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괴물 (1)
강엽은 낯선 감각에 휩싸였다.
평생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양감이었다.
전신의 뼈와 근육,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신경, 심지어 작은 솜털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지금이라면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콰아앙!
자신을 가둔 벽을 때린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부화하듯 주먹을 연달아 내치면서 벽을 부수고 또 부수었다.
주르륵...!
갈라진 틈에서 흘러내리는 수액.
균열이 점점 커지면서 수액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이윽고 나무가 좌우로 벌어지면서 알몸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후우...!”
길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뜬다.
요사하리만치 붉은 안광이 어둠 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 남자, 강엽은 곧 위화감을 감지했다.
밤하늘을 가로지른 찬란한 은하수와 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수많은 별들. 은은한 빛을 내리쬐는 보름달과 하늘 높이 솟은 아름드리 교목들.
동굴을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나무가 암반을 뚫고 나온 건가?’
인적이 없는 숲속이었다.
나오자마자 모산혈조 일당과 대거리하는 것을 걱정했던 강엽으로서는 한시름 덜은 셈이었다.
흡혈귀가 되었다지만 이제 막 각성한 힘으로 수십 명의 무인들을 뚫고 모산혈조를 죽이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모산혈조가 빈사지경에 처했다고 해도 목내이의 세상에서도 가공할 사술을 보여줬던 작자가 쉽게 당해주진 않을 터.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적들을 몰살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는 몸을 빼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우발과 야율산산.
사실 강엽에게 두 사람을 구해줄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기껏 목내이에게 사정해서 목숨을 붙여놨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애매했다.
만일 그들이 적들의 수중에 있다면 필시 강엽을 꼬실 미끼로 쓰일 테니 자신이 돕지 않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일단은 사정을 알아보고, 구할 수 있으면 구하되... 정 안 되면 포기해야겠지.’
싸움을 피하는 게 관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이 불현듯 표정을 굳혔다.
진한 피냄새가 산바람을 타고 와서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짐승의 피가 아니었다.
“...사람?”
수풀을 헤치고 간 곳에 있는 것은 동굴에서 봤던 술사의 시체였다.
솔직히 술사의 시체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러웠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충동이었다.
시체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보자 갈증이 일었다.
피를 마시고 싶다.
시체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고 게걸스레 피를 빨고 싶다.
옛날엔 메스껍던 피냄새가 산해진미처럼 감미롭게 느껴진다.
흡혈귀가 됐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이런 식으로 자신이 괴물로 변했음을 자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후회하기는 너무 늦었지.”
설령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터.
지금 당장 자결할 게 아니라면, 거부감이 들더라도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야만 한다.
‘음, 그래도... 옷은 입고 나서 빨아야겠지?’
아무렴 짐승처럼 벌거벗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피가 좀 튀긴 했어도 원단이 붉은색이라서 입을 만했다.
술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강엽은 신발까지 신은 뒤 법복의 밑단을 조금 찢어만든 끈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멨다.
‘그런데 왜 죽은 거지?’
속곳만 입은 술사의 몸통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살갗은 시커멓게 멍들었고 표면엔 살얼음까지 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내이의 세상에서 야율산산이 장법으로 줄기들을 얼렸던가?
강엽은 술사를 죽인 게 비슷한 수법이 아닐까 추측했다.
어쩌면 술사를 죽인 흉수가 그녀와 무언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뇌리를 스쳐갔을 때.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직 살아있는 놈이 있었나?”
‘위험하다!’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바로 몸을 날렸다.
시퍼런 섬광이 술사의 시체를 나무와 함께 쪼개버렸다.
“큭......!”
간신히 피한 강엽이 이를 꽉 물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찰나의 간극에 생사가 나뉘었다.
흉수가 제법이라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놀라운걸. 그걸 피할 줄이야. 한데 저놈은 내가 죽인 술사인데... 어째서 그 옷을 입은 거지?”
백포장삼을 걸친 여인이었다.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만큼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다만 여인치고는 키가 커서 강엽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지?”
