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낭인 (2)
작고 허름한 객잔이었다.
건물을 둘러본 강엽은 입구 위쪽에 붙은 청송객잔(靑松客棧)이라는 현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묵은 데보다 더한 것 같은데....’
강엽이 묵은 객잔도 그리 정갈하지는 않지만, 청송객잔의 외관을 보고 있노라면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청송객잔은 칠이 벗겨진 것은 물론이요, 위치도 안 좋아서 햇볕이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았....
‘잠깐. 햇볕 안 드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강엽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지금 머무르는 객잔의 방도 그늘진 구석에 있지만, 볕이 아예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창문을 닫고 피풍의로 가려도 해가 가장 높이 뜬 중천 무렵엔 볕이 강하게 들이쳤다.
한데 청송객잔의 건너편에는 고각대루가 앞을 막고 있고, 삼면에도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런 구조라면 볕이 들이칠 여지가 없다고 봐야 했다.
‘...객잔, 옮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웬 거구의 사내가 주렴을 헤치고 나오다 강엽을 보고 멈칫했다.
눈을 가늘게 뜬 거한이 물었다.
“의뢰를 맡기러 왔소? 아니면 받으러 왔소?”
“후자입니다만.”
“...들어오시오.”
“혹시 분타주 되십니까?”
“객잔 점소이요.”
“....”
강엽은 점소이를 자칭하는 거한의 험상궂은 면상에서 그 어떤 진상손님이든 다소곳이 만들 수 있는 패기를 느끼고 전율했다.
뭔 점소이가 곰도 때려잡게 생겼단 말인가?
“분타주님, 손님 오셨소.”
“손님?”
“의뢰를 받으러 오셨다던데.”
“저놈이야?”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대머리 남자였다.
방금 주방에서 나왔는지 헝겊으로 물기를 닦은 분타주는 강엽의 시선이 자신의 맨들맨들한 머리로 향했다는 것을 알고 발끈했다.
“탈모 아니다! 이건 민 거라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젊은 나이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잠시 측은하게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분타주가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는 사이 강엽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더라도 슬금슬금 눈알을 굴리거나 귀를 쫑긋 세우는 게, 새로 들어온 얼굴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의뢰를 받으러 왔다고?”
“...그래.”
초면에 반말을 지껄이기는 좀 그렇지만, 나이도 비슷하고 상대가 먼저 말을 놨으니 괜찮지 않을까.
다행히 분타주는 사소한 걸로 꼬투리를 잡는 성미는 아닌지 시원하게 넘어갔다.
“낭인으로 일한 적은 있고?”
“없다.”
“하아, 막 출도한 놈이었나. 이 바닥이 얼마나 험한지 아냐?”
“내 인생보다 험하진 않겠지.”
아무렴 낭인으로 사는 게 험하더라도 지난날 겪은 지옥에 비할까.
강엽의 입가에 메마른 웃음이 번지자 분타주가 말없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냐? 내가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너 같은 놈들 얼마나 많이 봤는 줄 알아?”
“나 같은 놈 보지는 못했을 텐데.”
흡혈귀가 발에 채일 만큼 많지 않고서야.
물론 강엽도 분타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못 미더운 건 알겠는데, 적어도 능력을 증명할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증명할 건데?”
“동전 있나?”
“나참.”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분타주는 주머니에서 철전 한 닢을 꺼내 던졌다.
강엽은 철전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웠다.
악력을 이기지 못한 철전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자 분타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철전이 얇다 해도 동네 무관에서 한두 수 배웠다고 나도 무림인입네 하고 뻐기는 놈들 따위가 할 수 있는 짓거리가 아니었다.
“말라깽이처럼 생긴 놈이 힘은 장사구만. 이름이 뭐냐, 애송이?”
“강엽.”
“나는 장경이다. 저기 있는 점소이놈은 전강이라는 녀석이지. 낭인전 중경 분타는 우리가 전부라고 보면 돼.”
엄밀히 말하면 낭인들은 낭인전에 속했다기보다는 계약 관계라고 보는 게 맞았다.
여타 무림 문파들과는 달리 낭인전은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조건 또한 없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뭘 믿고 신입에게 대뜸 중요한 일거리를 맡기겠어?”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쟁자수.”
