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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3화 (3/450)
  • 1화. 대법 (2)

    지긋지긋한 잔도를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칼잡이들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주저앉았다.

    일부는 아예 누워버렸지만, 지금만큼은 칼잡이들도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신세였기에 이전처럼 힘으로 윽박지르지도 못하고 개처럼 헥헥댔다.

    강엽 역시 땀을 비오듯이 쏟아낸 것은 물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시발, 이젠 때려죽여도 못 걸어...!”

    강엽의 등에 업혀서 편하게(?) 온 색목인 소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엽의 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었다.

    문득 거대한 인마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드리웠다.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마혈은 풀렸나 보군. 하긴 슬슬 풀릴 때가 되긴 했지.”

    신기막측한 기마술로 좁은 잔도를 통과한 단주가 땀 한방울 나지 않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가 앙칼진 고양이처럼 자세를 낮추고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단주는 그런 소녀를 무시하고 강엽을 치하했다.

    “사람 하나를 업고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용케 떨어지지 않았군.”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후후.”

    끝까지 얄밉게 웃은 단주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혹여 노예들이 도망갈까 싶어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칼잡이들이 즉시 몸을 일으켰다.

    “쉴 만큼 쉬었으면 다시 일어나도록.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두는 것 잊지 말고.”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드러눕고 자고 싶었지만 칼잡이들의 서슬 퍼런 기세 때문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늘에 걸린 태양이 어느덧 서녘으로 넘어갈 시점이 된 만큼 단주가 서두르는 이유가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 대낮이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땅거미가 질 테니까.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일어난 강엽은 칼잡이들에 의해 다시 포승줄에 묶인 신세가 됐다.

    “출발한다!”

    그때부터는 쭉 오르막길이었다.

    여전히 거칠고 가팔라서 자칫 돌부리에 걸리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길.

    그래도 잔도에 비하면 평지를 걷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여정은 해가 저물기 전에 끝났다.

    골짜기의 능선을 타고 지어진 산장(山莊).

    족히 백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산장은 흡사 고관대작의 별장처럼 보였다.

    물론 민가도 없는 곳에 별장 같은 게 들어설 리가 없으니 저 산장 역시 평범한 장원은 아닐 것이다.

    산장의 대문엔 단주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십수 명의 인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하나같이 섬뜩한 핏빛의 장포를 걸쳤다.

    유일하게 흑포를 입고 있는 무인만이 선두에서 단주를 맞이하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산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단주께서 오시는 것은 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예. 단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회를 준비해놨으니 오늘밤은 편히 쉬시지요.”

    연회라는 말에 칼잡이들이 몸에 누적된 피로도 잊고 와아아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그들이 끌고 온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

    강엽을 비롯한 사람들은 묶인 채 끌려갔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지하였다.

    벽에 걸린 횃불이 불그스름한 불빛을 드리우지 않았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을 터.

    ‘으스스하군.’

    기분 탓인지 피내음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강엽의 뒤를 따라오는 소녀도 불안함을 느꼈는지 강엽의 팔소매를 꽉 붙잡았다.

    한참을 내려간 끝에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거대한 공동이었다.

    천장에 가득한 종유석이나 바닥에서 돋아난 석순을 보아선 원래부터 존재했던 천연동굴이리라.

    설마 산장의 아래에 이런 동굴이 있었을 줄이야.

    “오오, 신입이다! 신입이야!”

    “여자도 있어!”

    동굴 안쪽은 창살이 빼곡했다.

    앞서 동굴에 갇힌 사람들은 새로이 들어온 신입들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발광했다.

    대부분 건장한 왈짜들이었는데 젊은 여인들에게는 노골적인 음담패설도 서슴지 않았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혈포무인들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여기에 들어가야 하냐고 묻는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혈포무인은 시큰둥하게 창살의 문을 열고 으름장을 놨다.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다.”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한 사람들이 혈포무인의 눈치를 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강엽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쿠웅!

    혈포무인이 지체없이 문을 닫아걸었다.