“그건 이쪽이 물어야 할 말. 네놈은 대관절 누구길래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냐?”
“진정해. 난 우연히 근처를 지났을 뿐이다.”
“한낱 비렁뱅이가 내 칼날을 피할 리가 없지. 왜 시체의 옷을 빼앗아입었는지 몰라도,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물고를 낼 것이다!”
서로 진심을 숨기니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강엽은 여인이 산장을 습격했다고 확신했지만, 한편이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만약 저 여인이 흡혈귀의 존재를 알고 있고,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온 거라면?
‘모산혈조보다 위험하겠지.’
하지만 여인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신의 말을 증명하겠다는 것처럼 당장에 출수할 기세였다.
어물쩡 넘어갈 수 없다면 다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당신의 말이 맞다. 난 우연히 지난 게 아니야.”
“진작 그렇게 나오셨어야지.”
“하지만 당신을 믿지는 못하겠군. 모산혈조를 잡으러 온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네놈이 믿고 말고는 중요치 않다. 모산혈조까지 아는 걸 보면 놈과 관계가 있구나. 순순히 실토하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얼어죽는 경험을 하게 될 거다.”
“금발의 소녀와 무슨 관계냐?”
강엽은 도박수를 던졌다.
여인이 야율산산과 관계가 있다면 반응할 터.
“감히 더러운 입으로 공녀님을 부르지 마라!”
쐐애애액!
강엽이 재빨리 반응했음에도 아까보다 곱절은 빨라진 검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갈라진 어깻죽지에서 시뻘건 선혈이 튀어올랐다.
“이런 젠장.”
강엽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인이 받은 충격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상처가 저절로 아문다니?”
깊이 갈라진 상처가 치유된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 같은 광경에 그녀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닌지 의심했다.
“지금껏 죽인 놈들은 그런 짓을 하진 못했는데... 역시 사술을 익힌 놈이었구나!”
“이봐, 난 당신이 말한 공녀와 한편이야! 살기 위해 함께 싸웠다고!”
“흥, 그 말을 믿으라고?”
여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검격을 내쳤다.
상처를 금방 재생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목이 떨어져도 살 수 있을까!”
“빌어먹을!”
강엽이 욕지거리를 토했다.
검으로 나무를 쪼개버리는 고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살려면 감당해야지!’
상처를 입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심장이나 머리만 피하면 된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흡혈귀의 생존본능이 깨어났다.
까앙!
“뭐...야?”
여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한 뼘이나 길어진 강엽의 손톱이 그녀의 검을 튕겨낸 것이다.
완전히 튕겨내진 못해서 손톱이 깨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상처는 눈 깜빡일 시간에 아물었다.
“날 몰아세운 건 어디까지나 당신이다. 그러니 죽더라도 날 원망하지 마라.”
“...!”
여인이 발작적으로 검을 뿌렸지만 강엽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펄쩍 뛰어오른 강엽이 여인의 정수리를 향해 뒷꿈치를 찍었다.
검으로 베어버리기엔 강엽이 너무 빨랐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강엽이 착지하는 틈을 타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하나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콰아앙!
발차기를 맞은 땅이 폭발했다.
풀쪼가리와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밀려난 여인이 나무를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날카로운 섬광이 강엽의 어깨며 팔뚝, 옆구리 등을 가리지 않고 찔렀기 때문에 강엽은 금세 피투성이로 변했다.
특히 팔뚝은 뼈가 반 이상 잘려나갈 정도였다.
조금만 가까웠다면 몸이 양단되었을 가공할 검세.
하지만 숨 몇 번 쉴 동안에 깨끗하게 아물어버리니 도리어 여인이 환장할 지경이었다.
“뭐 이딴 괴물이......!”
캉캉캉! 캉캉캉캉!!
검광이 빗발치고 불똥이 튄다.
강엽이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을 휘둘렀지만 성긴 그물처럼 사방을 틀어막은 검세를 뚫지 못해서 연신 고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머리와 심장만은 반드시 보호하면서 상처를 재생하니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냥 죽이는 수밖에 없나?’
