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6화 (5/450)

1화. 대법 (5)

“으음.”

강엽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고통스럽지는 않은 걸로 봐서 어딜 맞은 것은 아닌 듯싶었다.

빠르게 주변을 돌아본 강엽은 같이 어둠에 휩쓸린 우발이나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들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따로 떨어진 모양.

그러나 무턱대고 찾기도 여의치 않은 게,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라곤 끝없이 이어진 계단뿐이었다.

‘정신을 잃는 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진 건가?’

목숨을 위협받아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두렵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엽은 조금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꺾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궁......!

천둥벼락이 끊임없이 가로지르는 하늘을 보면서 강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덕분에 어둡지는 않군.”

먹구름 사이에서 요동치는 저 천둥벼락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지만, 사방이 훤히 뚫린 장소에는 벼락을 피할 장소도 없었다.

심지어 계단 아래는 끝없는 낭떠러지라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강엽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곳에 가둔 목내이의 속셈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진정한 무대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했었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보고 있노라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작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

대충 칠십 개쯤 올랐을 때, 강엽은 목내이가 말한 시험의 내용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몸이 무거워진다.’

발을 내딛는 힘에 무게가 실렸다.

그걸 억지로 참으면서 다시 칠십 개의 계단을 오르자 또 다시 몸이 무거워졌다.

고작 백사십 개의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도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시야가 노래졌다.

다행히 누가 쫓아올 조짐은 안 보였기에 강엽은 한숨을 쉬며 계단에 주저앉아 종아리를 문질렀다.

‘대충 무슨 시험인지 알겠군. 칠십 개씩 오를 때마다 몸이 무거워지면... 종국엔 수십, 수백 배로 늘어나서 자기 몸무게를 못 이기고 압사되겠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는데도 어째서 한 명도 통과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런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종국엔 몸이 수십, 수백 배로 무거워질 테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둘 중 하나였다. 자기 몸의 무게에 짓눌려 죽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거나.

‘꼭대기까지 올라야 통과로 간주되겠지. 굳이 계단이라는 형식을 취한 것을 보면 통과자는 선착순...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만약 그 추측이 옳다면 우발이나 소녀와 떨어진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결승점을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면,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경쟁자라는 뜻이니까.

계단 옆엔 낭떠러지까지 친절하게 준비해주었으니 자기보다 앞서가는 놈은 밀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작정 서두르기엔 몸이 무거워지고 있고.’

선착순의 시험이라면 당연히 시간이 관건이지만, 체력을 아끼지 않으면 도중에 퍼질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체력을 아끼기만 해서는 언제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강엽이 책상물림이라 농꾼보다 못한 체력을 지녔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거의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무릎을 잡고 일어난 강엽이 하늘 높이 이어지는 계단을 보며 다시 긴 한숨을 토해냈다.

* * *

[총 스물네 명인가?]

석좌에 앉은 목내이가 중얼거렸다.

이 장소는 그가 술법으로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환술과 진법을 적절히 조화해서 만든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되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변에 있던 자들을 강제로 끌고 와서 이 공간에 지박령처럼 묶어둔 것이다.

이제 그의 허락이 없으면 저들 중 누구도 살아서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다 좋은데 노부는 왜 데려온 것이오?”

이 자리에 있는 자는 목내이만이 아니었다.

모산혈조도 석좌 옆에 시립하듯 서 있었다.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다. 술법이 펼쳐지자 뭘 어찌할 새도 없이 같이 끌려왔다.

[프흐흐, 마음에 안 드나? 하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빼앗기는 게 유쾌하진 않겠지.]

모산혈조는 말없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주름이 많은 이마가 더 흉물스럽게 찡그려졌지만, 목내이는 모산혈조를 돌아보지 않았다.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속셈은 뻔하지. 짐이 후계자를 정하면, 그 천한 사술로 짐의 후계자를 제압하고 피를 빼앗아서 진조가 되려는 게 아니더냐?]

“...그게 불만이면 지금이라도 노부를 당신의 후계자로 삼고 진조로 만들어주면 되지 않소.”

[싫은데?]

무척이나 단호한 어조였다.

비록 입은 웃고 있으나 목내이의 눈은 북해의 빙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싸늘했다.

