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보표 (3)
두 사람이 가는 길은 일반 산객들은 모르는 길이었다.
삼십여장 쯤 되는 석굴을 통과해서 건너편으로 빠져나오면 울창한 숲이 나오는데, 워낙 응달진 곳이라 산객들이 다니는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숲이 죽은 투사들을 매장하는 공동묘지였다.
어디에 시체들을 묻었는지 표식을 꽂아두었기에 혹시라도 이미 시체가 묻힌 곳을 다시 파낼 염려는 없었다.
적당한 곳을 고른 사이준이 신호를 보냈다.
어서 삽질이나 하자는 뜻이다.
만약 강엽이 어리버리한 신입이면 혼자 시키고 자신은 딴청을 피웠겠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강엽에게 일을 독박시키고 혼자 탱자탱자 놀 만큼 사이준은 간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강엽이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열화장의 시체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자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얼른 이 기분 나쁜 곳에서 나가고 싶은데 딴생각이나 하다니?
“뭐해? 얼른 파자니까.”
“....”
강엽은 말없이 삽을 가져왔다.
열화장의 시체에서 어떻게 피를 구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사이준이 자기가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게으름을 피웠다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줬을 텐데, 이놈은 자신이 무서운지 괜히 눈치를 보며 좋은 선배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피를 취하기에 좋은 날은 아닌 듯싶었다.
‘다음에 혼자 일할 때나 시도해봐야겠군.’
한동안 묵묵히 삽질만 했다.
그렇게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만들었을 때였다.
강엽은 문득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공종묘지엔 그와 사이준밖에 없는데, 어디선가 그들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귀신이 나타난 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데....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가늠한 강엽이 불쑥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혹시 죽은 척하는 무공도 있나?”
“뭐?”
사이준이 멍하니 되물었을 때였다.
달구지에서 덜컹 소리가 들리더니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열화장의 시체가 퍼뜩 솟구쳤다.
죽은 사람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사이준은 귀신을 본 것마냥 혼비백산했다.
“뭣...!?”
“피해, 병신아!”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사이준을 걷어찬 강엽이 바로 암신을 펼쳐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한 박자 늦게 들이닥친 장풍이 그들이 파고 있던 구덩이를 쾅 뒤집어놨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사방으로 뻗치자 공기마저 후끈 달아올랐다.
“난 눈치 빠른 애송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열화장이 중얼거린 직후였다.
열기마저 찢어발길 정도로 날카로운 빛줄기들이 짓쳐들었다.
열화장은 피하기는커녕 대노하며 쌍장을 내밀었다.
“어딜!”
뻐어엉!
혈공진기와 열양지기가 충돌하자 화탄이 터진 것처럼 요란한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흙과 풀쪼가리들이 흩날리고 불씨가 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눈앞에 대적을 둔 두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득 열화장이 말했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을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구나.”
“귀식대법이라....”
거북이처럼 느린 숨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나 의미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걸로 사람들을 숨겼군.”
“내게도 도박이었지. 네놈들을 속이겠답시고 이 악물고 수련했다. 다 빠져나온 시점에 들킬 줄은 몰랐구나.”
“나도 거의 속을 뻔했다. 분명 처음 뵜을 땐 시체였는데 말이야.”
“그게 귀식대법의 공능이다.”
다만 귀식대법엔 큰 약점이 있었다.
귀식대법을 펼치는 동안은 꿈쩍하지 못할뿐더러, 정해진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자력으로 깨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강엽에게 들킨 것은 땅을 파던 중에 귀식대법이 풀렸기 때문.
그때도 죽은 척을 했지만 결국 강엽의 감각을 속이진 못했다.
열화장이 뜻밖의 제안을 던졌다.
“거래를 하지 않겠나? 날 이대로 보내다오. 하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마.”
“대가?”
“너희들의 목숨.”
그렇게 말하는 열화장의 얼굴엔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 따위는 얼마든지 죽여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강엽으로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거절한다. 당신의 제안은 수지가 안 맞아.”
