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낭인 (3)
거산중권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중경을 오래 떠나긴 했구나. 한낱 낭인놈이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다니.”
물론 그 역시 뒷골목에서 굴러먹은 흑도 나부랭이였으니 낭인보다 더 나을 것은 없는 처지였다.
하물며 목에 현상금까지 걸렸으니 백주에 당당히 다기니는커녕 현상금을 노리는 낭인들이나 정파의 협객들에게 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나 거산중권 역시 아무 생각도 없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중경을 떠나있는 동안 그의 무공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이라면 과거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아왔던 놈들을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네놈의 목을 따는 것부터 시작하마. 이후 지난날 날 죽이겠다고 쫓아왔던 놈들을 찾아갈 것이다!”
흉흉한 살기가 바람을 타고 쏟아지자 소가방의 칼잡이들은 물론 한편인 하명패의 칼잡이들까지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덤벼라, 애송이! 네놈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이 거산중권이 뼈에 새겨줄 터이니!”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선공은 양보한 모양이다.
강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사양 않고 가지.”
강엽이 두 팔을 늘어뜨렸다.
다리를 벌린 채 오른손은 중단에 올리고, 왼손은 옆구리에 붙인 거산중권에 비하면 편한 자세였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딛자 분위기가 변했다.
거산중권은 마치 굶주린 맹수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듯한 느낌을 받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찰나 강엽의 신형이 사라졌다.
“헉!”
칼잡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도 강엽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다.
거산중권은 깜짝 놀라서 선공을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도 잊고 주먹을 내지를 뻔했다.
그 약간의 시간차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강엽의 손톱은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한 뼘이나 길어졌고, 거산중권이 가까스로 강엽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갔을 땐 이미 코앞까지 온 뒤였다.
거산중권이 팔뚝을 교차시켜 급소를 가렸다.
스가악!
열 줄기의 빛살이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크으읍!”
화끈한 통증에 거산중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간발의 차로 방어했기 때문에 강엽의 손톱은 그의 몸통에 닿지 않았으나, 공격을 막은 팔뚝은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죽었으리란 생각이 들자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어랏!”
필사의 의지가 담긴 일권이 허공을 꿰뚫었다.
강엽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느리군.”
목내이나 모산혈조, 빙오선은 말할 것도 없고 아설하나 흑포무인도 거산중권보다 훨씬 빨랐다.
그들에 비하면 거산중권은 거북이였다. 흡혈귀의 초감각이라면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허공으로 뛰어오른 강엽이 거산중권의 배후를 점하면서 손톱을 내찔렀다.
순간 아찔한 예감을 느낀 거산중권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그 위로 강엽의 손톱이 들이닥쳤다.
거산중권이 한 바퀴 돌면서 다리를 내질렀다. 주먹질이 특기였지만 발길질도 예사롭지 않았다.
한번 접었다 핀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마치 칼날을 내치는 것 같은 예기를 동반했던 것이다.
‘이건 피해야 한다.’
흡혈귀의 재생력이 있으니 맞아도 죽지 않겠지만, 이 자리엔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괜히 재생력을 드러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강엽이 훌쩍 뛰어오른 찰나.
거산중권의 발끝에서 터진 발경 경파가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경파를 맞은 건물 벽돌들이 산산조각 박살나서 떨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거산중권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몰랐거니와, 거산중권에게 상처를 입힌 강엽의 무공은 아예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소가방주!”
입을 헤 벌린 소가방주가 강엽의 일갈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 말씀하십쇼!”
눈앞에서 강엽의 무공을 봤기 때문에 소가방주의 말투도 달라졌다. 원래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흑도의 생리였다.
“내가 싸울 동안 보고만 있을 건가?”
그러면서 하명패주를 가리키자 소가방주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애병인 두 자루의 식칼을 탕탕 부딪쳤다.
거산중권이 나타났을 때야 이름값에 압도되어 벌벌 떨었지만 강엽이 그를 상대한다면 걱정할 게 없었다.
“아그들아, 하명패 잡것들을 싹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아!”
소가방의 칼잡이들이 용기백배하여 달려들었다.