간혹 갑자기 일감이 폭증한 작은 표국들이 낭인전에 임시 쟁자수를 의뢰하는 경우가 있었다.
임시라서 계속 고용할 필요가 없으니 품삯을 아낄 수 있고, 유사시에는 칼을 보탤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웬만한 표사들만큼 일당을 쳐주기 때문에 따로 하는 일이 없다면 단기의뢰로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당장 오늘 밤에 마실 피가 급한 강엽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 식으로 표국에 들어갈 거였다면 낭인전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인사정 때문에 오늘 밤부터 일하고 싶은데.”
“오늘 밤부터?”
“위험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쩝, 죽어도 난 모른다.”
머리를 벅벅 긁은 장경이 어디론가 가버리더니, 웬 하얀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원래 일을 맡은 놈이 앓아누워서 못 나가게 됐거든. 줄 테니까 한번 읽어봐.”
“의뢰 내용이군. 소가방이란 곳의 의뢰인가? 하명패라는 다른 흑도방파와 영역다툼을 하는데 쓸 만한 낭인을 한 명 빌려달라... 보수는 은전 열 냥.”
“오호라, 까막눈은 아니군. 가산점 십점을 주마.”
“가산점?”
“낭인전의 낭인들은 등급이 있거든. 의뢰를 많이 할수록 점수가 쌓이지. 근데 낭인들 중엔 지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천치들이 많아. 이에 낭인전주이신 낭왕께서 탄식하며 가로되, 글을 깨우친 놈들은 가산점 십점을 주라 하셨지.”
“....”
등급이 있다는 건 그렇다 쳐도 글을 안다고 가산점을 받을 줄이야.
강엽이 할 말을 잃고 침묵하자 장경이 낄낄거렸다.
“십점이면 웬만한 의뢰 한 건이지. 축하한다. 칼도 휘두르지 않고 십점을 벌었구만.”
“등급이 높아지면 뭐가 좋지?”
“의뢰비가 높아지지. 의뢰 건수도 늘어나고. 낭인이라고 괄시받지 않고 대접도 받고.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거다.”
“...무공을 배운다고?”
“제대로 무공을 익힌 낭인놈들이 얼마나 되겠냐? 하지만 자비로우신 낭왕께선 공적만 쌓으면 누구나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지. 가장 낮은 등급만 되어도 꽤 괜찮은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거다.”
그러려면 의뢰를 완수해야 한다.
강엽이 낭인전에 들어올 수 있는지는 첫 의뢰의 성패에 달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군. 참고하지.”
의뢰를 받았으니 완수하는 일만 남았다.
종이를 챙긴 강엽이 몸을 돌리자 장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알고?”
“모른다. 길잡이를 고용할 생각인데.”
“자, 다들 들었지? 누가 저 애송이에게 길을 알려줄 거냐!”
“뭐?”
강엽이 황당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낭인들이 밥 먹다 말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은전 두 냥!”
“이 양심뒤진 씹새야! 뭔 길안내 가지고 두 냥이나 처받아!? 이보쇼, 형씨! 한 냥만 주이소!”
“난 반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한 표정을 된 강엽의 어깨를 장경이 툭툭 쳤다.
“길안내도 의뢰니까. 이번엔 네가 의뢰주지. 목적지가 멀진 않으니 반냥이 적당하다고 본다.”
“....”
결국 강엽은 의뢰를 받기에 앞서 의뢰를 맡기는 신세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길을 모르는 이상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 * *
강과 접한 포구엔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대형 창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강엽이 받은 의뢰 장소는 그중 하나였다.
“자, 여기가 사빈로요.”
여기까지 안내한 낭인이 손을 내밀었다.
강엽이 은전 반냥을 올려두자 낭인은 짐짓 과장된 기색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용해주셔서 고맙소, 손님! 좋은 밤 보내쇼!”
“...그쪽도.”
낭인과 헤어진 뒤에 좀 걷고 있자니 모닥불을 쬐고 있는 칼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칼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그들은 강엽이 오자 인상을 험악하게 치떴지만 그걸로는 강엽의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소가방인가?”
“그러는 그쪽은?”
“낭인전에서 왔다.”
의뢰서를 꺼내서 보여주고 나서야 소가방의 칼잡이들은 경계를 풀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수염이 수북하게 난 털복숭이 사내가 이죽거렸다.
