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법 (3)
“장로님.”
붉고 주름진 손이 종이 위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보고를 올리는 흑포무인은 노인의 뒤에서 가만히 시립한 채 노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백미백염의 노인은 산장을 둘러싼 험준한 산봉들을 화폭에 옮겨담고 있었는데, 썩 훌륭한 솜씨라고는 할 수 없어도 못난 솜씨 또한 아니었다.
이윽고 화룡점정을 찍은 노인이 수염을 쓸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떠하더냐?”
“속하의 안목이 미천하여....”
“전문가의 평을 바란 것이 아니다. 그저 네 녀석이 품은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면 되느니라.”
“훌륭한 그림이라고 사료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미사여구였다.
윗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과하게 아첨을 떨지 않으면서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화법.
몇 번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그림을 치우고 흑포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법을 치를 준비가 됐다고 했던가?”
“예.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번이 스물네 번째였지.”
“....”
흑포무인이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말한 대법이야말로 그들이 귀주성의 오지에 몇 년째 처박혔던 이유였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야만 도전할 수 있는 대법을 스무 번이 넘게 시도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실패 요인들을 확인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었지만, 어찌 됐든 실패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저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발판 삼아 다음 도전을 할 뿐.
“뇌옥에 특기할 만한 자들은 없는고?”
“몇 명 있습니다.”
흑포무인은 부하들을 통해서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가양도(可陽刀) 우발은 제일뇌옥을 홀로 평정했습니다. 다만 패거리를 이루거나 다른 사람들의 생사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들어본 이름이구나. 표국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다른 놈은 누가 있느냐?”
“흑산괴(黑山怪)라는 수배범입니다. 놈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몽땅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명 주목할 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한동안 흑포무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모두 세간에 알려진 강호의 고수들이었다.
그게 명성이든 악명이든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증명된 셈이다.
“아, 또 하나 있군요. 이번에 들어온 자들 중에 색목인 소녀가 하나 있습니다.”
앞서 이름이 언급된 자들과는 달랐다.
나이도 어리거니와 세간에 알려진 별호도 없었으며, 무리를 이루지도 못했다.
“생긴 게 반반해서 앞서 뇌옥에 들어간 왈짜들이 음심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각다귀(脚多鬼)라고 흑도에서 굴러먹은 놈이 왈짜들을 이끌고 있사온데, 그 계집을 능욕하려고 했다가 사지가 부러졌습니다.”
각다귀는 이름 좀 날린 각법의 고수였다.
비조처럼 날아올라 발차기를 날릴 때마다 발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고 하여 그런 별명이 붙었다.
한데 무명의 소녀에게 사지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혼자 싸운 것도 아니고 왈짜들을 이끌고 싸웠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자연히 흑포무인의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나이 어린 색목인 계집이라... 이번에 왔다면 필시 암도상인(暗道商人)의 손을 탔을 터. 그자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느냐?”
“무공 깨나 하는 색목인 계집을 우연히 발견해서 잡아왔다고만 했습니다.”
“사문은 알아냈고?”
“그게... 계집이 벙어리입니다.”
강엽이 들었다면 놀랐을 것이다.
중원말을 몰라서 말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정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모래알처럼 많으니 그런 계집이 있어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 그래도 이번에는 유독 고수들이 많구나.”
고수라고 대법에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인신매매단을 통할 것도 없이 무림인으로만 뇌옥을 채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이 고수들을 주목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의지가 단단한 고수들이라면 대법에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
‘그놈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하나?’
흑포무인은 며칠 전 혈포무인들이 올렸던 보고서를 떠올리고 살짝 고민했다.
제일뇌옥에서 웬놈이 속임수로 사람들을 속이며 몰래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보고였다.
어찌나 실감나게 연기하는지 혈포무인들도 처음 몇 번은 속아서 그놈이 언제 죽을지 내기를 했다.
그런데 꾸역꾸역 살아남는 놈의 모습을 보고 그게 연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별거 아닌 놈이다. 이 정도 가지고 뭔 호들갑을 떠냐고 꾸지람이나 듣겠지.’