    강엽은 물론 소녀까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혈포무인은 사무적인 어조로 차가운 현실을 통보했다.

    “설마 너희를 한 자리에 모두 넣으리라 여겼던 건 아니겠지. 여기서부터는 다른 옥실에 간다.”

    “이 아이까지는 같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강엽이 봤을 때 소녀는 무공을 익혔다.

    절벽을 올라간 것만 봐도 그랬다.

    비록 단주에게 제압당하기는 했어도 그건 단주가 압도적인 고수였기에 패한 것일 뿐, 절벽을 올라갔던 몸놀림을 보면 무공을 익힌 것이 확실했다.

    이 지하뇌옥이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강엽 혼자 있는 것보다는 소녀와 함께 잇는 편이 나을 터.

    문제는 혈포무인은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헛소리를 나불대면 혀를 잘라버리겠다.”

    강엽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엄한 경고를 남긴 혈포무인이 남은 이들과 함께 멀어졌다.

    소녀는 강엽이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만 고개를 돌렸지만, 혈포무인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갇혀지내는 바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도 자리가 비좁았다.

    강엽은 중간쯤에 엉거주춤하게 자리를 잡고는 무거운 한숨을 쏟아냈다.

    ‘이래서야 쪽잠을 자기도 힘들겠군.’

    그렇게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저녁을 먹을 때가 됐다.

    예의 혈포무인들이 큼지막한 통을 끌고 와서 저녁밥을 나눠주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겹게 먹었던 주먹밥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반쯤 송장이나 다름없던 사람들은 강엽이 감히 예상하지도 못한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밥이다!”

    “비켜! 내 거야! 내 거라고!”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서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밥을 먹으려다 졸지에 엉덩방아를 찧은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밀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아귀다툼도 이런 아귀다툼이 없었다.

    혈포무인들은 뇌옥의 문을 열지도 않은 채 주먹밥을 던지고, 사람들은 주먹밥을 받아먹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밀고 쥐어뜯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어쩌다 옆사람이 주먹밥을 잡았으면 단체로 달려들어 주먹밥을 쥔 손을 깨물어버리는 광경은 살벌한 걸 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미친.”

    며칠을 내리 굶은 짐승처럼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

    그런데도 혈포무인들은 사람들을 말리기는커녕 희희낙락하며 싸움을 독전하고 있었다.

    “하하! 잘한다. 그래, 더 싸워라!”

    “독기를 품은 놈만 배를 채울 수 있다! 굶고 싶지 않다면 다른 놈의 밥을 빼앗아야 할 거다!”

    살점이 터지고, 피가 흩뿌려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죽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나왔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당연히 저럴 수밖에 없지.”

    느닷없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강엽이 고개를 홱 돌리자 주먹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중년인이 입가를 닦고 씩 웃었다.

    “여긴 하루에 한 번밖에 밥을 주지 않으니까. 심지어 수량도 일정하지 않지. 그러니 저렇게 기를 쓰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거야.”

    “하루에 달랑 한 끼라고?”

    “그마저도 늦으면 못 먹는 거지. 자네처럼.”

    “...!”

    강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주의 언동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산장의 무인들은 큰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뇌옥에 가둬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사람들의 생사에는 별로 관심없는 것처럼 구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나도 이유는 몰라. 뭐, 놈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워들으니 독기를 품어야 뭐가 잘 된다고 하던데. 나도 여기 끌려온지 얼마 안 돼서 말이지.”

    한마디로 자기도 아는 게 없다는 뜻.

    “하지만 자네보다는 오래 지냈으니까. 내가 아는 걸 말해주자면, 계속 여기 갇혀지내지는 않는다는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모양이더군.”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고요?”

    중년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끌려간 놈들이 돌아왔으면 뭐라도 물어봤을 텐데. 돌아온 놈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데 우릴 여기에 가둔 놈들이 제물 운운하는 걸 보면 좋은 장소는 아니겠지.”

    “그런.......”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강엽이 말을 잇지 못하자 남은 주먹밥을 목구멍에 털어넣은 중년인이 쩝쩝 씹으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할 거다. 여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 * *

    중년인의 말대로였다.

