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2화 (11/450)

2화. 괴물 (3)

강엽이 모산혈조의 방에서 나온 것은 오경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야율산산이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강엽이 챙긴 것은 얼마 없었다.

산장 어딘가에서 찾은 피풍의와 죽립을 걸치고, 등 뒤에 작은 바랑을 멘 게 전부.

그걸로는 산장의 재화 중 일할도 가져갈 수 없지만 강엽은 챙길 만큼 챙겼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충분하다. 내가 원한 ‘귀물들’은 모두 챙겼어.”

“...귀물들이요?”

가치에 비해서 부피가 작은 보석이나 금괴일까?

야율산산이 눈치를 보았다.

“나머지는 우리가 가져가도 된다고 했죠?”

“어차피 빙궁이 없었다면 털지도 못했을 거다.”

강엽이 챙기지 못한 보물들은 빙궁이 차지했다.

나중에 모산혈조가 뒷목을 잡을 걸 생각하면 남은 보물을 몰아줘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문득 야율산산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음, 혹시... 빙궁에 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빙궁에?”

“빙궁에 사술이나 술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지만, 그걸 고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야율산산은 차마 흡혈귀라고 말하지 못했다.

강엽이 그걸 언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일단은 개인적으로 알아볼 생각이다.”

평범한 의원은 고치지 못한다.

어쩌면 천하제일의 신의가 와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흡혈귀는 병이 아니니까.

‘근본부터 바뀐 거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어도 속알맹이는 다르다.

실제로 강엽은 흡혈귀가 된 이후로 자신이 내면부터 바뀌어가고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라도 성수장(聖手莊)에 가보세요.”

“성수장?”

“제가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에요. 중원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신다는 신의가 계세요.”

“...기회가 되면 꼭 들르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대단한 의원이라면 흡혈귀를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강엽조차 모르는 흡혈귀의 비밀을 알아낼지도 모르지 않나.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터.

그 말을 듣고서야 야율산산이 말갛게 웃었다.

“참. 떠나기 전에 이름 좀 알려주세요. 공자님은 제 이름을 아는데 전 공자님 이름을 모르잖아요.”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야율산산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신은 그녀의 이름을 알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게 돼버렸다.

고개를 숙인 강엽이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강엽이다.”

“...읏!”

야율산산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왠지 새하얀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는 것만 같은 모습.

피식 웃은 강엽은 빙궁의 무사들과도 눈인사를 나누었다.

지은 죄가 있는 아설하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그 옆엔 빙궁의 사람들과 당분간 같이 가기로 한 우발이 강엽을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이런 방식이 가장 나을지도 모르지.’

강엽이 몸을 돌렸다.

“그럼 건강하게 지내라.”

“...공자님도요.”

야율산산과의 작별을 뒤로한 채 강엽은 쪽빛으로 물들어가는 밤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동이 트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길을 서둘러야 했다.

* * *

강엽은 후회했다.

“젠장, 이거 생각보다 꽤... 힘든데....”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태양볕.

날붙이에 베이고 찔려도 재생력 덕분에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건만, 태양볕의 고통 앞에선 그런 재생력조차 무색해졌다.

마침 태양볕이 맨손에 닿자 살갗이 타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큭...!”

치이이익!

얼른 피풍의로 가렸음에도 살점이 녹아내리다시피 했다.

뼈가 드러난 손은 서서히 아물고 있었지만, 이전만큼 빠르게 회복되진 않았다.

‘치명적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목내이가 괜히 경고한 게 아니었다.

만약 사방이 훤히 노출된 장소에서 태양볕을 쐬었다면 그 자리에서 잿더미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나마 먹구름이 와서 망정이지.’

서쪽에서부터 몰려오는 먹구름.

하늘이 흐려지자 태양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쏴아아아아아!

굵직한 장대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아도 지금이야말로 태양을 피할 적기였다.

한동안 산 속을 누빈 강엽은 암벽 사이에 숨겨진 작은 동굴을 발견하고 냉큼 들어갔다.

태양이 목숨을 위협하는 만큼,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날이 저물 때까지는 숨어있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답답하긴 했다.

‘좀 심심한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기분.

강엽은 시간을 때울 겸해서 바랑에서 주섬주섬 서책을 꺼냈다.

그것은 모산혈조의 서가에서 훔친 모산파의 술법서였다.

“.......”

빗소리 속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낮게 깔린다.

본디 모산파는 진나라 사람인 위존자가 개파한 유서깊은 도문.

따라서 술법서 역시 도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강엽은 어쩐지 술법서의 구결이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읽어본 도가 경전은 도덕경을 비롯해 기본적인 몇 가지밖에 없는 강엽으로서는 퍽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군.’

흡혈귀의 피에 잠재된 영성(靈性)이 그걸 가능케 했다.

그것도 그냥 흡혈귀가 아니라 진조의 영성이 아닌가.

비록 강엽은 술법에 문외한이지만 그에게 피를 물려준 목내이는 진혈강림대법을 창시할 만큼 술법에 정통했던 존재.

그의 후계자가 된 강엽은 흡혈귀의 능력은 물론이고 술법에 대한 재능까지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 당장 익히는 건 무리겠지만... 공을 들일 가치는 있겠어.’

훔친 술법들을 일부라도 익힐 수 있다면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하지만 얼마 안 가 강엽은 비급을 내려놔야 했다.

뜻밖의 불청객이 동굴 밖을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불청객도 동굴에 선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 누가 있는가?”

‘음?’

공교롭게도 불청객과는 구면이었다.

설마 산장을 나오고 나서 이자를 만날 줄이야.

“혹시 장로님의 제자인가?”

불청객은 아직 강엽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기사 술사들의 법복을 입었으니 모산혈조의 제자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럼 이용할 건덕지가 있겠지.’