강엽이 예상 외로 선전하는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잊고 있던 악과 깡을 되찾게 해주었다.
소가방이 달려오는 광경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본 하명패주가 마주 외쳤다.
“우리도 질 수 없지. 전원 돌겨어억!”
하명패의 함성도 소가방에 지지 않을 만큼 우렁찼다.
창고 건물들 사이로 양측의 패거리가 충돌하고 무기를 부딪치자 여기저기서 악다구니와 비명이 터졌다.
두 세력이 얽히고설킨 광경을 힐끔거린 강엽이 고개를 돌렸다.
“애송이놈이 감히...!”
어느새 그와 동일한 높이에 올라온 거산중권이 까득 이를 갈고 있었다.
강엽이 피식 웃었다.
“이빨 닳겠군. 나이 들면 어쩌려고?”
“닥쳐라!”
거산중권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확대되었다.
하체에서부터 끌어올린 발경을 담은 쇳주먹이 강엽의 머리를 노렸다.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한 강엽이 눈매를 얇게 떴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지?’
목내이에게 혈공진기를 물려받긴 했지만 경혈이나 경맥의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강엽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설하나 흑포무인도 무기만 달랐을 뿐 비슷한 수법으로 그를 괴롭혔었다.
강엽은 의뢰를 마치면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꼭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은 눈앞의 거산중권을 치우는 게 먼저였다.
투학!
밤하늘에 핏줄기가 튀어올랐다.
“크억!”
등짝이 찢긴 거산중권이 이를 물었다.
아무리 그가 무공으로는 강엽과 비교도 안 되는 경지에 올랐어도 맞히지 못하면 무소용이었다.
반면 강엽은 자세는 어설퍼도 흡혈귀의 신체능력으로 공방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싸우면서 상당량의 혈공진기를 쓰긴 했어도 아직까진 그럭저럭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지난날 흑포무인을 죽이고 얻은 선천지기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주먹을 뻗는 자세, 발을 딛는 자세, 호흡, 근육의 움직임... 그 모든 게 어떤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강엽은 그가 내뱉는 호흡을, 근육의 움직임과 자세를 뇌리 한켠에 단단히 새겨두었다.
거산중권의 무공은 다채롭진 않아도 견실하고 단단했다.
벌써 수십 차례나 권각을 질렀음에도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놈, 진지하게 싸우지 못하겠느냐!”
강엽의 의도를 거산중권이라고 모를까.
그는 강엽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수치심에 휩싸였다.
강엽이 알 바는 아니었다.
“더 없나?”
“뭣이?”
“더 써먹을 만한 무공이 없냐는 말이다. 뭐랄까, 아까부터 너무 같은 동작이 반복되던데.”
“...!”
“여러 동작을 섞어 쓰는 건 좋았다. 같은 동작을 조금 다르게 쓰는 것도 좋았고. 내 빈틈을 유도하려는 건지 속임수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이, 이놈...!”
세상에 이런 굴욕이 어딨을까.
낱낱이 파훼당한 거산중권의 얼굴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벌게졌다.
몇 년간 뼈를 깎는 노력을 쏟아부은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 육시를 할 놈이... 죽여버리겠다!”
걸레짝이 된 옷가지를 찢어버리자 탄탄한 대흉근과 뚜렷하게 갈라진 복근이 드러났다.
거산중권이 숨을 깊게 들이쉬자 근육이 부풀고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핏줄이 뺨을 타고 눈가의 동자료혈(瞳子髎穴)까지 올라가자 정수리에서 허연 김이 올라왔다.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거늘... 네놈이 명을 재촉했으니 죽어도 날 원망하지 말거라.”
처음부터 쓰지 않은 것은 부작용 때문이었다.
잠력을 격발시킨 대가로 며칠간 앓아누워야 하기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중경을 떠난 동안 기연을 만났지. 이걸 쓴다면 원수놈들을 죽일 때나 쓸 줄 알았다.”
단지 몸집만 우락부락해진 게 아니라 내뿜는 기세가 맹수처럼 난폭해졌다.
