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보표 (1)
“전강아.”
“말씀하시오, 분타주님.”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잠기운 때문에 헛것을 보는 것 같거든? 허벅지 좀 꼬집어봐라.”
“분부대로 꼬집어드리겠소.”
전강이 정말 살을 세게 꼬집자 장경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전강의 등짝을 때렸다.
“씹! 아프잖아, 인마!”
“꼬집으라고 해서 꼬집은 건데 문제라도?”
정작 전강은 별 타격이 없는지 무덤덤하게 물었기에 장경은 입맛을 다셨다.
“하여튼 이놈은 매사 너무 진지해서 재미가 없단 말이야.... 근데 그 거짓말 진짜냐?”
거짓말이면 거짓말이지 진짜냐고 묻는 건 뭔가.
장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탁자에 올라온 머리를 가리켰다.
천자락으로 감쌌음에도 단면에서 흘러나온 피가 탁자를 적셨지만 그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네가 정말 거산중권을 잡았다고?”
강엽에게 물은 건데 답은 전강이 했다.
“거산중권 맞소. 분타주님도 몇 년 전에 그 작자가 석신로에서 사람들 피떡으로 만드는 걸 보지 않았소. 이가장의 공자와 시비가 붙으니 그 자리에서 호위들까지 몽땅 죽여버렸지. 기억 안 나시오?”
“씨바, 기억이 나니까 문제지. 와, 이거 실화냐. 거산중권이 새파란 신입한테 죽었다니 말이 안 나온다.”
둘 다 오랫동안 이 거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산중권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굴러먹었어도 나름 알아주는 고수였다.
“믿기지 않으면 소가방주에게 확인하든지.”
“아니, 뭐...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야. 소가방 놈들이 떼거지로 덤빈다고 거산중권이 죽을 놈도 아니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일관성이 없군.”
“그만큼 놀랐다는 거다. 거산중권이 죽었단 말이지... 이가장주가 이 소식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가장주는 살해당한 공자의 부친이었다.
백주에 아들을 잃은 그는 복수를 부르짖으며 수많은 무림인들을 고용해서 원수를 쫓았지만, 이미 그때쯤 거산중권은 중경을 내빼버린 뒤였다.
“아들의 원수를 잡지 못하자 이가장주가 홧병으로 누웠지.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얼마 뒤에 죽어버렸고.... 당시 거산중권이 죽인 사람들 중에 애꿎은 양민들도 많아서 관부에서 현상금을 걸었지. 누구든 거산중권의 목을 가져오면 은전 이백 냥을 하사하겠다고 말이야.”
사실 은전 이백 냥은 거산중권 같은 고수의 목숨값으로는 애매했다.
수십만 냥, 수백만 냥도 아니고 고작 이백 냥 때문에 누가 멀리 도망친 인간을 쫓아서 중원 천지를 이잡듯이 뒤지겠나.
거산중권이 몇 년 만에 돌아왔지만, 설령 그가 강엽에게 죽지 않았어도 현상금 때문에 그를 찾아갈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은원 때문에 찾아갈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 목을 들고 관청에 찾아가면 되나?”
“그럴 필요까지야. 현상금을 대신 받는 것도 낭인전의 업무 중 하나인데.”
강엽의 허락이 떨어지자 장경이 전강에게 고갯짓을 했고, 전강이 보자기로 수급을 감쌌다.
전강은 사천성 전역에 지점을 보유한 성도전장의 전표와 의뢰비인 은전 열 냥을 가져와서 강엽에게 주었다.
“일단 우리 쪽에서 먼저 준 거야. 현찰을 선호하면 은전으로 바꿔줄 수도 있고.”
“아니. 나도 이쪽이 편하다.”
산장에서 약탈한 게 있어서 당장 돈이 급하진 않았을뿐더러, 은전은 많을수록 가지고 다니기 불편했다.
“성도전장은 사천 제일의 전장인 만큼 신용은 확실해. 각지에 지점이 있어서 낭인전의 낭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편이고.”
아예 전장에 돈을 맡겨놓고 목돈이 필요할 때만 전장에서 돈을 찾는 낭인들도 많았다.
“그러면 나도 낭인전의 낭인으로 인정받은 건가?”