[늙은 애송이, 네놈이 짐을 찾아내서 깨운 것은 가상하다만... 짐의 후계자가 될 자격은 없다. 단지 죽고 싶지 않아서 불로불사의 업을 짊어지겠다고?]

“이익!”

모산혈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산파의 제자가 되어 술법에 입문했을 때부터 그의 꿈은 언제나 불로불사였다.

죽는 게 두렵다, 죽고 나서 어찌 될지 두렵다, 이런 마음이 그로 하여금 방문좌도로 이끌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만 데리고 혈교에 투신하여 방문좌도의 술법을 연구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에 빠졌어도 개의치 않았다. 어찌 희생 없이 불로불사라는 위대한 비술에 도전하겠는가?

비록 불로불사의 비술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고대의 문헌을 연구하던 중에 흡혈귀라는 존재를 알았다.

진조는 흡혈귀의 근원격인 존재. 영원히 살아가며 어떠한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 괴물이었다.

오랜 세월 끝에 말라비틀어진 진조를 발견한 모산혈조는 그 힘을 빼앗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목내이의 힘이 예상을 웃돌았다.

수백 년 동안 피를 먹지 못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산혈조는 목내이를 제압하지 못했다.

목내이 역시 후계자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잠시 손을 잡긴 했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뜻이 다를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짐의 후계자는 짐만큼 강하지 못할 테니 네놈의 하찮은 잡술에도 당할지 모르지. 그러니 짐이 후계자를 찾기를 기원하려무나.]

“진혈강림대법을 스물세 번이나 시도하고도 후계자를 찾는 데는 실패했소. 정녕 후계자를 만들 생각이 있는 거요? 단순히 노부를 농락하고자 그런 거라면....”

[이번엔 다를 게다.]

모산혈조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목내이가 진혈강림대법을 치를 때마다 모르겠다고 한 적은 많아도, 확신을 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짐의 후계자가 나올 것 같구나. 어떤 놈이 될지는 몰라도... 왠지 그럴 것만 같아.]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상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오래 산 괴물이었다.

뱀이 천년을 묵으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천년을 묵으면 용이 된다는데 괴물이 천년을 묵으면?

“당신의 예감이 맞기를 바라야겠구려. 그래야만 노부의 비원이 이루어질 터이니.”

[....]

그 말에 목내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석좌에 앉아있지만 그의 눈은 스물네 명의 후보들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 * *

야율산산.

운명으로부터 그런 이름을 부여받은 금발의 소녀는 이를 꽉 물면서 계단을 올랐다.

모산혈조가 암도상인이라 부른 단주에게 잡히기 전부터 그녀는 기혈이 꼬여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없었다.

지하뇌옥에선 살기 위해 억지로 무공을 펼쳤지만, 그로 인해 내상이 도져서 각혈까지 했다.

간신히 살았다고 생각했을 무렵엔 사이한 술법에 휘말려 어딘지 모를 장소로 튕겨졌다.

강엽이 이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시험의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야율산산 역시 목내이의 노림수를 알았다.

내상을 입었어도 강엽보다는 튼튼한 덕에 천 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고서야 숨을 고른 그녀는, 번쩍이는 벼락 사이로 잠시 비춘 계단들을 노려봤다.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만 살 수 있어.’

나머지는 죽는다.

야율산산은 잠시 강엽을 떠올렸다.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가 이 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은 없었다.

냉정히 말하면 계단의 절반을 오르기도 전에 몸이 넙치처럼 납작하게 짓눌리거나,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공산이 컸다.

야율산산은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를 살리자고 자신이 죽을 생각은 없었다.

도울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미안해요.’

마음속으로 사과를 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몸을 찍어누르는 막대한 압력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에서는 쇳맛이 났다.

무리를 하느라 내상이 도진 것이다.

결국 걷는 도중에 쓰러졌다.

“...!”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야율산산은 마른 기침을 토했지만, 그때마다 콜록거리는 소리 대신 쇠 긁는 소리만 났다.

오래전 기혈이 꼬였을 때 그녀는 성대 좌우의 인영혈(人迎穴)을 다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강엽은 그녀가 색목인이라 중원말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상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고향이 그리웠다. 가족이 보고 싶었다. 사문의 어른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살아서 그들을 다시 만나야 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난... 살 거야!’

