뀌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경이 자넬 추천했고, 전강 역시 자네가 가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네.”

    장경은 그렇다 치고 전강까지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무엇보다 흑수양쯤 되는 낭인이 전강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는 게 의외였다.

    “그 두 사람이 자네 실력을 보장했다면 나 또한 자네를 믿어보지. 아무 이유 없이 단독행동을 하겠다는 건 아닐 테니까.”

    사실 합류지점에 제때 도착하기만 한다면 단독행동을 허가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강엽이 혹여 산적들과 마주쳤다가 토벌 작전이 새진 않을지 우려했을 뿐.

    “내가 자넬 믿는 만큼 자네도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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