“후, 그래. 다른 놈도 아니고 거산중권을 죽였는데 인정해줄 수밖에 없지. 낭인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낯선 신입이여.”
요란한 입단식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장경은 나무를 깎아만든 목패를 내밀었다.
“처음에 왔을 때 말했었지? 낭인전엔 등급이 있다고. 총 아홉 단계로 나뉜다. 일단 금은동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천지인 삼재로 세분화되지.”
이를테면 가장 낮은 등급은 동인패였고, 가장 높은 등급은 금천패였다.
당연히 등급이 높을수록 대접도 좋아지기에 야심찬 낭인들은 승급에 목숨을 걸었다.
“왜 내 건 목패지?”
“그건 임시 낭인패. 조만간 정식 낭인패가 나올 거다. 그때까진 그걸 신분패로 삼아.”
간혹 의뢰주가 혹시 사칭은 아닌지 의심하기에 낭인패는 신분을 증명하는 요긴한 수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낭인패를 챙기자 장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 의뢰는 어떻게 할 거냐?”
“내가 낮에는 다른 일을 해서. 웬만하면 밤에 하는 의뢰만 맡고 싶은데.”
“밤에만 하는 의뢰라... 기억해두지.”
처음 만났을 때 이 말을 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겠지만 이젠 강엽도 어엿한 낭인전 소속인 만큼 장경도 강엽의 의향을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그보다 무공을 배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거산중권과 싸우면서 무공의 필요성을 절감한 강엽이다. 낭인패니 의뢰니 하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낮은 등급만 되어도 썩 괜찮은 무공을 배울 수 있다고 장경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배울 수 있지. 미리 말해주자면 동패와 은패, 금패 때 배울 수 있는 무공이 달라. 하지만 거산중권을 죽일 정도면 동패무고에서는 배울 게 없을 텐데?”
“그래도 한번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음, 그래. 동패무고는 크지도 않으니 둘러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겠지.”
은패무고나 금패무고와는 다르게 동패무고는 분타에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로소 무공에 입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강엽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 * *
동패무고는 분타의 지하에 있었다.
전강을 따라서 지하에 내려온 강엽은 열 평 남짓한 공간을 차지한 서가를 보고 눈을 빛냈다.
“뭘 읽어도 좋고 얼마나 오래 있든 상관없소. 다만 책을 외부로 반출하는 건 안 되오. 가장 낮은 동패무고라도 엄연히 낭인전의 자산이니까.”
유출된다고 해도 별 피해는 없겠지만 규칙은 규칙이었다. 강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두겠습니다.”
“말씀 놓으시오.”
“...?”
“분타주님께는 그러지 않소.”
“장경은 저랑 연배도 비슷하고 그쪽이 먼저 말을 놔서 반말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전강은 그보단 나이가 많았다.
강엽도 여러 일을 겪으며 천성이 변했지만 자신을 정중히 대해주는 사람에게까지 무례하게 굴긴 싫었다.
“장경이나 다른 낭인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든 전 이게 편합니다.”
“...보통은 반대일 텐데.”
전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편한 대로 하시오. 서가는 각 분야에 따라 분류해놨으니 원하는 무공을 찾는 게 어렵진 않을 터. 권장지각부터 십팔반병기, 보신경, 심법까지 구색은 갖춰놨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오.”
멀어진 전강을 뒤로한 강엽은 서가를 둘러보며 눈에 띄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골랐다.
일단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찾기보다는 무고의 비급들을 두루 섭렵하며 무공 지식을 쌓을 생각이었다.
무공 비급뿐만 아니라 황제내경을 비롯한 의서와 유불도의 경전들까지 있었기에 중원 무공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과 사상들에 대해서도 두루 공부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모산파의 술법서를 익히면서 도가 경전을 공부할 생각도 했던 강엽에겐 좋은 기회였다.
힘든 싸움을 치렀음에도 간만에 흡혈을 해서 그런지 책내용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날부터 강엽은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어스름이 지면 청송객잔에 가서, 밤새 책을 읽다가 동이 트기 전에 돌아간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날 읽은 책을 복기하고 종이에 자신이 이해한 바와 의문점들을 적어나갔다.
덕분에 방값보다 종이값이 더 들어갔지만 지금은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강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강엽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오죽하면 객잔을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아예 청송객잔으로 옮길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시끄럽지만 않으면 옮겼을 텐데.’
