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7화 (6/450)

1화. 대법 (6)

‘그렇군. 이놈들도 몸이 무거워진 거야.’

강엽을 둘러싼 괴물들은 얼추 열 마리.

계단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실제 숫자는 그보다 많겠지만, 올라오는 족족 계단의 압력에 걸려서 움직임이 느려졌다.

올라오자마자 피를 토하거나 짓눌린 채 끙끙 앓는 모습은 그걸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기껏 자신들을 잡으러 온 괴물들까지 압력의 영향을 받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만약 강엽이 함정의 허실을 꿰뚫지 못했다면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애초에 저 밑에서 빌빌거리고 있었을 테니 이 괴물들을 만나지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어기적댈 이유가 없었다.

괴물들이 움직이지 못할 때 얼른 빠져나가야 한다.

강엽은 계단의 ‘특정 지점’만 밟음으로써 압력을 받는 일 없이 괴물들 틈바구니를 빠져나왔다.

이 지점들은 눈에 띄지 않느나 분명히 존재하며, 조금만 틀어져도 무시무시한 압력이 닥친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강엽이 그 압력을 마주한다면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

그렇기에 혹시라도 방위를 틀리지 않도록 긴장감을 유지하며 심력을 쏟아야 했다.

문제는 괴물들이 분명 느리긴 해도 강엽을 표적으로 삼고 뒤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점점 숫자가 불어나기까지.

언젠가부터 백 마리로 늘어난 괴물들이 살기를 토해내면서 강엽을 뒤쫓고 있었고, 강엽은 그런 괴물들을 피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다른 쪽에도 비슷한 숫자가 붙었다면... 아까 잡힌 사람들만 있진 않겠지.’

적어도 수천 명의 사람들.

그들이 모두 괴물이 되었다면 미친 듯이 불어나는 괴물들의 숫자도 이해는 된다.

수천 마리의 괴물들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면 등줄기가 오싹해지지만, 이성이 없는 괴물들이 함정의 규칙을 꿰뚫어보는 일 따위는 없을 터.

‘...라고 생각하는 게 순진한 거지.’

이미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함정의 규칙을 파악하고 대응했다는 소리나 진배없다.

함정은 안배한 목내이가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두고볼 리가 없으니 변수가 발생하리라.

머지않아 그 징조가 나타났다.

‘놈들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조금씩 기민해지는 괴물들의 움직임.

본래의 움직임을 되찾으면 용빼는 재주가 없는 이상 붙잡힐 것이 명백했다.

‘위험하면 마지막 수를 쓸 수밖에 없겠지.’

처음 함정을 꿰뚫고 나서 알아낸 또 다른 규칙.

까딱하면 자신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각을 재던 강엽이 마지막 수를 쓰려고 하는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쿠구궁...!

뒤쪽의 계단이 갑자기 움직인 것이다.

“캬아아아악!”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하지 못한 괴물들이 쓰러지거나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설마 이제 와서 계단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강엽은 염통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몇 걸음만 늦었어도 저기서 떨어지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현기증이 난다.

‘...변수가 또 하나 늘어났어.’

움직인 계단은 옆의 계단과 붙고, 그 뒤의 계단은 또 다른 계단과 붙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강엽은 계단이 이어진 방향이 일정 규칙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칠성(七星) 다음은 육합(六合)이라.......”

처음에 알아낸 규칙은 칠성판(七星板)을 본따서 북두칠성의 별자리에 따라 계단을 밟아야 했다.

한데 이제는 육합까지 신경 쓰며 계단을 밟아야 하니 처음보다 훨씬 어려워진 것이다.

예를 들어 네 번째인 천권(天權)이나 다섯 번째인 옥형(玉衡)을 밟았을 때 계단이 움직인다면 다시 계단이 이어지지 않는 한 함정에 빠지는 셈이었다.

‘이 육합이 음양가의 규칙을 따른 거라면, 오행(五行)의 규칙까지 껴있을 공산이 크다.’

여기서 잘못된 방향을 택하면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우회하는 경우가 생긴다.

재수 없으면 괴물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고.

쿠구구구구궁......!

이 순간에도 계단이 연쇄적으로 움직이며 다른 계단과 맞붙고 있었기에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점이 칠성. 선이 육합. 시간이 오행이다!’

육합에 의하면 인목과 해수가 만나면 인해합목을 이루며, 오행의 상생에 의해 목은 화와 화합한다.

