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3화 (12/450)
  • 3화. 낭인 (1)

    귀주에서부터 천릿길을 주파한 강엽은 사천성 동부의 대도시 중경에 다다랐다.

    굳이 중경을 행선지로 잡은 것은, 언젠가 책에서 ‘중경은 장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유역에 위치해서 수시로 안개가 끼는 데다 흐린 날이 맑은 날보다 많다’는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흡혈귀에게는 제격이지.’

    야심한 시간이라 성문은 굳게 닫힌 상황.

    도시로 들어가려면 성벽을 넘어야 하는데, 지난 며칠간 흡혈귀의 몸에 익숙해진 강엽은 관병들 몰래 들어갈 자신이 있었다.

    툭!

    야조처럼 훌쩍 성벽을 넘어 반대편에 가뿐히 착지한다.

    성벽을 순시하는 관병들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신출귀몰했다.

    ‘좋아. 도시에 들어오는 것은 성공했고....’

    은신처만 찾으면 되는 상황.

    근처에 있는 객잔을 발견한 강엽은 주렴 입구를 헤치고 들어갔다.

    주인장과 점소이는 탁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입에서 침까지 흘리고 있는 게 가만히 두면 아예 머리를 박고 잠잘 기세였기에 강엽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서 두 사람을 깨웠다.

    “헉! 소, 손님!?”

    “뭐야. 손님이라고?”

    점소이에 이어 정신을 차린 주인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강엽을 발견하고 입가의 침을 슥 닦았다.

    “이 느지막한 밤에 손님이 오실 줄은 몰랐구먼. 묵으러 오셨수? 식사도 하실 텐가? 지금 남은 건 만두밖에 없긴 한데.”

    “식사는 됐고 방하고 목욕물만.”

    “이 밤에 목욕을?”

    “셈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은전 석냥은 주셔야 되겠는데.”

    뜨거운 물을 대령하는 것부터가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커다란 목조통에 뜨거운 물을 여러번 퍼날라야 하는데, 장작을 준비하는 것부터 물을 데우는 것까지 모두 사람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방값보다 비쌌다.

    그래도 은전 석냥은 심한 바가지였지만 강엽은 군말없이 돈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오는 동안 개울에서 대충 씻기는 했어도, 뜨거운 물에서 근육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강엽이 남루한 몰골답지 않게 선뜻 돈을 내놓자 주인장도 할 말이 없는지 머리만 긁적거렸다.

    “야, 가서 물 좀 데워라!”

    점소이의 표정이 썩었지만 주인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막 깨달았다는 듯이 강엽을 곁눈질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차차, 남은 방이 별로 없수다. 좀 그늘진 방에서 묵으셔야 할 것 같은데....”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강엽은 따지지 않았다.

    볕이 잘 드는 방을 줬다면 오히려 바꿔달라고 말했을 터.

    ‘목욕은 여러번 할 거니까. 그걸로 갈음한 셈치면 되겠지.’

    누가 손해를 볼지는 두고 볼 일.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 방을 안내했다.

    * * *

    “후우.”

    욕탕에 몸을 담근 강엽이 길게 한숨을 흘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몸에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노예상인에게 잡혀서 산장에 팔리고, 흡혈귀가 되고, 중경에 왔던 과정을 돌이켜보면 참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 문제인데.’

    당장 피를 구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흑포무인을 죽이고 놈의 피를 흡입한 덕에 한동안은 잘 버텼지만 어느덧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오는 길에 산짐승 몇 마리를 잡아서 피를 마셔봤지만 흑포무인의 피를 마셨을 때와 같은 효과는 없었다.

    짐승의 피도 효과가 있다면 심산유곡에 은거해서 살 텐데, 사람의 피만 먹어야 한다니.

    ‘도시는 사람의 피를 구하기 가장 좋은 곳이야. 하지만 무턱대고 사람을 잡으면 소문이 나. 그럼 모산혈조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아도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커.’

    사람의 피를 빠는 괴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그걸 잡으려 하는 사람도 있을 터.

    협객을 자처하는 무림인들이 찾아온다고 상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그 꼴을 보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소문이 퍼질 구실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람의 피를 구하는 것이 어디 쉽겠나.