“반갑수다. 내가 소가방주요. 오는 길이 복잡했을 텐데 용케 찾아오셨구만.”
“...어떻게든 방법이 있더군.”
길을 몰라서 길잡이를 고용했다는 말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삼켰다.
“의뢰 내용이야 대충 아시겠지만 오늘 밤 하명패 개잡놈들과 싸울 거요. 아마 쪽수는 대충 비슷할 텐데, 그짝도 고수를 고용했을 테니 마음 단단히 잡수쇼.”
소가방이나 하명패나 뒷골목 하류인생들의 방파였다.
가진 재산도 넉넉지 않은 삼류방파들이 데려온 고수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나.
숙지해야 할 사항을 모두 들은 강엽은 소가방과는 외따른 곳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오늘 하루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에 흡혈을 하지 못했음에도 몸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싸우는 중에 흡혈욕이 폭주하는 일만 없다면 첫 의뢰는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형님, 저놈 정말 믿을 수 있을까요? 멸치처럼 생겨가지고 어째 영 믿음이....”
“쓰벌, 이제 와서 별 수 있것냐. 이미 돈까지 냈는데... 저눔아가 잘 싸우길 빌어야지.”
소가방의 칼잡이들이 수군거렸다.
강엽이 비쩍 마른 몸으로 잘 싸울 수 있을지, 혹시 그들이 사기를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됐다.
흡혈귀의 초감각을 지닌 강엽은 당연히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멋대로 떠들도록 놔뒀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지면 저런 소리는 쑥 들어갈 테니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었다.
“온다.”
수십 개의 기척들이 다가왔다.
강엽이 벌떡 일어나서 시선을 멀리 향하자 소가방의 칼잡이들도 자연스럽게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도착했다.
“하하! 오랜만이구나, 소가야!”
저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맹가놈이 기가 살았구만.”
소가방주가 콧방귀를 킁 뀌었다.
얼마나 대단한 고수를 데려왔는지 두고 보자는 투였다.
하지만 막상 하명패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근육질의 거한이 하명패주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저 덩치는 대체 뭐여?”
“우리도 어렵게 모신 분이지. 인사드려라, 거산중권(巨山重拳) 어른이시다.”
“음, 기억이 날 듯 말 듯....”
“이런 무식한 놈을 봤나. 석년에 중경 뒷골목을 피로 물들였던 고수 말이다.”
“...!”
그제서야 기억이 난 건지 소가방주와 칼잡이들의 얼굴이 물에 빠져죽은 시체마냥 창백해졌다.
물론 이제 막 무림에 발을 들인 강엽은 거산중권의 이름을 들어도 큰 감흥이 없었다.
생각보단 꽤 유명한 고수가 왔나 보다 여길 뿐.
“저자가 누구지?”
“예, 예전에 악명높았던 흑도의 고수요. 이 바닥에선 유명한 양반이었는디 어느 날 돌연 사라졌수.”
“그런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거군.”
“내 기억이 맞다면 객잔에서 웬 공자와 시비가 붙어 그와 호위들을 죽여버린 일로 현상금이 붙었수. 부잣집 아들이었나 그랬을 텐데....”
한마디로 수배자라는 뜻.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거산중권은 실로 거만한 얼굴로 수염을 쓸며 거드름을 피웠다.
“거산중권 어르신이 오신 이상 싸움은 해보나 마나지. 얌전히 말할 때 우리 밑으로 들어와라, 소가야.”
하명패주가 능글맞게 입을 놀렸음에도 소가방주는 붉으락푸르락 변할 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평생을 일군 방파를 원수 같은 놈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항복하긴 일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강엽이 나서자 장내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다른 이들을 전부 무시한 강엽은 곧장 거산중권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상금이 붙었다고?”
“네놈은 누구냐.”
“소가방에 고용된 낭인이다.”
“낭인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누가 하룻강아지인지는 견주어보면 알 수 있겠지. 말싸움할 시간이 아깝다. 덤벼.”
어차피 목적은 흡혈이었다.
오늘밤을 넘기려면 소가방주가 항복한다고 해도 싸워야 한다.
다만 앞서 현상금을 언급한 것 때문에 칼잡이들은 강엽이 현상금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강엽은 소가방의 칼잡이들이 찢어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