이는 두 번째로 긴 계단으로 이동하면 다음엔 세 번째로 긴 계단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뜻.

이 와중에도 칠성의 별자리에 맞춰 계단을 건너야 하니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예측이 조금이라도 빗나가거나 걸음을 내딛는 데 실수하면 바로 나락행이었다.

이제부턴 휴식을 취할 틈도 없었다.

강엽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계단을 올랐고, 계단의 숫자에 맞춰 이동 경로를 계산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꺾었다가 다시 우회했다.

난관은 뜬금없이 찾아왔다.

머릿속으로 계산한 대로 앞으로 나아간 끝에 한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를 발견한 강엽은 암담해졌다.

‘하필이면 이 인간이라니.’

마침 그 사람도 강엽을 알아봤다.

“너, 넌...!”

계단에 엎어진 채 빌빌거리는 거한.

그의 정체는 흑산괴였다.

* * *

“사, 살려줘....”

흑산괴가 엎어진 채로 애걸했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것은 물론 살점이 뜯겨지고 손목은 잘려나가서 정상이 아니었다.

가만히 놔둬도 죽을 것 같은 게 이미 한 발을 저승 문턱에 걸친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강엽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그는 막 칠성의 마지막인 요광(搖光)의 자리를 밟은 상태였다.

흑산괴와의 거리는 불과 열세 보.

그가 물러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중간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칠성을 완성하지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놈이 방해하기라도 해서 경로를 벗어나면 무지막지한 압력에 넙죽해질 터.

“살려달라고?”

“모, 몸이....”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뼈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흑산괴가 얼마나 큰 압력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강엽이 함정의 규칙을 파악할 동안 흑산괴는 자신의 용력과 내공을 믿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을 자각한 강엽은 우발에게 들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지혜는 인간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했던 말이 새삼 구구절절 다가왔던 것이다.

이전이었다면 흑산괴 같은 무림 고수가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터.

“내가 널 살려주면 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뭐든... 뭐든 다 할 테니까 제발...!”

“...좋아. 믿어주지. 일단 앞길 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 그래야 압력이 좀 풀려날 거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몰라도 압력을 풀 수 있다는 말에 흑산괴는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거리에 맞춰 조금씩 일보를 내딛은 강엽은 흑산괴의 옆을 지나쳤다.

멈춘 위치는 정확히 높에게서 사보 떨어진 거리.

“이, 이제... 됐지? 어, 어떻게 했는지 좀 알려줘....”

“알려주고말고. 한데 나도 좀 물어볼 게 있는데. 그 머리카락의 주인은 어찌 됐나?”

“...!”

흑산괴가 손에 쥐고 있는 머리카락.

남들의 것과 뚜렷히 구분되는 선명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흑산괴의 손에 뭉텅이로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강엽이 지하뇌옥에서 야율산산과 함께 움직였던 것을 떠올린 흑산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개새끼, 처음부터 알려줄 생각이...!”

솥뚜겅만한 손을 뻗지만, 이미 강엽은 북두칠성의 방향에 따라 걸음을 내딛은 상태.

게다가 걸음을 뗀 것과 동시에 흑산괴가 뻗은 계단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을 멀리 떨어트려놨다.

가까스로 계단의 모서리를 잡은 흑산괴가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소리쳤다.

“사, 살려줘!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말했을 텐데.”

흑산괴를 향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이제 와서 흑산괴를 단죄하거나 그에게 죽은 사람들을 대변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흑산괴처럼 살려두면 화근이 될 자를 굳이 구해줄 필요성을 못 느낄 뿐.

“어차피 널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텐데, 스스로의 인생이나 돌이켜봐라.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지.”

“아, 안 돼! 가지 마...!”

흐느끼는 흑산괴를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욕지거리와 애원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강엽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윽고 계단에서 떨어진 흑산괴가 지른 비명이 귓가에 오랫동안 맴돌았지만,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작 흑산괴의 죽음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앞으로 마주할 무수한 죽음들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어쩌면 우발처럼 뇌옥에서 만난 사람들이 적으로 돌변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를 일.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떤 고난이 따라도 살아남겠다는 각오를 견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싸웠던 금발의 소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듣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흑산괴를 처리하는 데는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 * *

[한 명이 시험을 통과했다.]

“정말이오?”

모산혈조가 놀라서 물었다.

지금껏 수천 명이 도전했어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시험을 통과한 자가 나오다니.

[네놈이 바라던 일이 아니냐?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떨떠름한 표정이나 짓는구나.]

