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괴물 (2)
강하다.
강엽은 직감했다.
이 노파와 싸우면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단순히 지는 것을 넘어 목이 썰릴 것 같은 예감.
오척 단신의 노파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강엽은 모산혈조라는 노마두가 싸우는 모습을 목도한 바가 있었다.
이 노파가 모산혈조만큼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흡혈귀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도망쳐라. 다음을 기약해라.’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몸을 돌리면 죽는다.’
노파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고 도망치는 것은 순진한 일.
“노인장께서는 누구십니까?”
“네가 잡은 아이와 같은 곳에서 온 늙은이란다. 그러는 아해야말로 누구인고?”
“별 시답잖은 이유로 살을 맞을 뻔한 불쌍한 피해자입니다.”
“거참 이상하구나. 이 할미의 눈에는 아해가 우리 궁의 아이를 겁박하는 걸로 보이는데.”
“어쩌겠습니까. 다짜고짜 죽자고 덤비는데. 일단 잡아두고 시시비비를 가려야지요.”
“산산 그 아이와는 무슨 관계더냐?”
“그게 누굽니까?”
“네가 말한 금발의 소녀 말이다. 야율산산. 우리 궁주님의 금지옥엽이지.”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그녀가 한번도 자기 이름을 말한 적이 없으니까요.”
“음, 하긴... 그 아이가 목을 다쳐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지. 살기 위해 같이 싸웠다고 했느냐?”
‘이미 다 듣고 있었군.’
우연히 아설하가 위기에 처한 것을 발견한 게 아니라 저간의 사정을 꿰뚫고 있던 것이다.
언제부터 그들의 싸움을 보고 들었는지 몰라도 일이 어찌 돌아갔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터.
노파는 아설하부터 야단쳤다.
“설혼대주라는 녀석이 공녀와 부하들을 놔두고 적들부터 쫓다니. 네 성격이 급한 것은 알았지만, 오늘 일을 보니 실망을 금치 못하겠구나. 공녀의 호위로 적합한 인선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야.”
“...붙잡힌 마당에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돌아가면 일년 면벽을 명하겠다.”
아설하는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안 그래도 사지를 묶였기 때문에 더 처량하게 보였지만 강엽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노파를 응시하며 말했다.
“야율산산이 제정신이라면 저에 대해 말했을 터.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역시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군요.”
“아해의 말이 맞단다. 산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그래도 모산혈조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은 궁의 무사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수 있겠지?”
노파가 강엽을 여태껏 놔둔 이유였다.
아설하와는 다르게 그녀는 존재감만으로 강엽을 꽁꽁 묶었기에 힘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
강엽이 입을 다물었다.
야율산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려면 진혈강림대법과 목내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그럼 필연적으로 자신이 목내이의 뒤를 이어 흡혈귀가 되었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될 터.
그 모든 전말을 알고도 노파가 자신을 살려둘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흘흘, 말하기 싫은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이 할미는 꼭 들어야겠는데....”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기세를 뿜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강엽은 태산이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압박감을 받고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애액!
밝은 섬광이 밤하늘을 갈랐다.
워낙 높은 곳까지 올라갔기에 교목들이 빽빽이 자란 숲 속에서도 훤히 보였다.
“궁의 무사들이 쏜 신호탄입니다!”
“그렇구나.”
노파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강엽을 돌아봤다.
“아해가 운이 좋구나. 저 신호탄은 공녀가 깨어났으니 귀환하라는 뜻이다.”
“...!”
“하지만 이 상황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 아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산산의 말을 들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 거짓부렁을 늘어놓은 거라면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집어치우라는 경고였다.
아설하처럼 노파 역시 강엽을 믿어야 할지 반신반의했기에 강엽을 데리고 가려는 것이다.
“싫다고 해도 끌고 가시겠군요.”
“네가 산산과 인연이 있다면 그 아이가 무사한지 궁금하지 않겠느냐?”
강엽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야율산산의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셈이지만 그녀가 제정신이라면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좋습니다. 가시죠. 대신 야율산산이 제 신원을 보증하면 저를 고이 놓아주셔야 합니다.”
“나 빙오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 * *
야율산산은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누군가와 나눈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조바심이 그녀로 하여금 몽롱한 꿈속의 바다에서 나가도록 독촉했다.
“헉!”
“공녀님!”
야율산산이 헛바람을 삼켰다.
깨어난 직후라 눈빛이 흐리멍텅했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공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속하 아설하입니다! 빙오선 장로님께서도 오셨습니다!”
“아설... 빙오 장로...?”
목이 메어서 중간중간 툭툭 끊기는 목소리.
하지만 아설하는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야율산산을 꼭 껴안았다.
“예, 그렇습니다! 송구합니다, 공녀님! 속하가 불민하여 공녀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설하 언니. 숨 막혀! 나 죽어!”
아설하의 가슴팍에 묻힌 야율산산이 켁켁거렸다.
하마터면 공녀를 질식시킬 뻔한 아설하가 얼굴이 벌게져서 허둥지둥대며 놔주었다.
그때 빙오선이 나섰다.
“이 할미를 알아보겠느냐?”
“장로님께서 여긴 어떻게...?”
“네가 납치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받았거늘 어찌 한가하게 궁에서 기다리겠느냐?”
궁의 무사들이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공격받고, 야율산산이 납치당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빙궁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빙오선이 궁주의 부탁을 받고 노구를 이끌고 먼 북해에서 귀주성까지 달려온 것이다.
경공만 따지면 궁주를 능가하는 그녀는 며칠 만에 수천 리에 달하는 길을 주파하여 귀양까지 왔다.
