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법 (7)
우발은 하늘로 ‘떨어졌다’.
모순이었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머리와 발이 뒤집히더니 머리 위에 바닥이 있었고, 다리 아래에 허공이 있었다.
하지만 강엽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우발의 입장에서는 바로 정면에 강엽의 얼굴이 아니라 다리가 있는 격이었다.
“큭, 이게 어찌된 거야!?”
“혹시나 당신이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만약을 대비한 건데 정말로 써먹게 될 줄이야....”
강엽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한 일은 간단했다.
칠성의 걸음을 거꾸로 밟은 것이다.
“처음 칠성의 규칙을 알아냈을 때 발견했습니다.”
그때는 강엽도 전혀 예상치 못하다 우발처럼 당한 것이기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그가 태극이라 이름 붙인 이 보법은 일정 반경 안쪽에서만 효과를 발휘한다.
거꾸로 된 칠성의 걸음을 완성하고 나서 일보.
거기서부터 칠보까지는 천지가 뒤집히며, 그 이후부터는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런....”
우발은 아연실색했다.
강엽의 설명은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규칙이었다.
“음과 양은 상반되면서도 돌고 도는 것. 원래 이름은 모르지만 저는 태극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다.]
목내이가 첨언하듯 덧붙였다.
[위급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수법이지. 사문에서 배운 대로만 따라한 놈은 생각하지도 못하겠지만.]
“하늘과 땅을 크게 뒤집어버린다? 태극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리는군요.”
모산혈조는 오가는 대화를 듣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깨닫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유일한 통과자라는 게 그런 뜻이었나.’
엄밀히 말하면 우발은 시험의 의미를 통찰하고 규칙을 이용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사문에서 배운 보법을 그대로 써먹은 게 우연찮게 얻어걸린 것이니까.
물론 결승점에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목내이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목내이가 말했다.
[이전의 시험에서도 무공만 믿고 우격다짐으로 짐의 앞에 온 놈들이 있었지.]
그들은 목내이를 우롱한 대가를 치렀다.
지금도 저 아래에서 먹잇감을 찾아 서성거리는 괴물들의 일부가 된 채 이 세상을 떠돌았다.
“자, 잠깐...!”
[변명은 듣지 않겠노라. 감히 꼼수로 짐의 심기를 거스른 죄는 무겁게 치르리라.]
목내이의 팔이 올라간 것과 동시에 바닥을 뚫고 나온 붉은 줄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때 강엽이 나섰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어?]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목내이는 물론 모산혈조도 강엽이 대체 왜 우발을 위해 나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통과자가 나왔는데 괴물을 늘릴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당신은 불로불사의 저주인지 뭔지를 넘기면 죽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감히 짐에게 명령하는 것이더냐!]
콰아아아앙!
목내이의 진노를 대변하듯 하늘에서 벼락이 요동쳤다.
살 떨리는 광경에 우발이 덜덜 떨었다.
하지만 강엽은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는지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담담하게 지껄였다.
“어차피 이 세상은 당신의 것. 제가 뭐라 하든 결국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겠지요.”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 네놈이 통과자라 하여 짐이 못 죽일 줄 아느냐?]
“고작 의견 하나 피력했을 뿐인데 죽인다면 애초에 당신의 그릇이 겨우 그것뿐이라는 뜻이겠지요. 역사상 그 어떤 폭군이나 암군도 황태자가 말대꾸 좀 했다고 목숨을 거둔 예는 없습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하나만 묻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뒤를 잇는다면 저 괴물들은 어찌됩니까?”
[죽는다.]
그 말에 우발이 흠칫했다가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낄낄거렸다.
“뭐야. 결국 죽일 거라는 말이잖아. 그럴 거면 그냥 깔끔하게 죽이시오. 모욕하지 말고.”
[닥쳐라.]
“...!”
우발의 입술이 하나로 붙었다.
입을 열려야 열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보아하니 네놈은 이놈과 등에 업은 계집을 살리고 싶은 게로구나. 맞느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을 준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은 좀 그렇긴 하지만... 굳이 괴물로 만들고 싶지는 않고.”