    배식은 하루에 딱 한 번.

    그마저도 뇌옥에 갇힌 사람들의 머릿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주먹밥만 배급됐다.

    그나마 창살의 안쪽에 있는 여물통에 물이 있어서 그걸로 배를 채웠지만 굶주림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튿날에도 아귀다툼에 끼어들지 못하고 손가락만 쪽쪽 빨았다.

    군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공자님의 말씀도 있다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굶어뒈질 판국이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며 체면을 고집하기에는, 자신 또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난 두 달간의 여정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다만 평생 싸워본 적 없는 그의 물주먹으로는 저 아귀다툼 속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강엽은 물로만 배를 채우면서 나날이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결과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며 죽어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는 안 돼.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해.’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다시 지났다.

    “자네도 참 딱한 사람이야.”

    중년인은 고작 며칠 만에 앙상한 몰골이 된 강엽을 내려다보며 동정심을 금치 못했다.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물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으니까 탈이 나지. 안 그래도 마른 친구가 이제는 거죽만 남았군. 뭐, 이렇게 죽는 것도 결국 본인의 팔자지.”

    “.......”

    대꾸할 기력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은 강엽의 얼굴은, 뺨은 홀쭉해졌을지언정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내면서 중년인을 노려봤다.

    “쯧쯧, 노려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며칠간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생각?”

    “약자인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그게 뭔데.”

    “기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단삼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낸 강엽이 곧장 그것을 입에 넣었다.

    “어?”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강엽이 입에 넣은 것은 주먹밥이었던 것이다.

    줄곧 아귀다툼에 실패하고 쫄쫄 굶었던 강엽이 언제 주먹밥을 구했단 말인가.

    “...일부러 실패한 척을 했다고?”

    “만천과해(瞞天過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삼십육계 중 제일계다.

    무엇이든 자주 보면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격언.

    중년인의 말대로 강엽은 며칠간은 쫄쫄 굶었을 뿐만 아니라 물갈이도 심하게 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점점 피골이 상접해가는 강엽의 꼬락서니를 본 사람들은 그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귀다툼에 끼어들어도 귀찮게만 여겼다.

    강엽이 누군가한테 맞은 척을 하고 바닥에 쓰러져도 곧 죽을 놈이 살려고 애쓴다고 여길 뿐.

    그의 손에 주먹밥이 들려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전 당신처럼 튼튼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살아남으려면 꼼수수밖에 없더군요.”

    “기가 막히는군.”

    중년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난 우발이다. 한족은 아니고 포의족(布依族)이지. 포의족에 대해 들어봤나?”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귀주와 운남 등지에서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강엽은 가끔 공부에 지쳤을 때 여러 잡서들을 읽으며 정신을 환기했고, 그중엔 중원 대륙에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포의족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포의족은 독자적인 언어를 쓴다고 들었습니다만. 한족의 말에 능숙하시군요.”

    “도시에서 살았거든. 이래봬도 표사 출신이야.”

    “무공을 익혔습니까?”

    “변변찮은 수준이지.”

    하지만 그 변변찮은 무공만으로도 우발은 뇌옥에서는 압도적인 강자로 군림했다.

    강엽처럼 속임수를 쓸 필요도 없었으리라.

    “어쨌든 자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잘 봤네.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무공을 익혔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겠죠.”

    강엽의 만면에 쓴웃음이 어렸다.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한 공맹의 도리는 인간성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진창에선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책을 짜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우발은 오히려 강엽을 위로했다.

    “용기를 가지라고. 지혜는 인간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하잖아. 힘은 더 강력한 힘에 무너지지만, 지혜는 때로 강력한 힘을 무너뜨리니까.”

    “...과분한 칭찬은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기쁘지만, 꼼수는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

    실제로 눈치 빠른 몇 명은 자신이 굶어죽지 않은 것에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자연히 강엽의 시름은 날로 깊어졌다.

    ‘그전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리고 얼마 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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