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7화 (16/450)
  • 4화. 보표 (2)

    “낭인전에서 왔다고?”

    운화장의 총관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낭인전에 쓸 만한 인력을 보내달라고 했건만 막상 온 놈은 깡마르고 얼굴도 햇볕을 못 보고 산 놈처럼 창백했다.

    낭인보다는 병자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면상을 가진 놈이 보표일을 하겠다고 왔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물론 강엽의 신분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다면 장원 대문을 지키는 보표들 선에서 정리되었을 터.

    “의뢰서와 낭인패는 갖고 왔겠지?”

    “여기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임시 낭인패라고 해도 진짜와 가짜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름이 적힌 하단에 분타주의 직인이 찍혀 있었에 위조는 거의 불가능했다.

    “강엽, 강엽이라... 들어본 이름이군. 자네가 거산중권을 죽였다는 그 친구인가?”

    거산중권이 죽었다는 소문으로 온 거리가 들썩였기 때문에 운화장의 총관도 강엽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의뢰서까지 지참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물어본 것이다.

    “대문의 칼잡이들은 못 믿더군요.”

    “의뢰서와 낭인패가 없었다면 나도 안 믿었을 걸세. 사실 자네가 거산중권 같은 고수를 어찌 죽였는지 모르겠군.”

    강엽이 비겁한 수로 거산중권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걸까?

    당사자의 입장에선 불쾌한 질문이었지만, 강엽은 감정을 앞세우는 대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화장의 외관은 호사스러워도 정작 총관의 집무실은 소박했는데 필통만은 매우 비싸 보였다.

    검은 빛깔이 도는 것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자단목 중에서도 최상급의 자단목을 쓴 것 같았다.

    “이 필통 얼마나 합니까?”

    “알면 뭐 하려고?”

    “부수면 물어드려야 할 테니까요.”

    “후후, 베는 것도 아니고 부수겠다... 당연히 무기는 안 쓰겠지? 물어내라는 말은 안 할 테니 해보게.”

    자단목은 물에 넣으면 가라앉을 정도로 속이 꽉 들어찬 단단한 나무였다.

    운화장의 다른 보표들도 못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니 총관은 강엽이 가소로워 보였다.

    꼴에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자단목을 아는 모양인데 그의 자단목 필통은 다른 자단목보다 몇 배는 더 단단했다.

    자단목 필통으로 벼루를 내려치면 벼루가 두 쪽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강엽이 지필묵을 빼고 한 손에 자단목 필통을 들었을 때까지도 총관은 강엽이 허세를 떤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자단목을 부서뜨린다면 상당한 내공을 지녔다는 뜻인데, 그런 사람은 애초에 보표 따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강엽의 괴력을 못 버틴 자단목 필통이 안쪽에서부터 빠그러지는 소리를 내자 도리어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

    콰직!

    결국 자단목 필통이 우지직 부서지자 총관은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

    대체 자신은 어쩌자고 저 필통을 부수어도 된다는 말을 했던 것일까?

    일각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당장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강엽이 담담히 말했다.

    “이만하면 증명은 된 것 같습니다만.”

    “...내가 실언을 했구만.”

    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것이다.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우울해하는 총관의 모습에 강엽도 살짝 미안해졌다.

    신분을 증명해도 신경을 살살 긁는 바람에 짜증나서 이 방에서 가장 귀한 물건을 부순 건데, 미리 양해를 구했다지만 저렇게 낙담할 줄이야.

    ‘설마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자네를 보표로 채용하겠네. 한데 보표 말고 다른 일은 관심 없나?”

    막상 자단목을 부순 걸 보니 보표로 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이라면 어떤 것 말입니까?”

    “내 개인호위. 돈은 보표보다 많이 주겠네.”

    “감사한 말씀이지만....”

    총관의 목을 노리는 살수가 매일밤 찾아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할 이유가 없었다.

    “제가 낮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총관님의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군요.”

    “...그렇군.”

    강엽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의지를 감지한 총관은 입맛을 쩝 다셨다.

    “한 달은 수습이야. 이건 운화장의 방침이라 실력과 상관없이 지켜야 하네. 대신 수습이라도 봉급은 정식 보표들과 똑같이 쳐주지.”