이후 궁의 무사들이 남긴 밀마를 발견하고 무릉산맥의 장대하고 험준한 기슭에 숨겨진 산장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왔을 때는 야율산산이 구조된 뒤였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곁을 지키고만 있었다.
그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태동한 것을 감지하고 한달음에 아설하가 싸우는 곳까지 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강엽이 어떤 상처를 입든 순식간에 재생하는 것까지 본 것이다.
그것만 해도 팔십년 노강호 인생에서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건만, 그녀의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야율산산은 목소리를 되찾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녀가 나았다는 것만 알 뿐.’
‘그럴 리가....’
야율산산은 주화입마에 걸렸다.
십이경맥 중 세 군데가 꼬였고, 그중 인영혈이 지나는 족양명위경맥이 심하게 꼬이는 바람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북해에서 제일 고명한 의원조차 두 손 두 발 들어서 중원에서 신의라 불리는 의원을 찾아간 것이다.
한데 뜬금없이 나았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결국 저 아해의 말이 맞았구나.’
강엽은 벽에 기댄 채 야율산산이 깨어나서 고향 사람들과 해후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야율산산이 알아보기 전까지는 먼저 나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느냐?”
“...네. 그런데 죄송해요.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이유가 있겠지?”
“약속을 나눴어요.”
그 말에 빙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강엽을 돌아보았다.
자연히 야율산산도 그들의 시선을 쫓았다가 벽에 기댄 강엽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공자님!”
“...정말 아는 사이였나?”
아설하가 뜨악해서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상전의 지인을 죽일 뻔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 살심을 품지는 않았어도 공격했다는 것은 명백하니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빙오선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설혼대주.”
아설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물론 당시엔 강엽의 정체를 몰랐으니 힘으로 제압하고 전후사정을 알아본다는 선택은 합당했다.
다만 강엽이 야율산산과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싸운 사이라는 게 문제였다.
만약 공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죽였다면 천하의 몹쓸년이라고 욕먹으며 손가락질당했을 터.
얼굴이 화끈거리고 수치심이 들었지만 아설하는 자신의 실수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강엽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왜 언니가 사과를 해요?”
사정을 모르는 야율산산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로 오해가 쌓인 게지. 이번엔 우리가 잘못해서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다만....”
“공자님은 절 구해줬어요. 절 구해줄 필요가 없었는데도요.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단언컨대 전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빙오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엽은 서로 목숨을 빚졌다고만 했을 뿐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율산산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더 많은 구명지은을 입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는구나.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할 수 없다니. 저 사내와 약속을 나눴느냐?”
“아, 아니에요.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존재예요.”
뭔가 횡설수설하는 말투였지만 빙오선은 이 자리에서 자세히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야율산산의 눈빛에서 공포를 엿봤기 때문이었다.
빙궁의 장로인 그녀가 있는데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던 걸까.
그때 야율산산이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야율산산은 강엽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안다.
그녀와 우발을 살리기 위해 목내이와 거래를 했고, 그 결과 흡혈귀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은 조금 달랐지만 야율산산도 목내이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공자님이 없었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벼랑에서도, 동굴에서도, 그... 세상에서도. 공자님은 제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주셨어요.”
이건 강엽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빙궁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강엽이 자신을 세 번이나 구해주었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우회적인 경고.
상전의 은인을 죽일 뻔한 아설하는 다시 한번 얼굴이 누렇게 떴고, 빙오선도 쓰게 웃었다.
“이 늙은이도 실례가 많았소. 늦었지만 공자가 겪은 일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오.”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지은죄가 있다 해도 그녀 같은 노강호가 새파란 애송이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말투도 달라지지 않았나.
“고개를 드십시오. 서로 간에 쌓인 오해를 풀었으니 은원은 남지 않았습니다.”
꼬투리를 잡아봤자 좋을 게 없다.
강엽의 입장에서는 이쯤에서 빙궁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떠나는 게 가장 깔끔했다.
빙오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한은 풀었지만 은혜가 남았소. 천하의 모든 문파가 그렇듯 북해빙궁 역시 은원을 잊지 않는다오. 공녀의 목숨을 세 번이나 살려주었으니 우리 역시 공자에게 셈을 치러야 저울의 추가 맞을 터.”
강엽이 야율산산을 돌아보자 그녀는 얼른 받으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빙오선이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늙은이의 보은패요. 언젠가 이걸 갖고 북해에 찾아오면 빙궁의 사람들은 공자를 은인으로 맞이할 것이오. 설령 이 늙은이가 죽은 이후라도 말이오.”
‘빙궁에 찾아갈 일이 있을까?’
북해에 있다고 했으니 장성 넘어 새외까지 찾아가야 할 텐데 그럴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받아서 손해를 볼 일은 없었기에 강엽은 빙오선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혹시 달리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시구려. 우리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주겠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돈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든, 다른 곳으로 가든 일단은 돈이 있어야 뭐든 해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강엽은 다른 걸 물었다.
“모산혈조는 어찌 됐습니까?”
“그는 도망쳤소. 모산파의 제자들과 혈교의 악귀들이 목숨 걸고 호위했다고 하오. 어쩐 일인지 궁의 무사들이 덮쳤을 땐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던데....”
“그럼 이 산장은 빈집이나 다름없군요.”
“일단은 그렇소만.”
지금은 불의의 기습을 받고 후퇴했지만, 상황이 일단락되면 모산혈조 일당이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야율산산도 깨어났겠다, 빙궁의 무사들도 떠날 참이니 무언가를 약탈하고자 한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을 눈감아주셨으면 합니다.”
강엽은 산장을 약탈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