흑산괴 같은 놈들이야 괴물이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우발은 경우가 달랐다.
그가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만큼 괴물로 만들어서까지 능멸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후회?”
[저 괴물들은 네 양분이 될 것이다. 이놈들을 죽인다면 큰 도움이 될진저.]
“양분이라....”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는 않았지만 괴물을 늘릴수록 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눈 딱 감고 고개만 끄덕이면 뒷일이 편해진다.
“한때는 힘을 갈망했습니다.”
힘이 있었다면 납치되지도 않았을 거니와 이리 개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엽은 지난 몇 달간 무력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약합니다. 힘을 원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해줬습니다. 지혜는 인간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라고.”
그걸 말해준 사람이 옆에 있었다.
과거 자신이 해준 말을 들은 우발의 표정이 묘해졌고, 목내이의 표정도 묘해졌다.
“스스로를 진조라 칭하는 왕이시여, 감히 여쭙겠습니다. 당신이 주는 힘은, 고작 두 명의 인간이 없음으로 인해 쪼그라들 만큼 초라한 힘입니까?”
[.......]
목내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에 우발은 목울대만 꿀꺽 움직였다.
강엽의 손에도 진땀이 배어나왔다.
솔직히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냅다 지르기는 했는데 목내이를 구슬릴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만약 목내이가 노기를 거두지 않는다면 우발과 소녀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할 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목숨까지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천하에 다시없을 밑지는 장사였다.
‘하지만 들어준다면 빚은 청산한다.’
문득 목내이의 광대뼈가 꿈틀거렸다.
[도발하는 솜씨가 일품이군.]
목소리에 은은하게 배인 분노를 느낀 사람들은 누구라도 할 것도 없이 바싹 굳어졌다.
[짐의 후계자여, 그 건방진 태도에 대한 보답으로 너의 청을 들어주겠노라.]
“아!”
우발이 탄성했다.
영락없이 죽는다고만 생각했거늘 강엽의 말 몇 마디에 목숨을 빚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구나. 두 개의 목숨을 살리려면 두 개의 목숨이 필요한 법. 넌 저들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내놓겠느냐?]
“애초에 가진 게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뭘 내놓겠습니까? 그렇다고 불알 두 쪽을 내놓을 수는 없으니 대신 한 사람의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누구의 목숨을 말이냐?]
“저 늙은이의 목숨입니다.”
강엽이 지목한 것은 모산혈조였다.
* * *
“헛소리!”
모산혈조의 낯짝이 붉어졌다.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제물로서 끌려온 게 아니었다.
그는 목내이와 거래를 맺었다.
목내이가 후계자를 찾을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물론 그 대가로 피를 조금 덜어가겠지만, 그건 이제껏 헌신한 대가인 것을.
계획에 없이 목내이의 술법에 빨려들어오긴 했어도 목숨을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자가 설마...!’
목내이의 눈매가 휘어졌다.
강엽의 말이 없더라도 모산혈조를 제물로 삼을 작정이었던 걸까.
“약속을 깨버릴 참이오?”
[무슨 약속 말이냐?]
“이익! 내가 후계자를 찾아주면 불로불사를 준다고 하지 않았소!?”
[아, 불로불사. 그래,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지. 한데 짐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게 있구나.]
“말하지 않은 것이라니?”
[짐이 일족을 멸족시킨 이유 말이다. 그 이유를 지금 말해주마. 흡혈귀는 하나면 족하다.]
“이 괴물이 정녕...!”
콰아아아앙!
말이 끝나자마자 수백 다발의 줄기들이 바닥을 뚫고 모산혈조를 향해 짓쳐들었다.
모산혈조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 세상이 목내이의 공간인 만큼 무공을 쓸 순 없었지만, 그에겐 기괴막측한 사술들이 있었다.