    그 외에 근무시간과 근무일자, 업무 등등 자세한 것을 말해주고 나서야 총관은 축객령을 내렸다.

    강엽이 밖으로 나가자 총관은 얼른 바닥에 쪼그려앉아 자단목 조각들을 줍고는 울상을 지었다.

    “나쁜 새끼, 이렇게 부수면 아교로도 못 붙이는데...!”

    * * *

    그날부터 강엽은 보표로 일했다.

    중경에서 가장 유명한 투기장답게 운화장은 여러 전각들로 구성되었다.

    운화장의 사람들이 쓰는 전각들뿐만 아니라 투사(鬪士)들의 숙소나 싸움을 구경하러 온 관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다양하게 마련되었다.

    심지어 개중엔 도박장도 있었다.

    관객들은 경기에서 누가 이길지, 몇 합 만에 이길지를 두고 내기를 벌였다.

    안전하게 돈을 따기 위해 배당이 낮은 투사를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탕을 위해 배당이 높은 신참 투사에게 돈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도박판에서는 돈을 따는 놈이 갑이고 정의였으니까.

    운화장의 보표들이 입는 흑색무복으로 갈아입은 강엽은 관객석 뒤편에 자릴 잡았다.

    “와아아아아아!”

    수백 명의 함성이 전각을 흔들었다.

    그들이 응원하는 투사가 상대를 무참히 박살내고 두 팔을 번쩍 든 채 포효했던 것이다.

    권각술을 쓰는 남자인데 키는 작지만 몸이 다부지고 날래서 상대의 공격을 요리조리 잘 피했다.

    상대도 만만치 않아서 남자의 공격을 상쇄하고 역으로 반격했지만 결국 기량에서 밀렸다.

    ‘저만하면 거산중권과 붙어볼 만하겠는데.’

    투기장의 수준이 예상 외로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이 권사의 팔을 잡고 높이 치켜들자 관객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승자는 관객들의 찬사를 받고, 패자는 그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의 욕받이가 된 채 들것에 실려 나간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 처량했지만 강엽은 패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도 이전까진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 속에서 승리를 맛봤을 테니까.

    오늘 이겼다고 내일도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고, 오늘 졌다고 내일도 질 거라고 재단할 수 없는 곳이 강호였다.

    “좀 보니까 어때?”

    강엽과 함께 일하는 보표가 물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은지라 강엽은 그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배울 게 많은 결투였다. 특히 저 권사의 몸놀림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어. 감각적이더군.”

    “원공권(猿公拳)의 고수라더라.”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고 창안했다는 형산파의 상승권법.

    아직 강호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강엽은 형산파의 이름은 몰랐지만, 원공권의 초식에서 거산중권의 권법과는 다른 의미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물론 상대도 만만찮았지. 보신경이 투박해도 도끼술은 일품이었으니까. 하지만 원공권이 한 수 위였던 거야.”

    보표들도 무림인이었다.

    관객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우선했지만 한편으로는 패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대입해봤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싸웠을지 말이다.

    ‘무학의 세상은 대륙처럼 광활하고, 심해처럼 깊으며, 창공처럼 아득하다....’

    동패무고의 비급에서 읽은 구절이다.

    강엽은 막연하게 여겼던 구절의 참뜻을 투기장에 와서야 체감했다.

    원공권의 권사가 승리를 거둔 이후로도 투기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잡부들이 투기장의 피를 깨끗이 닦고 사라지자 사회자가 또 다른 결투를 고지했다.

    “금일 이차전의 결투는 사전에 알려드린 대로 열화장과 광효의 대결입니다! 뜨거운 박수로 용맹한 투사들을 맞이해 주십시오!”

    “열화장! 열화장!”

    “광효! 광효!”

    관객들이 각자 응원하는 투사들의 이름을 연호하자 양 투사가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했다.

    사회자가 양 투사들의 경력을 밝히자 관객들의 공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음, 이 열기. 가끔은 궁금하단 말이지. 저기서 응원받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면 참가하면 되잖나.”

    “에헤이, 그건 아니지. 투기장에 있는 것 자체가 인생 막장이라는 건데.”

    “무슨 뜻이지?”

    투사들에게 사연이 있는 걸까?

    강엽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자 보표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으로 투사들을 내려다봤다.

