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법 (8)
온갖 기묘한 사술들로 위기를 헤쳐나간 모산혈조도 이번만큼 허를 찔린 게 분명했다.
컥 하고 외마디 단말마를 남기면서 축 늘어졌다.
그러나 목내이는 그조차 허상임을 알아봤는지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도망쳤군.]
줄기에 꿰뚫린 모산혈조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간발의 차로 놓친 것이다.
“...여길 나가면 또 싸워야겠군요.”
모산혈조가 죽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에서 좌장의 유무는 큰 차이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후계자여. 놈은 선천지기의 팔할을 빼앗겼다. 안 그래도 죽을 날만 바라보고 있는 놈이 선천지기까지 빼앗겼으니 정신을 잃었겠군.]
당장 삼도천을 건너도 이상하지 않은 용태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강엽은 안심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모산혈조가 치명상을 입은 채 정신줄을 놨다면 바깥에 있는 적들도 구심점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차라리 모산혈조가 죽었다면 복수를 결의했겠지만, 어쨌건 숨이 붙어있는 이상 쉽사리 의견을 모으지는 못할 터였다.
싸울 것인지, 아니면 물러나서 숨을 고를지 의견을 모으느라 우왕좌왕하지 않겠는가.
목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콰직!
다음 순간 붉은 줄기들이 바닥을 뚫고 나와 강엽의 팔다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야율산산을 놓친 강엽이 경악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장 중요한 계산이 남지 않았느냐.]
붉은 줄기들은 강엽뿐만 아니라 우발과 야율산산까지 칭칭 감싸면서 완전히 봉했다.
[짐을 이용해서 가장 까다로운 적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좋았다. 훌륭한 차도살인지계였어. 백점 만점에 백점을 주마. 하지만... 짐에게 모든 걸 맡기고 넌 탱자탱자 놀려는 심보가 너무 고약하지 않느냐?]
“...!”
자신의 노림수가 진즉 간파됐다는 것을 깨달은 강엽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목내이의 말마따나 그를 앞세워서 바깥의 적들을 쓸어버릴 심산이었으니까.
[그게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 자고로 후방이 안정되어야 앞마당이 튼튼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서야 어찌 성장하겠느냐.]
그러니 얼른 강엽에게 불로불사의 저주를 물려주고 자신은 나 몰라라 하겠다는 말이었다.
우발과 야율산산을 붙잡은 것은 승계 작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기껏 얻은 후계자를 위험에 빠트리겠다고?”
[프흐흐, 말하지 않았느냐. 시련이 없으면 성장도 없는 법이라고. 어차피 맞을 매 좀 일찍 맞는다고 생각하려무나.]
이미 말로 설득할 단계는 지났다.
목내이는 강엽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이미 저주를 물려주고자 결심을 단단히 굳힌 상태였다.
* * *
[먼 옛날엔 온갖 요마와 괴력난신들이 창궐했다.]
이 땅에 통일된 왕조가 들어서기 전의 시절이었다.
[흡혈귀도 그중 하나였지. 그들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짐도 모른다. 다만 흡혈귀는 존재할 때부터 인간을 잡아먹고 살았지.]
당시엔 무공이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흡혈귀에 대항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흡혈귀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하늘 높은 곳을 차지하고 앉아서 세상을 굽어보는 오만한 태양이었다.]
태양볕에 노출된 흡혈귀들은 불타서 죽었다.
그 외에 순은에도 취약했지만, 그조차 태양이 준 공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흡혈귀들은 철저히 어둠 속에서 숨어살며 인간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때로 자신의 피를 인간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을 흡혈귀로 만들면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한때는 너무 많은 흡혈귀들 때문에 작은 왕국들이 멸망한 적도 있었지. 그때 짐은 깨달았다.]
흡혈귀는 강한데 인간은 약하다.
흡혈귀는 태양에 노출되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아간다.
흡혈귀가 줄지 않고 늘기만 하면 언젠가 이 땅을 사는 인간들이 멸종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흡혈귀들은 깨달았다.
[흡혈귀는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을.]
동족 사냥이 일어났다.
동족을 죽이고 피를 탐닉했다.
[동족의 피를 마시면 강해진다. 살아남은 흡혈귀들은 점점 강해졌고, 종국엔 재앙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당시엔 중원 곳곳의 선산에 자릴 잡은 도관(道觀)들을 중심으로 원시적인 무공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세월이 흘러 도관들은 현문(玄門)의 기틀을 닦았고, 천축에서 온 달마가 소림에 정착해 소림권을 창시하면서 중원 무공은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그중 한 흡혈귀가 무공의 세계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보고 매료되었다.
그는 정체를 숨기고 수많은 도관을 전전하면서 무공을 섭렵했고, 오랜 세월 심도 깊게 탐구한 끝에 마침내 흡혈귀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마공의 탄생이었다.
[짐은 그 힘으로 동족들을 사냥하여 마침내 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았느니라.]
그는 너무 강해져버렸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몸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손짓으로 땅을 뒤집고 강을 갈랐다.
천하제일의 무인이 와도, 제국의 황제가 대군을 일으켜도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게 시들시들해졌지. 이 세상의 그 어떤 지고한 쾌락도 짐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영겁의 동면에 빠졌다.
언젠가 자신이 이룩한 힘을 물려줄 후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후계자여, 너는 짐처럼 불노불사는 아닐 것이다. 하나 네 안에도 가능성은 남아있다.]
강엽이 불로불사를 이루려면 목내이가 그렇듯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련해야만 한다.