강엽도 더 이상은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걸 알고 거산중권을 교보재로 삼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어쨌든 거산중권이 전력을 드러낸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크어엉!”
잠력을 폭발시킨 거산중권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엽의 앞까지 도달한 거산중권이 주먹을 내뻗었다.
가히 소리보다 빠른 주먹이 뻗어지자 강엽은 얼어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못한 듯했다.
이 괴물같은 놈을 비로소 죽였다는 확신에 거산중권이 저도 모르게 입가를 길쭉하게 찢었을 때.
“어딜 공격하는 거냐?”
“엇!”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강엽이 쭉 뻗은 손톱에 목이 꿰뚫린 뒤였으니까.
확신을 담아 내뻗은 일권은 강엽의 어깨 위쪽으로 빠져나왔을 뿐.
목에 바람구멍이 뚫린 거산중권의 입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만 나왔다.
강엽이 손톱을 빼내자 거산중권이 상처를 틀어막으며 켈룩거렸다.
“고통을 덜어주지.”
거산중권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어 데구르르 굴렀다.
강엽은 그제서야 숨을 골랐다.
‘암신(暗身)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위험했겠어.’
암신은 흑포무인의 피를 마시고 얻은 능력이었다.
피에 깃든 선천지기를 혈공으로 갈무리한 뒤 강엽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게 됐는지 깨달았다.
쉽게 말하면 어둠과 동화되어 상대의 감각을 속이는 능력이었다.
존재감도 불문명해지기에 바로 앞에 있어도 거리감을 잃어버린다.
하루는 굶주린 곰과 마주쳤는데, 암신을 펼치자 곰은 눈앞에 강엽이 있는데도 엉뚱한 곳을 공격했다.
야생의 맹수조차 속을 만큼 암신의 효능은 탁월했던 것이다.
“새끼들아, 봤냐?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와아아아아!”
강엽이 아래를 힐끔 나려다보았다.
거산중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 하명패주가 도주하고 있었다.
잡자면 못 잡을 것도 없겠지만 귀찮고 피곤했다.
어차피 의뢰 때문에 싸웠을 뿐 하명패주와는 아무런 은원도 없는 사이였다.
“이제 계산을 해볼까?”
갑작스런 말에 함성이 뚝 끊겼다.
승리의 기쁨도 잊은 소가방주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옆에 있는 칼잡이를 툭 쳤다.
칼잡이가 거산중권의 시체를 가리키며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소가방주도 강엽의 말뜻을 깨닫고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하, 하하... 거산중권의 시체는 당연히 낭인님의 것입지요. 쇤네들은 하명패의 영역을 접수하는 것만도 바빠서 말입니다... 헤헤.”
“그래, 고맙군. 그럼 가봐.”
“예! 아, 그, 그런데 혹시 다음에도 쇤네들과 같이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강엽이 없었다면 오늘 싸움은 이기지 못했을 터.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소가방주는 자존심을 팔아서라도 강엽을 모시고 싶었다.
강엽이 실소했다.
“조건만 맞으면 괜찮겠지.”
피를 구할 수만 있다면 고사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강엽도 헐값에 힘을 빌려줄 생각은 없기 때문에 오늘보다는 더 큰 금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소가방이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해서 물러난 뒤 강엽은 거산중권의 시체를 챙겼다.
목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피를 마시고, 남은 피는 물주머니에 담아두었다.
이후 시험 삼아서 죽은 하명패 칼잡이들의 피를 마셔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라고 다 같은 피가 아니군.’
지난날 흑포무인의 피를 마셨을 때와 같은 고양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명패 칼잡이들의 피는 거산중권의 피보다도 효과가 떨어졌다.
‘아마 강한 무인일수록 피에 깃든 선천지기가 강한 거겠지.... 이러면 일반 양민들의 피는 거의 효과가 없다고 봐야겠어.’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목숨을 연명하려면 지속적으로 무인들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일반 양민의 피라고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동일한 효과를 내려면 더 많은 피를 마셔야 했다.
아마 흡혈귀가 많이 살았던 먼 옛날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강엽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달밤 아래를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