앞서 선언한 것과 달리 여인은 강엽을 죽일 마음까진 없었다.
어떤 상처든 금방 나아버리는 재생력에 진저리를 치긴 했어도 일단은 목숨줄을 붙여놔서 정체를 캐고, 모산혈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 작정이었으니까.
구태여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은 우열을 일깨워주려는 의도였지만, 계속 이런 양상이 이어진다면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연신 물러나기 바쁜 상황에서도 강엽의 눈은 그녀조차 두려울 만큼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던 것이다.
‘그래. 점혈로 제압해서 못 움직이도록 하면....’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내가 이겼다.”
“뭣이?”
강엽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단순한 허세라고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미소였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여인은 보다 강한 검초로 응수하려고 했다.
그전에 강엽이 선수를 쳤다.
“헛!”
불현듯 발목을 잡힌 여인이 깜짝 놀라서 강엽을 쫓는 것도 잊고 고개를 내렸다.
수풀 사이에서 나온 붉은 줄기가 발목을 휘감았다.
“이게 뭔...!”
수십 개의 줄기들이 팔다리를 옥죄이자 비명이 터졌다.
“아아악!”
“간신히 붙잡았군.”
강엽이 땀으로 축축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일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베이고 찔렸는지 성한 구석이 없었다.
상처가 쌓일수록 재생력이 더뎌졌기 때문에 이 이상 지체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이미 첫수에 결판이 났겠지.’
싸우면서 많은 빈틈을 노출했다.
자신도 알았던 것을 여인이라고 몰랐을까.
그때마다 입맛을 다시면서도 빈틈을 찌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살의를 품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줄 수는 없는 노릇.
방심을 유도하면서 깊숙이 끌어들였고, 의도를 의심하지 못한 여인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마침 혈목(血木)이 근처에 있던 게 천운이었다.’
강엽이 주먹으로 깨부수고 나온 나무는 목내이가 수족처럼 부렸던 붉은 줄기였다.
똘똘 뭉친 줄기들이 강엽이 흡혈귀로 변하는 동안 지켜주었던 것.
본래라면 강엽이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소임을 다했겠지만, 강엽이 위기에 처하자 다시금 공명했다.
강엽은 혈목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인을 붙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고.
‘편리한 능력이지만... 여길 나가면 다시 쓸 수 없겠군.’
이제 막 흡혈귀가 되었을 뿐.
목내이처럼 흡혈귀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이익! 놓지 못하겠느냐!”
“움직이지 마라. 목 졸리고 싶나?”
지난날 노예상인에게 끌려다녔을 때처럼 팔이 뒤로 꺾인 채 손목이 묶이고, 손목을 묶은 줄기가 위로 올라가서 목과 연결된 구조.
움직이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목이 졸리는 악랄한 포박술이었다.
“당신이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다짜고짜 공격한 것도 사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도 독하게 손을 쓸 수밖에 없어.”
“웃기지 마라.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네 상전은 무사한가?”
“.......”
“무사하군. 그러니 행방을 묻지 않았겠지.”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강엽의 말대로 궁의 무사들은 야율산산을 확보했다.
다만 그들이 발견했을 땐 야율산산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만큼 일단은 산장 안에서 보호하면서, 한편으로는 도망친 적들을 추격해서 섬멸하고 있었다.
“혹시 우발이라는 자도 같이 있었나? 중년쯤 되는 포의족 사내인데, 머리는 산발을 하고 수염은 덥수룩하다. 키는 나보다 작고.”
“...이름은 모른다. 그도 정신을 잃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다면 부정할 수도 없었다.
여인이 시인하자 강엽이 재차 물었다.
“이름을 말해라.”
“...아설하.”
“소속.”
“그건....”
여인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였다.
“우리는 빙궁에서 왔단다.”
신선처럼 천천히 하강하는 백발의 노파.
그녀를 알아본 아설하가 경악성을 토했다.
“장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