    정 안 되면 거지들에게 돈 좀 쥐여주고 피를 받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안 좋은 소문이 나는 것은 매한가지일 터.

    생각하면 할수록 조건이 까다로웠다.

    ‘사람의 피를 구할 수 있고, 밤에 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칼밥을 먹고 사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강호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 빌어먹을 흡혈귀의 삶이 그를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칼밥을 먹고 산다고 해도 어디에서 일거리를 찾는단 말인가?

    ‘모르면 물어볼 수밖에.’

    강엽은 점소이를 불렀다.

    “호, 혹시 물이 더 필요하십니까요?”

    점소이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강엽의 몸에 뗏국물이 그득했던 탓에 물을 여러번 갈았던 것이다.

    점소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제발 해방시켜달라고 호소하자 뻔뻔해지기로 한 강엽도 살짝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먼산을 돌아봤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겁먹지 마라.”

    옆에 둔 전낭에서 은전을 꺼내자 점소이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안색이 밝아졌다.

    “어, 얼마든지 물어보십쇼!”

    “중경에서 얼마나 살았지?”

    “태어난 곳은 좀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쭉 여기서 살았습니다요.”

    “그럼 중경에 대해 빠삭하겠군.”

    “구석구석 모르는 데가 없습죠. 쇤네가 이래봬도 점소이계의 마당발입니다요!”

    “오호라.”

    강엽이 입가를 올렸다.

    다소 과장이 섞였다 할지라도 이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면 아는 것이 많겠다 싶었다.

    “중경에 무림인을 고용하는 곳이 있을까?”

    “무림인... 말씀입니까요?”

    “그래.”

    “표국이나 상단이 있긴 합지요.”

    강엽이 고개를 내저었다.

    표국이나 상단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밤에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했다.

    하물며 피를 구해야 하는데, 표국이나 상단에 들어간다고 매일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건 없고?”

    “그, 글쎄요. 쇤네도 잘....”

    “마당발치고는 모르는 게 많은걸.”

    강엽이 은전을 넣으려고 하자 점소이가 기함했다.

    “자, 잠깐만요! 방파! 흑도방파도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정말로요?”

    점소이가 떨떠름해했다.

    흑도라면 대개 뒷골목의 무림을 일컫는 말인데, 흑도방파치고 제대로 된 곳은 찾기 힘들었다.

    흔히 백도 무림인들은 흑도와 얽히는 것만으로도 오물이 묻은 것마냥 불쾌해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건데....

    “정말로 괜찮으니 말해봐라.”

    “그, 근자에 여러 흑도방파들에서 칼잡이들을 구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요. 흑도방파들끼리 영역싸움을 한다고 하던데... 좀 큰 곳은 낭인전(浪人殿)의 낭인들을 고용한다는 소문도 돌구요.”

    “낭인전?”

    “모르십니까요?”

    점소이가 눈을 껌벅였다.

    마치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에 강엽은 살짝 울컥했다.

    외인이 중경에 있는 무림 문파를 모를 수도 있지, 그걸 모른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내가 멀리서 와서 그래.”

    “하지만 쇤네가 듣기로는 낭인전은 대륙 전역에 분타가 있다고....”

    “.......”

    강엽의 눈매가 얇아지자 뒤늦게 분위기를 살핀 점소이가 식은땀과 함께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 다른 지역에선 낭인전이 유명하지 않나 봅니다.”

    “됐고, 낭인전에 대해서나 말해봐라.”

    점소이의 말은 이러했다.

    낭인전은 이름 그대로 낭인들이 모이는 방회인데, 일정량의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낭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준다고 한다.

    “중경뿐만 아니라 사천의 웬만한 도시들엔 낭인전의 분타가 하나씩 있습죠. 거기선 낭인들 실력에 맞는 일거리를 준다고 합니다.”

    “일종의 거간꾼이로군. 보수는?”

    “객잔에 들르는 낭인들 말로는 꽤 쏠쏠하다던데요.”

    일거리를 입맛대로 고를 수 있고, 매번 싸움에 나설 수 있으니 강엽의 입맛에 딱 맞았다.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지?”

