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법 (4)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군. 늙은 애송이.]
“당신 같으면 포기하겠소? 눈앞에 불로불사의 과실이 있는데 말이오.”
[푸흐흐,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구나. 불로불사는 저주에 불과한 것을.]
“글쎄올시다. 노부의 귀엔 가진 자의 투정으로 들리오만.”
코웃음을 친 목내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상반신만 일으킨 것인데도 도가의 전설 속 탁탑천왕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거구.
비쩍 말라서 살가죽만 남은 얼굴에 비웃음이 실렸다.
[하찮은 잡졸이 건방지기까지 하구나. 짐이 마음만 먹으면 죽은 목숨인 것을.]
“.......”
모산혈조는 이를 악물었다.
오랜 세월 잠들었던 목내이는 전성기 시절보다 많이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마주할 때마다 심신이 옥죄었다.
[네 속셈은 눈치챘지. 꽤 깜찍한 짓을 벌였더구나. 마음 같아선 당장 머리통을 터뜨려주고 싶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참겠다.]
“이번엔 쓸 만한 후보들이 많소.”
[그건 짐이 판단한 일.]
석관을 빠져나온 목내이가 단숨에 손을 뻗어 가까운 혈포무인 한 명을 붙잡았다.
“으헉!”
“이게 무슨 짓이외까!?”
부하가 붙잡히자 흑포무인이 기겁해서 칼을 들었지만 모산혈조가 엄하게 호통쳤다.
“가만 있지 못하겠느냐!”
“하오나 장로님!”
“갈!”
흑포무인이 칼을 잡은 그대로 굳어졌다.
뇌옥에 갇힌 사람들을 저승사자처럼 대했던 혈포무인은, 막상 자신이 사로잡히자 오들오들 떨었다.
목내이가 입꼬리를 당겼다.
[오랜만의 식사로구나.]
그리고 다음에 일어난 일은 모두를 경악시켰다.
끄아아아악-!
광장 가득 혈포무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목내이가 혈포무인의 목덜미를 짓씹었던 것이다.
몸통째로 붙잡힌 혈포무인은 바둥거리기만 할 뿐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안색이 허옇게 질려간 끝에 동공의 빛이 꺼져버렸다.
쓰레기마냥 시체를 내던진 목내이가 입가의 피를 닦았다.
[영겁과도 같은 인생에서 흡혈이야말로 짐이 쾌락을 느낀 유일한 오락이었지. 오랜만에 마신 생혈의 맛이 참으로 감미롭구나. 가히 극상의 맛이로다.]
“괴물이!”
졸지에 눈앞에서 부하를 잃은 흑포무인은 치를 떨었다.
[큭큭, 누굴 탓할까. 스스로 영면을 택한 짐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네놈들인 것을. 선택을 했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 법.]
그러자 모산혈조가 말했다.
“괜한 말다툼은 그만하시오. 여기 당신의 뒤를 잇기 위한 후보들이 준비됐소. 총 218명이오.”
[겨우?]
“여태 소모한 후보들까지 합치면 수천 명을 헤아리오.”
그 말에 목내이는 뭔가 마뜩찮은 듯 턱을 긁적이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쩔 수 없지. 좀 아쉽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해볼 수밖에....]
한숨처럼 중얼거린 그가 석관 위에 걸터앉고는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쭉 훑어보았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마비되는 충격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저건 괴물이다. 요괴야.’
강엽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의 피를 먹는 마물이라니.
모산혈조의 말이 맞다면 저 괴물은 감히 상상치도 못할 세월을 살았고, 저 스스로 영생을 사는 게 지겨워져서 잠을 잔 것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현신이 아닌가.
[강단 있는 놈도 있는걸.]
강엽과 시선이 얽힌 목내이가 씩 웃었다.
[만나서 반갑다. 짐은 머나먼 태곳적에 진조(眞祖)라고 불렸으며, 한때 짐과 같은 일족을 이끌었던 왕이었다. 이름은 들어봐도 모를 테니 생략하자.]
앞서 사람 하나를 쥐어짜는 모습을 보지만 않았다면 인간적이라고 생각했을 자기 소개였다.
[짐은 짐의 일족을 멸족시키고 무덤을 만들어 잠들었느리라. 때문에 이 세상에 짐의 일족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어서 기어이 짐의 기록을 찾아낸 인간이 짐의 영면을 깨웠구나.]