엉금엉금.

천근의 무게가 몸을 찍어눌러도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몸을 끌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억! 허억!”

힘겹게 계단을 오른 거구의 텁석부리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정체는 앞서 모산혈조와 말다툼을 하다 망신을 당한 흑산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정상이 아니었다.

시야는 노래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풍겼다.

부들거리는 팔다리는 숫제 감각이 사라져서 이제 자기 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집착으로 천 개가 넘는 계단을 오른 끝에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시발, 저게 뭐야...!?”

별안간 시야에 얻어걸린 무언가에 식겁한 흑산괴가 벌떡 일어나서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러다 아래쪽의 계단에 엎어져 있는 금발의 소녀를 보고 눈을 얇게 떴다.

어느 지점부터 이웃한 계단끼리는 합쳐졌는데, 마침 두 사람이 있는 곳이 기점이었던 것이다.

“각다귀를 죽인 계집인가?”

그가 갇힌 제팔뇌옥은 각다괴가 갇힌 제칠뇌옥과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다귀와도 각별하게 지냈는데, 서로 놀이 삼아서 새로 들어온 계집을 하룻밤에 얼마나 많이 겁탈하는지 미친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하루는 각다귀가 새로 들어온 색목인 계집을 찝적거리길래 질투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꾀죄죄한 꼴이긴 해도 자세히 뜯어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아름다운 계집이었던 것이다.

그 계집의 손에 각다귀가 팔다리가 몽땅 부러져서 목숨을 잃는 것을 본 이후엔 질투심이 싹 달아났지만, 언제나 마음속엔 색목인 계집에 대한 음심을 품었다.

한데 그 계집이 정신을 잃은 채 자신의 앞에 쓰러지는 광경을 볼 줄이야.

“쩝, 지금 이 꼴만 아니었어도....”

입맛을 다신 흑산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계집질에 미쳤어도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딴짓거리를 할 만큼 음심에 물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계집이 정신을 차려서 자신을 따라온다면 위험해진다는 자각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야율산산의 머리채를 잡은 흑산괴는 소녀의 몸을 계단 아래로 던지려고 했다.

갑자기 괴성이 울리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키아아악!”

“이런 미친! 이게 무슨...!”

계단 아래의 절벽을 타고 기어올라오는 괴물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되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창백한 낯짝 위로 핏줄들이 돋아있고, 검은자위가 사라진 눈동자는 광기로 허옇게 번들거린다.

몸의 한 부분과 연결된 붉은 줄기를 보는 순간 흑산괴는 불현듯 저 괴물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법이 시작되었을 때 붉은 줄기를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미, 미쳤어. 완전히 미친 게야....”

이곳이야말로 지옥이다.

흑도 무림에서 어지간히 굴러먹은 흑산괴도 이성이 마비되는 충격에 얼굴이 해쓱해졌다.

방금까지 죽일 생각 만만이었던 야율산산을 계단 아래로 던질 생각도 못했다.

괴물들이 짐승처럼 낮게 자세를 잡았다.

“크르르르!”

“으으! 으아아아아아!”

흑산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 * *

“저게 무슨...?”

강엽이 걷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계단을 올랐을 때처럼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헥헥댔던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도 땀을 미친 듯이 흘리긴 해도 그건 천 개가 넘는 계단을 올랐기 때문일 뿐.

오히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면서 체력을 비축했기에 흑산괴나 야율산산보다 양호했다.

걷은 도중 계단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고, 그걸 역이용해서 함정을 파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쩐지 묘하게 쉽더라니... 다른 함정이 있었나?”

두 사람이 들으면 어이없어할 소리였다.

몸이 짓눌릴 것 같은 압력을 견디며 계단을 올랐건만 애초에 그걸 피할 방법이 있었다고 한 것 아닌가.

물론 그들이 강엽의 한탄을 들을 수는 없었다.

강엽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또 다른 기점에 와 있었으니까.

“크르르륵....”

그곳에도 괴물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는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분명 보기만 해도 절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낯짝인데,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이것들... 원래 이렇게 느린가?”

괴물들은 굼벵이처럼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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