“살 길을 일러주었거늘 걷어차다니....”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열화장의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가 뿜어져나왔음에도 강엽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은 날 못 죽여.”
순간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로 혈공진기를 인도한 강엽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한순간에 치달은 강엽의 속도에 깜짝 놀라면서도 열화장은 두 팔을 교차해 주먹을 비껴냈고, 강엽을 노려보며 짧게 끊어친 단타를 연속으로 퍼부었다.
하지만 때리는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암신의 환술에 현혹되어 타점이 빗나간 것이다.
바로 역습이 시작되었다.
“헛!”
강엽의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지자 대경한 열화장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눕혔다.
거산중권의 각법을 기억했다 따라해본 건데, 혈공진기에 흡혈귀의 괴력이 합쳐진 탓에 무공의 원 주인이 썼던 것 이상의 위력이 나왔다.
두꺼운 소나무가 일격에 잘려나가자 열화장이 눈썹을 치떴다.
“한낱 보표의 무공이 아니구나!”
그는 강엽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강엽 정도의 실력이면 투기장의 투사들 중에서도 상위권이었다.
그런 놈이 왜 보표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열화장은 강엽을 떨쳐내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더 강하다!”
철판교를 펼칠 때부터 열양지기를 모았던 그는 장심을 내밀어 강엽의 턱주가리를 올려쳤다.
강엽이 그보다 키가 큰 탓에 얼굴을 공격하려면 팔을 올려야만 했다.
“이야아아아!”
그때 사이준이 달려들었다.
열화장이 강엽에게 집중하는 사이에 열화장의 뒤를 치겠다는 속셈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강엽이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습할 거면 소리 지르지나 말든가.’
제딴에는 자기보다 강한 고수에게 덤빈답시고 용기를 낸 것 같은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화장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건방진 애송이놈이....”
강엽과 달리 그가 귀식대법을 펼쳤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놈이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흥, 죽여주... 욱!”
말하다 말고 열화장이 각혈했다.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귀식대법을 펼쳤고, 다시 강엽과 싸웠기 때문에 내상이 도진 것이다.
사이준은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으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칼을 찔렀다.
그러나 열화장 역시 고이 당해주진 않았다.
대저 장법을 익힌 이는 손바닥뿐만 아니라 손 전체가 무쇠처럼 단단하기 마련. 급격하게 몸을 비틀면서 곧게 세운 손날로 사이준의 목을 노렸다.
순식간에 치달은 죽음을 직감한 사이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강엽이 빈틈을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흡혈귀의 초감각은 열화장의 손날이 사이준의 목을 끊어놓으려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을 느릿하게 인식한 강엽은 열화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쩌다 보니 사이준이 열화장의 옆구리를 베고, 열화장은 사이준의 목을 노리며, 강엽은 사이준을 살리기 위해 열화장을 덮친 모양새가 됐다.
쩌어엉!
둔중한 굉음이 메아리쳤다.
“크헉!”
“아악!”
두 사람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사이준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어깨뼈가 부서졌고, 열화장은....
“쿨럭! 쿨럭! 우웨엑!”
강엽의 무릎을 맞고 내동댕이쳐져서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하고 있었다.
“하긴. 원래 내상을 입었지. 생각지도 못하게 부활해서 잊고 있었어.”
열화장이 왜 거래 운운하면서 싸움을 피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까무러친 사이준을 흘깃한 강엽은 열화장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엎드린 채 웩웩 피를 게워냈던 열화장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전에 강엽의 발길질에 채여 허공을 날았다.
“커억!”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감사하마.”
눈엣가시 같은 사이준이 기절했으니 흡혈을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셈.
아무래도 강엽도 죽은 사람의 피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게 덜 역겨웠다.
점점 거리를 좁히는 강엽에게서 소름끼치는 살기가 흘러나오자 열화장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쿨럭, 쿨럭! 이거 광효보다 더한 놈이었군....”