흑포무인은 그렇게 강엽에 대해 보고하겠다는 결심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노인의 말이 나직이 이어졌다.
“대법은 사흘 뒤에 시작하겠다.”
* * *
“모두 나와라.”
뇌옥의 문이 열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좀처럼 나가지 못했다.
처음 갇힐 때만 해도 얼른 나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나갈 기회가 오자 망설여졌다.
“.......”
혈포무인들의 저의를 의심하기 때문이었다.
저놈들이 어떤 종자인데 기껏 가둔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풀어주겠나.
그런 의심들이 팽배한 이상 나오라는 말을 듣고 선뜻 몸을 일으킬 사람은 없었다.
혈포무인들도 사람들의 심정을 대강은 짐작했지만, 좀처럼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짜증이 났다.
“두 번 말하지는 않는다.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히익......!”
허리춤의 도파(刀把)를 잡으며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서둘러 뇌옥문을 나온 사람들로 인해 복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적당히 다른 사람들과 섞여 대열의 중간쯤에 선 강엽은 아는 얼굴들이 있는지 살펴봤다.
그보다 조금 더 빨리 나간 우발을 필두로 혈포무인들이 제일뇌옥이라 부르는 곳에 갇힌 사람들이 있었고, 그 너머에 다른 뇌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워낙 사람들이 많은 탓에 일전에 헤어졌던 금발의 색목인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었을 텐데....’
일전에 혈포무인들 역시 웬 색목인 계집이 악명높은 흑도의 고수를 뭉개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어른도 되지 않은 꼬맹이가 거친 왈짜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기우로 끝난 것을 보면 역시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못 찾겠군. 그 녀석이라고 나오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걸로 생각을 정리한 강엽은 혈포무인들의 말을 듣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갈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혈포무인들은 오히려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혈포무인들이 횃불을 들고 있기도 하고, 안쪽으로 가는 길목에도 횃불이 설치된 만큼 동굴의 어둠에 특별히 구애받지는 않았다.
미끄러운 내리막길이나 깎아지른 듯한 벼랑만 조심하면 위험하지도 않았고.
다만 반시진이 지나도록 계속 걷기만 하니 이 동굴이 얼마나 광활한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만 해도 족히 이십 리는 넘을 텐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곳곳에 자리한 혈포무인들이 팔을 들고 나서야 대열은 간신히 멈추었다.
푹 한숨을 내쉰 강엽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족히 수백 명이 들어갈 만한 거대한 광장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큰 탓에 비교적 멀리까지 내다본 강엽은 광장 한복판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석관(石棺)?’
무척이나 거대한 석관이었다.
길쭉한 직육면체의 석관은 길이만 일장에 달했으며 높이 역시 상당히 높았다.
상식적으로 저만한 석관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보자마자 석관부터 떠올린 이유는 명백했다.
석관의 뚜껑이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석관에 묻혔을 거라 짐작되는 목내이(木乃伊)의 시체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석관의 크기가 과장된 게 아님을 보여주듯 목내이 또한 키가 팔척에 달했다.
‘저 시체에 비하면 난 난쟁이겠는데.’
한편 석관의 주변엔 붉은 법복을 입은 자들이 혈포무인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붉은 장삼을 걸친 노인이었다.
얼마나 늙었는지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샌 것은 물론 주름이 늘어지다 못해 흘러내릴 지경이다.
강엽은 직감적으로 그가 이 산장의 주인이자 무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렸다.
“이거 좋지 않은데....”
우발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작은 소리라서 혈포무인들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강엽은 똑똑이 들었다.
“아는 노인입니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표사로 일하면서 소문만 들었지. 내 짐작이 맞다면 저 노친네의 정체는 모산혈조(茅山血祖)일 거야.”
“그게 누군데요?”
“전직 모산파의 장문인. 불로불사의 비술을 알아내겠답시고 방문좌도에 빠져서 제자들을 이끌고 혈교에 투신했다더군.”