그 사술들은 부적만 꺼내도 쓸 수 있으니 아둔한 무림인들과 다르게 그는 이 세상에서도 능히 목내이와 대적할 수 있었다.
그랬다고 여겼다.
[말하는 것을 금하노라.]
모산혈조의 입이 강제로 다물렸다.
[보는 것을 금하노라.]
모산혈조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듣는 것조차 금하노라.]
모산혈조는 이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
시각과 청각을 빼앗기고 진언을 외울 입조차 봉인됐으니 사술을 쓰는 것도 글러먹었다.
목내이가 세상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그러게 잘 모르는 건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콰아아아아아앙!!
수백 다발의 줄기가 덩어리가 되어 모산혈조를 후려쳤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대를 강타하자 강엽은 서 있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이 공간에서 목내이가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목내이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제법이군.]
쿠구구구구구...!
줄기를 뚫고 나온 검은 가시들.
거기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산혈조가 못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눈알을 부라렸다.
목내이의 봉인술은 그새 풀어버린 듯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짐승만도 못한 괴물 같으니!”
[어허. 누가 누굴 욕하는지 모르겠구나. 짐이 할 말은 아니지만, 너 또한 괴물이지 않은가?]
목내이가 사람의 피를 먹는 괴물이라면, 모산혈조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수천 명을 죽인 괴물이었다.
둘 다 죽으면 지옥 밑바닥을 예약해둔 몸이니 서로 욕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밖에 안 된다.
“닥치지 못할까!”
모산혈조가 꺼낸 부적에서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나오며 귀곡성을 토해냈다.
[망자인가?]
“수천 년 묵은 괴물이여, 네놈의 술법은 낡았다. 이 땅의 술법은 대를 이어 발전해 왔음이야!”
끼아아아아아아!
쿠르르릉...!
벼락치는 하늘에서 수백 마리의 망자들이 울부짖는다.
그야말로 인세에 도래한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에 우발은 몸이 뒤집힌 상태에서도 비명을 질렀다.
“시발, 이게 다 뭔 일이야! 괴물들끼리 싸우면 우리까지 휘말리는 거 아냐!?”
“...우리 편이 이기길 바랍시다.”
목내이가 이겨야 그들이 살 수 있었다.
하물며 강엽은 모산혈조를 죽이려고 했으니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였지.’
“죽엇!”
[다 사라져라.]
이번에 이긴 것은 목내이였다.
말 한마디에 하늘을 덮은 수백의 망자들이 일소된 것이다.
[여기는 짐의 세상이다. 네놈이 하찮은 재주나마 써먹으니 이길 것 같았더냐?]
“커억!”
모산혈조가 허리를 꺾고 검은 피를 토해냈다.
목내이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촤르르륵!
이번엔 핏빛의 사슬들이 바닥을 뚫고 나와 모산혈조의 사지를 뚫고 처박아버렸다.
하지만 모산혈조의 몸뚱이는 수천 장의 부적으로 흩어지면서 사슬들을 흘려버렸다.
[인정하마. 네놈의 술법은 짐조차 보지 못했던 것. 그렇기 때문에 더 탐이 나는구나. 후계자에게 선물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나타난 모산혈조가 모멸감을 느꼈는지 피 묻은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괴물 네 말대로 이 세상에서 싸우는 건 문제가 많구나. 하지만 바깥은 노부의 세상이다. 노부의 부하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제자들이 노부를 부르고 있구나. 그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능히 나갈 수 있느니라.”
허세는 아닌 듯 모산혈조의 몸이 점차 빛깔을 잃고 있었다.
목내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제자들의 도움을 빌어 스스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막지 않으마. 네놈의 선천지기를 절반쯤 가져간 걸로 만족해야겠군.]
“이, 이놈이...!”
[농담이다.]
목내이의 눈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모산혈조가 있던 자리에서 붉은 줄기가 불쑥 솟구쳤다.
사타구니에서 정수리까지 일직선으로 꿰뚫린 모산혈조를 노려보며 목내이가 중얼거렸다.
[짐은 한번 점찍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