볕이 들지 않는 것치곤 관리를 세심하게 했는지 생각보다는 청결했다.
문제는 낭인들이 툭하면 술 처먹고 떠들거나 쌈박질을 해대서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태양볕을 피해야 한다지만 소음까지 참고 싶지는 않았다....
“넌 전생에 책을 못 봐서 뒈졌냐?”
하도 무고에 들락거리다 보니 장경은 강엽이 찾아오면 질린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전강은 익숙해진 건지 이제 묻지도 않고 무고로 가는 계단문을 열어줄 지경이었다.
“혹시 무고에 있는 비급을 다 읽을 작정이냐?”
“그럼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닌데... 비급이 좋아도 너처럼 탐독하는 놈은 처음 본다.”
“말하는 걸 보니 다른 용건이 있나 본데.”
앞서 찾아왔을 때와 다른 분위기였다.
변죽은 그만 올리고 본론이나 어서 말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장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눈치가 백단이구만.”
“그래서 뭔데.”
“두 가지 용건이 있어. 일단 거산중권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걸 알려주는 게 첫 번째고.”
일전에도 말했듯 거산중권이 제법 유명한 흑도의 고수였기 때문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소가방의 칼잡이들을 통해 소문이 퍼진 것도 있지만, 장경 역시 소문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딘들 안 그러겠냐만 이 바닥에선 명성이 곧 실력이지. 네가 거산중권을 죽인 건 그의 이름값을 빼앗은 거다.”
무명이었던 강엽이 일약 거산중권을 죽인 고수가 된 것이다.
거산중권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강엽을 만나거나 그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실부터 떠올릴 터.
비단 장경의 장담이 아니라도 강엽은 객잔에 들어왔을 때부터 식당 안의 낭인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거산중권을 죽였다는 소문이 난 모양이다.
재밌는 건 낭인들의 반응이었다.
눈을 내리까는 놈이 있는가 하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놈들까지 다양한 게 아닌가?
산뜻하게 무시한 강엽이 다시 장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개라고 했었지. 다른 하나는 뭐지?”
“의뢰야.”
물론 강엽의 요구대로 밤에만 하는 의뢰였다.
강엽 역시 일전에 얻은 피가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채워둬야 후환이 없기 때문에 장경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두 개가 들어왔다. 하나는 저번처럼 뒷골목 싸움에 힘을 보태달라는 거고. 소가방과는 다른 곳이지.”
문제는 다른 하나였다.
강엽이 얼른 말하라고 종용하자 장경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건 좀 장기 의뢰인데 괜찮겠냐?”
“들어보고 결정하지.”
“운화장이라는 장원이 있다. 평범한 장원처럼 보여도 중경에서는 가장 유명한 투기장이야. 거기서 보표를 구한다더라.”
“그런 것도 의뢰로 치나?”
“뭐, 우리한테 쓸 만한 낭인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는 거지. 마침 투기장은 밤에만 열리니까 네 성향에도 맞을 거고. 대신 오래 일해야 하겠지만.”
“보표라...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지?”
피를 구할 수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니, 그럴 바엔 뒷골목 싸움이나 하는 것이 낫다.
“아무래도 손님들 지키는 게 주 업무지. 그 투기장은 좀 특이해서 무림인만 참가할 수 있는데, 재수 없으면 관객석에도 불똥이 튀니까.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래. 시체 나오면 그것도 처리해야 할걸.”
전자는 몰라도 시체 처리는 아무리 시체에 익숙한 낭인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엽의 생각은 달랐다.
매장을 하는지 화장을 하는지는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갓 죽은 따끈따끈한 시체라면 피를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둘 다 할 수 있을까?”
“뒷골목 싸움은 내일이고, 투기장은 사흘 뒤에 찾아가면 된다. 근데 정말 다 하려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투기장은 수습을 거칠 거야. 정식으로 채용되면 적어도 몇 달은 일해야 하니 알아둬.”
오히려 강엽에게도 그편이 나았다. 생각과 다른 곳이면 금방 그만둘 수 있으니.
“투기장이라.”
예전이었다면 군자가 걸음할 곳이 아니라며 관심도 갖지 않았겠지만 강호에서 살아가는 지금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