    * * *

    바로 낭인전을 찾지는 않았다.

    목욕을 끝냈을 때는 막 동이 터오를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강엽은 창문을 모두 닫아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몸상태를 점검했다.

    흑포무인을 죽인 이후로는 사람을 습격하지 않았기에 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흑포무인을 죽이고 남은 피를 물주머니에 담아서, 갈증이 날 때마다 조금씩 홀짝거린 게 전부였다.

    사실 피는 오래되면 굳거나 썩기 마련이지만, 혈공진기를 흘려넣으면 피가 신선하게 유지되었다.

    ‘아마 혈공진기에 피의 성질에 간섭하는 특성이 있는 거겠지만... 나도 이건 잘 모르겠군.’

    그러나 조금씩 아껴가며 마신 피도 중경을 목전에 뒀을 무렵엔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하루는 버틸 만해. 하지만 그게 이틀, 사흘이 되면...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들어지겠지.’

    그러니 오늘밤엔 반드시 낭인전을 찾아가야 한다.

    밤이 오자마자 객잔을 나선 강엽은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점소이의 말에 따르면 중경에 있는 낭인전은 남쪽 외곽의 유흥가에 자릴 잡았다.

    머지않아 유흥가에 도착한 강엽은 온갖 군상들이 모인 불야성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칼을 찬 무림인들과 호객을 하는 장사꾼들, 남정네들을 꾀는 기녀들, 그 꾀임에 얼굴을 붉히는 순진한 유생들, 행인들의 전낭을 호시탐탐 노리는 소매치기까지.

    마치 세상사 모든 군상들을 한 곳에 모아둔 것 같지 않은가.

    하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엔 문제가 생기기 마련.

    유흥가가 워낙 복잡한 탓에 길이 헷갈린 강엽이 상인에게 정확한 방향을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이 새끼! 눈깔 똑바로 안 뜨고 다녀!?”

    칼을 찬 무림인과 어깨를 부딪쳤다.

    ‘이건 뭐 하는 병신이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니고 살짝 닿은 걸로 욕을 퍼붓다니.

    아무리 봐도 일부러 시비를 건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지만, 같이 다니는 남자들까지 덩달아 당황했다.

    “이봐. 의뢰 뺏겨서 화난 건 이해하는데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건 좀 아니잖아.”

    “미안하우, 형씨. 대신 사과할게. 이 친구가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흥분했수다.”

    오죽하면 동료들이 말릴까.

    흥분해서 강엽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남자는 동료들한테 붙잡히고 나서도 한동안 씩씩거렸다.

    그때 강엽이 불쑥 물었다.

    “낭인전인가?”

    말린 사람의 입에서 의뢰라는 말이 나왔다.

    이들의 무기와 복장이 제각각이고, 근처에 낭인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마도 낭인전 소속일 터.

    “...그건 왜 묻지?”

    “낭인전을 찾고 있는데 길을 몰라서.”

    “아, 의뢰인인가 보군. 낭인전은 저쪽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건물 세 개를 지나치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청송객잔이라고 있어. 바로 거기야.”

    강엽의 차림새가 단촐한 데다 무기도 휴대하지 않아서 의뢰를 맡기러 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굳이 정정해줄 이유가 없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가려는데 조금 전에 시비를 걸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한테 맡기면 되지 않나?”

    “...?”

    강엽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애당초 의뢰주도 아니니 맡길 의뢰도 없지만,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다른 낭인들도 기함했다.

    “그게 뭔 소리야!”

    “왜,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분타주 그놈이 맨날 거지같은 의뢰만 주잖아!”

    “그야 우리가 신참이니까 그렇지. 좀만 참아봐. 우리도 상위 의뢰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이런 씨발, 잘도 받겠다!”

    아무래도 남자는 분타주의 일처리에 불만이 있는지 분타주를 잘근잘근 씹었다.

    강엽이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의뢰인이 아니라서. 일거리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을 것 같다.”

    “뭐?”

    황당해하는 낭인들을 뒤로한 채 강엽은 행인들 틈바구니를 빠져나가면서 사라졌다.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광경에 거리에 남은 낭인들은 얼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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