    관객석과 투기장은 창살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뇌옥을 연상시켰다.

    “이 투기장의 주인이 누군지 아나?”

    “태화문(太和門)이라고 들었다.”

    태화문은 사천 동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흑도 문파로, 지닌 바 전력이 사천삼패인 당문, 아미, 청성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대방파였다.

    강엽은 의뢰를 맡기 전 장경으로부터 운화장이 태화문의 사업장 중 하나라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저놈들은 태화문에게 약점이 잡힌 놈들이야.”

    빚을 졌든 죄를 졌든 정상적인 방법으론 태화문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무림인들이 투사로 전락했다.

    투기장이야말로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는 무림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전장인 셈.

    “물론 자진해서 투사가 되는 놈들도 있긴 하지.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투귀들. 저기 광효 같은 놈이 그런 부류야.”

    그 말에 강엽은 이족 청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보표의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이족 청년은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럼 상대인 열화장은?”

    “빚을 졌다고 하더군. 태화문 휘하의 염왕채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빌렸다던데. 한데 갚지도 않고 튀니 태화문의 고수들이 열받아서 쫓아간 거지.”

    중원은 넓으니 숨으면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상엔 수백 수천 리를 도망친 사람을 좇는 추종술의 전문가들이 존재한다.

    태화문은 그런 추종술의 전문가들을 다수 보유한 방파였다.

    “넌 투사에 관심 없나? 거산중권을 잡은 실력이면 투기장에서도 제법 먹힐 텐데.”

    “그 소문이 보표들의 귀에도 들어갔군.”

    “이 거리에 그 소문 못 들은 사람이 어딨다고. 그런 친구가 왜 보표나 하고 있는 거야?”

    “호기심이랄까?”

    굳이 보표의 말이 아니어도 투사가 될 생각은 없다.

    피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할뿐더러, 자칫 결투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만인의 앞에서 상처를 재생한다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은 결투나 보자고.”

    콰앙!

    열기를 내뿜는 중년인과 구릿빛 피부의 이족 청년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강엽이 투사들의 결투를 심도 깊게 관찰하는 동안 그의 무공관(武功觀)은 차츰차츰 넓어져갔다.

    * * *

    강엽은 첫날부터 시체 처리를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투기장의 결투가 격렬해도 날이면 날마다 사망자가 나오진 않을 테니까.

    결과만 놓고 말해서 예상은 빗나갔다.

    “열화장이 죽었다.”

    “예?”

    “광효에게 당한 내상이 심각했던 모양이야. 의원을 불렀는데도 결국 숨이 끊겼다더군. 사이준, 네가 저 친구와 함께 가라.”

    사이준은 강엽에게 일을 가르친 보표였다.

    퇴근할 기분에 신났던 사이준은 시체를 처리하라는 말에 얼굴이 흙색이 되었지만 거부하진 못했다.

    “아, 알겠습니다. 시체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처리하면 바로 퇴근해라. 대신에 꼼꼼이 처리하는 것 잊지 말고.”

    태화문의 힘과 인맥 덕분에 관부도 쉬쉬하고 있지만 본디 투기장 사업은 불법이었다.

    공개적으로 장사를 지낼 수는 없기에 사망자의 시신은 남들 몰래 처리했다.

    “들었지? 열화장을 배웅해주러 가자고.”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는 만큼 두 사람은 운화장의 무복이 아닌 본래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지?”

    “가악산에 묻을 거야.”

    가악산이 아주 크지는 않아도 사람 몇 명 묻는 걸로는 티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야밤에 사람 묻으러 가는 게 기꺼울 리는 없었기에 사이준의 안색은 굉장히 나빴다.

    “힘들면 나 혼자 해도 된다.”

    “...젠장. 그래도 이번엔 내가 같이 가야지. 적어도 길은 알려줘야 할 거 아니냐고.”

    하지만 사이준은 강엽이 들어왔으니 이 일도 조만간 졸업할 거라 생각했다.

    원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갓 들어온 신입이 도맡는 게 운화장 보표들의 관례였으니까.

    자신이 요령을 알려주면 그 다음부터는 강엽이 알아서 해내야 했다.

    멍석을 뒤집어쓴 열화장의 시체를 달구지에 싣은 두 사람은 운화장이 비밀리에 만든 비탈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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