그 대목에서 잠시 모산혈조를 흘깃거린 목내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늙은 애송이가 너희에게 불로불사를 약속했다지? 그건 사실이다. 짐은 너희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려고 한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떠넘기려고 말이다.]
전설의 불로불사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자 사람들은 의미심장한 얼굴이 되었다.
목내이가 불로불사를 저주라고 한 것도 잊고 영생을 사는 스스로를 상상하며 침을 삼켰다.
특히 무림인들에게 불로불사의 유혹은 대단히 컸다.
영원히 늙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천하제일, 아니 영세토록 강호 무림에 군림하는 것도 가능할 터.
모산혈조의 말마따나 눈앞에 불로불사의 과실이 있다면 따먹지 않고 배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짐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 같아선 아무나 골라서 떠넘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지. 오직 자격을 증명하는 자만이 짐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느니라.]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자 강엽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갇힌 사람들도 그 자격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을 터. 하지만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아직도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이고요. 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조, 좀 닥쳐봐!”
우발조차 식겁해서 강엽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강엽이 우발의 손을 쳐내며 짜증을 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너야말로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저, 저... 사람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잖아!”
차마 괴물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적당히 돌려서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냥 괴물이라고 하세요. 사람 피 빨아먹는 괴물을 뭐하러 사람이라고 불러줍니까?”
“...!”
우발이 입을 떡 벌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목내이의 뒤에 있는 모산혈조나 흑포무인도 눈을 부릅뜬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분노라도 사면 어쩌려고 그래!?”
“죽겠지요.”
“그걸 알면서 왜...!”
“자격을 증명하지 못해도 죽을 테니까요.”
좀 전의 질문이 핵심이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가.
‘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만의 하나라도 없다.’
자그마치 수천 명이라고 했다.
수천 명이 살아서 나갔다면 진작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산장놈들이 그걸 두고 보겠나.
“당신이 죽였든, 아니면 저들이 죽였든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거 아닙니까?”
“뭐?”
우발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목내이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의 말이 맞다.]
목내이는 흔쾌히 대답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는다. 구태여 짐이 손을 쓰거나 저놈들의 손을 빌릴 것도 없지. 자격을 증명한다는 것은 짐의 시험을 통과한다는 뜻.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거나, 혹은 모두 죽을 것이다.]
“불로불사를 얻지 못한 대가가 죽음이라... 꽤나 가혹하군요.”
[상관없지 않느냐?]
목내이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는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네놈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을진대. 시험을 보지 않겠다면 저놈들이 내버려둘까?]
“....”
강엽이 침묵했다.
굳이 모산혈조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혈포무인들이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선택지가 없어진다.
[짐에게 자비를 기대하지 말거라. 불로불사의 저주만 넘기면 이번에야말로 영면을 취할 거니까.]
“그냥 당신이 자결하는 건 안 됩니까?”
[짐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알겠는데 진짜다. 만약 네 녀석이 불로불사의 저주를 잇는다면 자결해보거라. 짐만큼 강하지 않다면, ‘의외로’ 쉽게 죽을 수 있을 테니.]
물론 그건 시험을 통과해야 의미가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후의 일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얼추 다 알아들은 것 같군. 시작하도록.]
모산혈조가 붉은 법복을 입은 술사들, 모산파 시절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제자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각자 팔괘의 방위를 점한 술사들이 부적을 꺼내면서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궁......!
광장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 닥친 것처럼 흔들리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태연한 자들은 대법의 중심인 구궁(九宮)의 방위를 점한 목내이뿐.
어느 샌가 술사들을 보호하기 시작한 혈포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산혈조와 흑포무인도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진혈강림대법(眞血降臨大法). 짐이 만들었지만 참 쓸데없이 요란한 대법이지.]
“노부의 공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모산혈조가 구시렁거렸다.
진혈강림대법은 영생이 지겨워진 목내이가 자신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고안한 술법.
자신의 일생을 바쳐 목내이를 찾아낸 모산혈조는 대법을 전수받고, 모산파의 비기들을 더해서 대법의 완성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고오오오오오오......!
땅이 흔들리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대법이 시작되자 팔괘의 꼭지점을 기점으로 피처럼 붉은 법문(法文)들이 떠올랐다.