오늘 그의 대전 상대였던 광효는 남만의 밀림에서 자란 전사 출신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전쟁터를 전전했는데, 그 때문에 몸에 살기가 배어서 손속이 잔혹해졌다.
그러나 그 광효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강엽의 눈에선 묘지의 음기보다도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아직 죽을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억울하면 염왕채를 쓰지 말았어야지.”
고리대로 빚쟁이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염왕채를 좋게 볼 순 없으나 돈을 빌린 주제에 잠적했다는 열화장 또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그게 얼마인지 아느냐!? 그걸 갚으려다간 죽을 때까지 저 빌어먹을 투기장을 나갈 수 없단 말이다!”
물론 강엽이 알 바는 아니었다.
말없이 열화장을 노려보자 그가 움찔했다.
“...거, 거래! 거래를 하자!”
“이번엔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이번엔 진짜다. 너한테도 도움이 될 얘기다! 내가 어떻게 귀식대법을 익혔는지 궁금하지 않나?”
기심이 엄엄한 주제에 너무 말을 많이 했다.
피를 웩 토한 열화장이 애원했다.
“제, 제발... 뭐든, 끅... 알려줄 테니....”
“뭐든 알려주겠다고.”
“그, 그래. 나 좀 살려다오. 이제 내게....”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서 잘 들리지도 않자 이쪽으로 와서 들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강엽이 다가가자 열화장이 번개처럼 일장을 내쳤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구명절초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살려달라고 애원한 주제에 손을 뒤로 감췄으니 꿍꿍이가 뻔히 들여다보였다.
열화장은 선택을 했고, 이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빠르게 장풍을 피한 강엽이 열화장의 손목을 잡아 수수깡마냥 가볍게 부러뜨렸다.
이어 머리채를 잡고 무릎으로 찍어버리자 놈의 안면이 함몰되었다.
빠각!
“.......”
강엽은 열화장을 쓰레기마냥 던졌다.
곤죽이 됐음에도 열화장은 용케 죽지 않고 간질 걸린 병자처럼 경련만 했다.
이대로 놔둬도 죽겠지만 강엽은 열화장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생피를 흡혈할 요량이었다.
“굳이 깨물 필요는 없겠지.”
피를 짜낼 방법은 많으니까.
강엽은 바닥에 떨어진 사이준의 칼을 주워서 열화장을 향해 겨누었다.
* * *
“어찌된 일인가?”
운화장의 총관이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힐난의 어조였기에 보표대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열화장이 귀식대법을 썼습니다.”
“귀식대법?”
“쉽게 말하면 가사 상태에 이르는 무공입니다. 호흡을 멈추고, 체온이 떨어지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기 때문에 의원도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무공이 있었구만.”
“송구합니다.”
아무 데서나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보표대주도 귀식대법이란 게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웠다.
“강엽의 말로는 열화장이 일년간 귀식대법을 수련했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한방을 위해 지금껏 참고 기다린 듯합니다.”
“그랬겠지. 그나저나 강엽이 열화장을 죽였나?”
“예. 다만 사이준이라는 녀석과 같이 갔습니다.”
“첫날부터 신고식 한번 거창하게 치르는구만. 한데 열화장이 그냥 죽어줬을 리는 없을 텐데... 두 사람의 상태는 어떤가?”
“사이준은 어깨뼈가 부러져서 당분간은 복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엽은....”
강엽을 떠올린 보표대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피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강엽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상처도 없습니다.”
“상처가 없어?”
“옷이 좀 그을린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본인 입으로 오늘 밤에도 출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에잉, 역시 보표로 두기는 아까운데....”
총관이 혀를 내둘렀다. 다른 일을 맡기고 싶어도 본인이 한사코 싫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알겠네. 이 건은 내 따로 장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군.”
운화장주는 투기장 사업의 책임자이니 당연히 이 소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
총관은 어쩌면 장주가 이 소식을 듣고 흥미로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