“그야 그렇기는 하오만.......”

이곳에 와서야 시험의 내막을 들은 모산혈조는 왜 아무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는지 납득했다.

칠성과 육합, 오행에 따른 시험은 수시로 규칙이 바뀌는 함정들과 괴물들, 그리고 같은 경쟁자들로 인해 살아남는 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하물며 종국엔 내공마저 봉인된다고 하니 설령 고강한 내공의 소유자라 한들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래서야 무림인들을 넣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때 목내이가 코웃음을 쳤다.

[규칙을 알기만 하면 쉬운 시험이다. 그래도 간만에 사람다운 녀석이 나오니 좋군.]

“그래서 통과했다는 자가 누구요?”

[보채지 마라. 마침 오고 있으니까.]

과연 계단 아래쪽에서 터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덥수룩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뭐야. 내가 가장 먼저 온 건가?”

“너는... 우발이라는 놈이군.”

모산혈조는 단번에 알아봤다.

진혈강림대법을 펼쳤을 때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삼인조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

“이거 선착순 맞지? 내가 먼저 왔으니까 시험에 통과한 거 맞수?”

“그렇다. 축하한다고 해야겠....”

[기다리도록.]

졸지에 말이 끊긴 모산혈조가 기분이 나빴지만, 목내이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지금 저자가 눈앞에 있는데 뭘 또 기다리라는 거요?”

[그러니까 기다리라는 거다.]

목내이가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우발과는 다른 계단으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피투성이가 된 금발의 소녀를 업은 채로.

“하핫, 쉽게 죽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물며 짐까지 데려올 줄은.”

우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겪어본 바로 이 시험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강엽은 절대로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엽은 땀을 뻘뻘 흘릴지언정 상처 하나 없이, 게다가 소녀까지 짊어지고 정상에 올랐다.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 같지만 궁금한걸.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당연히 걸어서 왔습니다. 계단이 하도 지랄맞아서 도중에 빙 돌아오긴 했지만요.”

강엽도 우발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그가 직접 겪어본 바 이 시험은 함정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면 통과할 수 없었다.

한데 우발은 전신을 피로 목욕하긴 했어도 그보다 앞서 정상에 오른 것이다.

“걸어왔다... 하긴, 자네 체력으로 여기까지 뛰어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지. 그래도 무사히 온 걸 보면 칠성의 의미를 알고 있었나 본데.”

“운이 좋았습니다. 당신은요?”

“나도 운이 좋았지. 우연히 사문의 보법이 칠성과 관련이 있어서 말이야.”

저 말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모산혈조도 새삼스럽게 우발을 봤다.

“무당의 보법에 칠성둔형보(七星鈍形步)가 있었지. 원래 무당의 제자였나 보군.”

강엽도 무당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당파에 어떤 무공이 있는지는 모를지라도 무당파가 무림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는 잘 안다.

그런데 우발이 무당파의 제자였다고?

“정확히는 속가제자였지. 익힌 보법도 칠성둔형보가 아니라 형만 갖고 와서 새롭게 만든 보법이고. 하지만 그런 반푼이 보법으로도 이런 시험은 어찌어찌 통과할 수 있었던 모양이야.”

하긴 우발이 무당파의 본산제자였다면 먹고 살기 위해 표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포의족인 우발이 어떤 사정으로 무당의 속가제자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한데 그 녀석은 어찌 찾은 거야?”

“근처에서 주웠습니다.”

“그래서 데려왔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냐고?

우발은 기가 차서 헛헛 웃었다.

“아주 많지. 이 시험이 선착순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지. 내가 살려면 다른 사람은 죽일 수밖에 없어.”

“.......”

강엽이라고 어찌 그걸 모를까.

하지만 흑산괴와는 달리 어린 소녀를, 심지어 한때나마 함께 싸운 녀석을 끊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내 손이라... 저도 죽이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그럼 안 죽일 줄 알았냐!”

우발이 폭발적으로 달려들었다.

‘늦기 전에 먼저 쓰러트려야 해!’

목내이가 좀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먼저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강엽을 기다린 걸로 봐서는 그야말로 진짜 통과자였다.

강엽이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몰라도 소녀를 업고 있는 지금이 녀석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곳에서는 내공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강엽 역시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니 내공을 쓰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태극(太極).”

“뭣?”

우발은 일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강엽이 일보를 내딛자 그 의미를 깨닫고 경악성을 토해냈다.

천지가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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