그때부터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된다.
[네가 불로불사를 바란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러나 다시는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강엽은 살기 위해서 시련을 극복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연명하는 괴물이 되는 것이었다.
[약 삼천여 명.]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울하게 끌려와서 괴물이 된 사람들은 그토록 많았다.
강엽이 저주를 계승하면서 그들의 혼(魂)은 목내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늘로 귀천했다.
하지만 백(魄)은 이 세상에 남아 강엽의 재능을 개화시킬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넌 짐이 악하다고 욕할지도 모르지. 짐은 부정하지 않겠다. 짐은 마(魔)로 태어나 악(惡)으로 살았으니. 하지만 너의 삶은 오롯이 너 자신만의 것. 네가 어떤 길을 가든 짐은 관여치 않겠노라.]
이미 목내이의 육신은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다리에서부터 천천히 흩어지는 육신을 내려다본 목내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그래. 떠나기 전에 선물을 줘야겠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강엽 외의 두 사람을 묶은 붉은 줄기들이 앞으로 끌려왔다.
줄기에서 풀려나온 두 사람이 쓰러졌다.
“크헉! 켁켁!”
“...!”
두 사람 모두 엎드려서 숨을 꺽꺽 토했다.
야율산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었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멀쩡한 신색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잡것들아.]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할까.
두 사람 모두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들자 목내이가 입꼬리를 길쭉하게 찢으면서 웃었다.
[후계자와 약속한 것이 있으니 너희들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기도 뭣하군. 그러니 나름의 조치를 취하겠다.]
“뭐, 뭘 하려고...!?”
우발이 발작하듯 소리치는 찰나 목내이의 큼지막한 손이 그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네놈은 납치된 이후의 기억을 잃을 것이다.]
강엽에 대한 것도, 이 세상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도 우발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우발이 고장난 인형처럼 털썩 쓰러지자 야율산산의 동공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목내이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짚었다.
[기혈이 꼬였구나. 필시 극음의 영약을 복용하다 주화입마에 든 것이렷다?]
야율산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혈이 꼬인 것은 그렇다 쳐도 그 경위까지 단숨에 알아낸 목내이의 통찰력이 놀라웠다.
[네 기억은 빼앗지 않겠다. 바깥으로 나가면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가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면서.
[그 보답으로 네 몸을 고쳐주마.]
야율산산의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 내려치자 야율산산이 허리를 꺾으면서 피를 왈칵 토했다.
막혀있던 혈도가 시원하게 뚫리면서 울혈을 토한 것이다.
[짐이 목숨을 살려주었고 몸까지 고쳐주었으니 그 은혜는 대대손손 갚아도 모자랄 것인즉. 너는 짐의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피를 토한 야율산산도 우발의 옆에 널브러졌기에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붉은 줄기들을 불러 두 사람을 치워버린 목내이가 후련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몸은 절반까지 사라졌다.
[너무 오랫동안 살았지. 이젠 쉴 때가 되었어.]
태곳적에 태어나서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괴물은 마침내 그토록 바랐던 영면을 얻었다.
그리고 강엽이 깨어났다.
* * *
“저 산장인가?”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산봉에 선 채 바람을 맞았다.
야밤의 산이 쌀쌀하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들의 주변에 흐르는 공기는 특히나 서늘했다.
평생을 연마한 무공의 기운이 은연중 흘러나오면서 공기를 얼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찮은 놈들이 감히 북해의 공녀님을......!”
산장을 노려보는 눈빛도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 못지않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내상을 입은 공녀를 치료하기 위해 중원에서 가장 용하다는 신의(神醫)를 찾는 여정에 올랐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 체류하던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그들이 지켰던 공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공녀를 쫓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공녀를 납치한 무뢰배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는데 공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추종술의 전문가를 대동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근 표국에서 웃돈을 주고 길을 잘 아는 표사들과 번견을 고용했고, 발품을 팔고 수소문을 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서야 공녀의 행방을 찾은 것이다.
‘암도상인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악명높은 노예상인입니다.’
‘...!’
‘소문에 따르면 그자는 표국으로 위장한 채 노예들을 운송한다고 하더군요. 표국이니 짐마차를 써도 사람들은 의심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면 공녀님은...!’
‘운이 나쁘면 이미 새외로 팔려갔을지도 모릅니다.’
중원을 빠져나가면 찾을 길은 영영 없어진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암도상인이라는 자의 흔적은 귀주성으로 이어졌다.
이후 귀양(貴陽)을 지나쳐 사람이 살지 않은 오지로 가더니, 며칠 뒤에 다시 귀양으로 돌아왔다.
암도상인을 따르는 칼잡이 중 누군가가 기루에서 술독에 취해서 이렇게 나불거렸다고 한다.
무릉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큰손이 산다고.
귀양의 마당발을 자처하는 표사들과 그들이 고용한 하오문의 도움이 없었다면 몰랐을 소식이었다.
“우리는 공녀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백색무복을 걸친 여인이 자책하며 하는 말에 무인들 사이에 숙연한 분위기가 드리워졌다.
“그러니 공녀님을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 공녀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우리의 목숨으로 공녀님과 궁주님께 사죄드리자.”
차마 불경한 망언을 입에 담지 못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공녀가 팔려간 곳은 가까스로 알아냈음에도 팔린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만약 공녀가 목숨을 잃었거나 여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면 목숨으로 사죄해야 할 터.
여인이 빠득 이를 갈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설혼대(雪魂隊), 감히 북해의 공녀님을 납치한 벌레 새끼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몰살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