“맙소사! 혈교라면...!”
강엽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무림과 연이 없는 그도 혈교란 이름은 들어봤다.
그릇된 교리로 양민들을 혹세무민하고, 인명을 살상하여 나라에서 사교로 지정한 사마외도.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혈교의 인물이었을 줄이야.
“확실한 겁니까?”
“저 노친네가 쓴 금관이 모산파의 신물이야. 게다가 소문에 따르면 모산혈조는 혈교의 마공을 익혀서 손가락이 붉그스름하다더군. 저 노친네가 딱 그렇지. 혈교에서 장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들었는데....”
과연 우발의 말대로 장삼 소매 사이로 슬쩍 드러난 노인의 손가락은 피를 바른 것처럼 시뻘갰다.
이렇게까지 증거가 확실하다면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저 석관은 뭔지 통 모르겠다는 건데... 고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컸구만.”
모산혈조를 알아본 것은 우발만이 아니었다.
뇌옥에 잡혀온 무림인들 중 일부가 모산혈조를 알아봤고, 모산혈조가 과거 혈교에 투신하여 쌓은 수많은 악업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서 알음알음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시퍼렇게 질린 것은 당연지사.
곳곳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입을 여는 놈들은 목을 베어버리겠다!”
혈포무인들의 일갈에 술렁임이 멎었다.
“.......”
수백 명이 모인 광장에 숨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옆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때서야 흑포무인이 노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장로님.”
“으음.”
모산혈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그가 입을 열자 쇠를 긁는 것마냥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놈들이 짐작한 대로 노부는 모산혈조가 맞다.”
“역시!”
곳곳에서 장탄식이 터졌다.
그의 악명을 알고 있는 무림인들은 모산혈조가 자신들을 대상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벌벌 떠는 군중을 쭉 둘러본 모산혈조가 낮게 클클거렸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느니라. 노부가 네놈들에게 주려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니까.”
그걸 믿는 바보는 없었다.
하지만 살기를 번뜩이는 혈포무인들로 인해 무림인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모산혈조의 말을 듣고 판단하겠다는 분위기였다.
“노부는 한평생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느니라. 먼 옛날 시황제가 서복을 시켜 불로초를 찾게 한 것처럼, 노부가 직접 서복이 되어 중원 대륙은 물론이고 주변의 새외들과 저 먼 곳에 있는 열사의 땅까지 가서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지.”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불로불사라는 허황된 꿈으로 인생을 낭비하다니.
게다가 하는 말로 미루어보건대 저 노인네는 아직도 불로불사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그들의 삶을 파괴한 것이다.
‘미쳤군.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그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비교적 앞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소?”
바위처럼 굴강한 근육을 가진 텁석부리 사내였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혈포무인들이 목을 치려는 것을 모산혈조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텁석부리 사내를 뻔히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정중산. 강호의 친구들은 흑산괴라고 부르오.”
“호오, 네놈이 흑산괴로군. 네 이름은 종종 들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죽이고 여인들은 겁탈했다지?”
“...그,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흑산괴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모산혈조가 이 일을 걸고 넘어지면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걸까.
강엽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산혈조의 눈치만 보느라 감히 돌아보지 못했다.
“껄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놈을 징치할 거였다면 벌써 했을 게야. 알고도 내버려둔 것은, 노부가 원하는 대법에 네놈 같은 부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법?”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다고 물었더냐?”
“...!”
“그렇다. 노부는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느니라. 인고의 세월 끝에 마침내 불로불사의 괴물이 잠든 장소를 찾아낸 것이야!”
어디일지는 뻔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동굴이야말로 모산혈조가 평생을 찾았던 장소였으리라.
어쩌면 불로불사의 괴물이란 다름 아닌....
‘뭔가 이상한데.’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로불사의 괴물인데 왜 죽은 거지?’
그렇지 않은가.
모산혈조의 말마따나 영원히 사는 괴물이라면 왜 관짝에 누워있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우....]
석관의 목내이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