바닥과 천장, 나아가 동굴의 암벽까지 빼곡하게 메운 붉은 법문들이 사특한 기운을 내뿜었다.
끼아아아아아아...!
귀곡성까지 메아리쳤다.
“사, 살려줘!”
“으아아아아악!”
마지막으로 지진을 틈타 암반을 뚫고 나온 핏빛의 나무 줄기들이 사람들의 몸을 칭칭 감았다.
한번 잡히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무림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는 죽은 목숨이다.
대법이 완성되기 전에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나무 줄기들에 막힐 줄이야.
“얼른 도망치자고!”
우발이 독촉했다.
불로불사고 나발이고 일단은 살아야지 않겠나.
강엽도 우발을 따라 도망쳤다.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뜀박질을 하는 게 낫다.
그러나 바닥을 뚫고 나온 줄기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기가 찾아왔다.
독사처럼 머리를 꼿꼿이 세운 줄기가 등 뒤로 쏘아진 것이다.
강엽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서걱!
“어?”
귀신에 홀린 심정이 이러할까.
공교롭게도 그를 구해준 사람은 지난날 동행했던 색목인 소녀였다.
누구한테 빼앗은지 모를 박도(朴刀)를 꼬나쥔 금발의 소녀가 강엽을 곁눈질했다.
“.......”
말은 하지 않아도 뜻은 전해졌다.
일전에 자신을 업고 오느라 고생했던 빚은 이걸로 청산하겠다는 뜻이겠지.
“이봐, 소저! 누군지 몰라도 좀 도와줘!”
우발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소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강엽을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직후 손가락을 들어 한 장소를 가리켰다.
“내보내 주세요!”
“야, 이 새끼들아! 이거 치워!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치우라고!”
강엽과 우발이 해쓱해졌다.
술사들의 안쪽에 붉그스름한 벽이 쳐져 있었는데, 안쪽에 갇힌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다.
“시발!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무림 고수들도 잡히면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암담한 절망감이 세 사람을 덮쳤다.
“자네 머리 좋잖아! 뭐 방법 없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 말했....”
말하다 말고 강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제가 잘못됐군.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었어.”
궁지에 몰려서야 살 길이 보였다.
우발이 묻기도 전에 강엽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목내이가 점한 구궁의 방위를 향해.
“뒤지고 싶어 환장한 거냐!”
“살고 싶으면 뛰어!”
욕지거리를 퍼붓던 우발조차 움찔 놀란 단호한 어조.
소녀 역시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뒤늦게 강엽의 장단에 맞춰 뒤를 따라갔다.
살기 위해선 모험을 해야 한다는 걸 인정한 것.
촤아아악!
소녀의 손에 들린 박도가 귀신 들린 칼처럼 춤을 출 때마다 줄기들이 잘려나간다.
[으하하! 대담하구나. 정면으로 들이박을 셈이더냐?]
목내이는 그런 세 사람의 반항이 못내 즐거운지 광소를 터뜨렸다.
세 사람을 향한 줄기들이 가열차게 늘어났지만, 어느새 강엽을 앞지른 소녀가 선두에서 길을 열었다.
그러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애써 주운 박도를 우발을 향해 던지고는 육장을 내밀었다.
사아아아아아......!
장심에서 쏟아진 새하얀 한기.
성에가 낀 줄기들이 얼음장이 되자 목내이가 감탄했다.
[상당한 수련을 쌓은 음한지기로군. 하지만....]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줄기가 채찍처럼 휘어져서 소녀의 옆구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간발의 차로 줄기를 터뜨렸지만 소녀가 한 바가지나 되는 피를 울컥 토해냈다.
[내상을 입은 몸으로는 견디기 쉽지 않을 게야.]
하지만 바로 그때 뒤에서 우발이 나와 줄기들을 베어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고 나서야 우발도 강엽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목내이가 있는 이곳이야말로 줄기들이 자라지 않는 안전지대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줄기들을 피하면서 안쪽으로 들어오자 목내이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싹수가 있는 놈들이구나. 좋다. 네 녀석들은 진정한 무대에 오를 자격을 손에 넣었느니라.]
목내이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중심부에서 시커먼 어둠이 먹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강엽을 비롯한 세 사람은 어둠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