강엽은 배를 잡으면서 끙끙 앓는 신음을 흘렸다.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자가 마음껏 착각하도록.

뇌옥에서 보고 들은 게 있었기에 흉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쳤나 보군. 금창약이 줄 테니 기다리게.”

말은 그러면서도 칼자루를 움켜잡고 있는 것이 수상쩍은 기미가 보이면 바로 칼을 뽑을 기세였다.

아설하와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무림 고수들이 얼마나 빠른지 배운 강엽은 상대가 제 기량을 발휘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입은 흑포 자락이 자신의 간격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고통에 허덕이는 모습을 연기했다.

“끄윽...!”

“자네 정말 괜찮나?”

좀 더 가까이 왔다면 좋았겠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일정 반경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강엽은 상대의 신중함에 혀를 차면서 거리를 쟀다.

상대가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갈 수밖에.

‘지금이다!’

강엽이 땅을 박차며 뛰어들었다.

* * *

흑포무인은 섬전처럼 반격했다.

동굴이 어두운 데다 강엽이 머리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뭔가 께름직한 예감이 들었고, 가까이 와서야 뭐가 이상한지 깨달았다.

‘이놈은 술사가 아니다!’

강엽에게서는 모산파 술사들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굶주린 맹수를 맞닥뜨린 것마냥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감을 신뢰했다.

“이놈!”

전광석화처럼 뽑혀나온 칼날이 어둠을 꿰뚫었다.

강엽은 피하지 못했다.

아니,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동굴의 천장이 낮고 너비도 좁았기에 흑포무인에게 허락된 공간은 한정되었던 것이다.

흡혈귀가 되면서 얻은 초감각이 숙련된 무인의 움직임을 손금처럼 들여다봤다.

시선과 표정, 근육의 움직임, 칼끝이 향하는 방향까지.

칼집에서 벗어난 칼날이 향한 곳엔 심장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강엽은 몸을 살짝 틀었다.

내력이 깃든 칼날이 근육을 찌르고, 늑골과 폐부를 가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전해진다.

“흐읍!”

강엽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쨌든 심장을 피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흑포무인의 팔뚝을 붙잡아서 단단히 옥죄였다.

폐부를 관통한 칼날을 더 깊숙이 밀어넣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흑포무인이 흠칫 굳어졌다.

이제야 강엽을 알아본 걸까?

“네놈은...!”

콰작!

“끄아악!”

날카로운 송곳니가 흑포무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어젯밤 강엽은 빙궁의 눈치가 보여서 피를 마시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산혈조 다음으로 강한 흑포무인의 피를!

쭈와아아아악!

흡혈의 쾌감이 고통을 눌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흑포무인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면서 창백해졌고, 반대로 강엽의 힘은 강해졌다.

흑포무인은 강엽을 죽이려면 몸통을 파고든 칼날에 대량의 내력을 주입하여 칼날을 폭발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칼날이 터져나가면 그 조각들이 심맥을 찢어발길 테니 흡혈귀라고 해도 무사치 못할 터.

그러나 흡혈의 여파인지 내공이 이어지지 않았다.

“꺼걱...! 끄윽...!”

마침내 만족할 만큼 포식한 강엽이 손으로 툭 밀치자 흑포무인은 매가리 없이 쓰러졌다.

송곳니에 뚫린 목덜미가 간헐적으로 피를 토해낸다.

“더럽게 아프군.”

강엽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등까지 빠져나온 칼날을 빼냈다.

칼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람에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다만 피를 가득 마셨기 때문인지 생각보단 견딜 만했다.

칼날을 빼내자 근육이 수축하면서 출혈이 멈추었고, 뼈와 장기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모산혈조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흡혈귀의 불사력을 목격한 흑포무인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큭, 크크...! 이게 흡혈귀란 말이지...? 장로가... 끅, 괴물을 만들었어....”

“뭘 새삼스럽게. 누가 들으면 흡혈귀 처음 본 줄 알겠군.”

휘하의 부하가 목내이에게 피를 빨려 절명하는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흑포무인이 쓰게 웃었다.

“젠...장, 그렇지. 나도 당할 줄은 몰랐는데....”

“모산혈조를 호위해야 할 놈이 왜 홀로 움직이는 거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산장에 돌아온 거냐?”

“....”

흑포무인은 대답하는 대신 강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흑포무인의 심중을 파악한 강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온 거였나.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다니 그 늙은이도 참 어지간한걸.”

“흐, 흐흐... 동감한다. 참... 지랄맞은, 끄윽... 늙은이지. 그 나이 처먹고, 욕심만... 많아서 말이야....”

가진 피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흑포무인은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모산혈조를 욕하면서 죽었다.

“.......”

강엽은 흑포무인의 눈빛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신색을 가라앉혔다.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요 근래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큰 감흥이 일진 않았다.

다만 이런 광경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흡혈귀가 사람의 피를 먹는 한 어쩔 수 없이 겪는 숙명일 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시작됐군.’

우우우우웅...!

위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은 피가 빠르게 소화된다.

변화를 감지한 강엽은 즉시 바닥에 주자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흡혈귀가 피를 마시는 이유.

그건 피에 내재된 타인의 선천지기를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강엽이 흡수한 흑포무인의 선천지기는 그의 전신 경맥을 돌면서 한 점으로 수렴했다.

세인들이 단전이라고 부르는 곳, 바로 아랫배의 기해혈을 향해서.

‘혈공(血功)....’

목내이가 만든 내공심법.

오직 흡혈을 통해서만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흡혈귀 전용의 독문심법이었다.

내가 호흡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혈공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맥을 돌며 단전을 키우고 있었다.

이윽고 운기가 끝났을 때.

강엽의 눈에선 섬뜩하리만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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