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화 (2/450)

1화. 대법 (1)

덜컹!

흔들리는 바닥 때문에 엉덩이가 아프다.

무심코 엉덩이를 어루만진 강엽은 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손바닥만한 창문 틈새로 들어온 한 줄기 볕이 어두운 짐마차에 드리운 유일한 빛이었다.

단지 볕이 드리운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드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근 두어 달간 좁은 짐마차에 갇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강엽은 다른 문제로 낙담했다.

‘지금쯤이면 회시도 끝났겠군.’

과거에 떨어질 것은 각오했다.

하지만 과거를 보지도 못할 줄이야.

사람 앞날은 알 수 없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햇볕의 방향과 뜨거워지는 무더위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차렸을 뿐.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질문을 해도 욕설과 매타작만 돌아왔다.

기회를 봐서 도주하는 것도 두 손이 포승줄로 꽉 묶여있어서 여의치 않았고.

기껏 용기를 내서 도주를 시도했던 이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런 일이 연이어 벌어지자 사람들은 희망 따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강엽 역시 마찬가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디론가 팔려가는 것 같은데... 설마 국경을 넘는 건가?’

남서쪽으로 두 달을 왔으니 지금쯤이면 귀주나 운남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이미 고향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온 시점에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강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쿵쿵!

“이곳만 지나면 도착한다!”

문득 창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보시오! 말 좀 물읍시다!”

짐마차에 있는 이들이 창살을 붙잡고 아우성을 쳤다.

“도착이라니! 여기가 대관절 어디요? 우린 어디로 끌려가는 거란 말이오!?”

“닥쳐!”

안면을 맞은 사내가 으악 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았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피가 흥건하게 쏟아지자 같이 소리쳤던 사람들도 덩달아 흠칫 놀랐다.

칼잡이가 눈알을 부라렸다.

“조용히 해. 뒈지고 싶지 않으면.”

“....”

기세에 눌린 사람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저게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는 것은 지난 두 달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동안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은 칼잡이들이 낄낄거리며 떠드는 소리뿐이었다.

“이번에는 값 좀 후하게 받으려나.”

“시발, 당연히 그래야지. 저번에 잡아온 놈들보다 더 많은데. 이번에 한 몫 챙기면 놀고 먹을 거다.”

“아예 귀양(貴陽)에 가자고. 그래도 그쪽은 큰 도시니 기녀들도 예쁜 년들이 많겠지.”

“쩝, 생각해보니 아쉽구먼. 저기 갇힌 계집들만 따먹어도 여자 생각이 이렇게 간절하지는 않을 텐데.”

짐마차에 갇힌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강엽은 여인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리는 것을 봤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지금은 그녀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칼잡이들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저들의 입에서 앞으로 팔려가는 곳에 대한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민감한 얘기는 일절 듣지 못했다.

기껏 나온 얘기는 예전에 한 칼잡이가 욕정에 못 이겨 젊은 여자를 범했는데, 아랫도리가 뜯겨죽었다는 살벌한 얘기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돋지만 지금 상황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강엽은 김샜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낭비했군. 괜히 들었어.’

* * *

녹림이 우거진 험준한 골짜기.

짐마차가 더 이상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고 가파른 산길은 칼잡이들도 난색을 표하게 만들었으나,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짐마차를 한갓진 곳에 세워둔 칼잡이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저런 애까지 잡아왔나?’

또 다른 짐마차에서 내린 사람들 중엔 앳된 소녀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은 선명한 금색이고 얼굴은 새하얀 색목인 소녀였다.

어른들 틈에 섞인 꾀죄죄한 색목인 소녀는 겁이 나는지 주변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참다 못한 칼잡이들이 등을 떠밀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따라 대열에 합류했다.

“전부 내렸습니다, 단주님.”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어본 칼잡이가 준마를 탄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험악한 칼잡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사풍의 준수한 남자가 말 위에서 섭선을 부치고 있었다.

얼굴 가득 난 자잘한 흉터들만 없었다면 유생이라고 해도 믿었으리라.

강엽은 차게 식은 눈으로 그 남자를 응시했다.

두 달간의 여정에서 칼잡이들의 입으로만 들었던 단주라는 작자를 처음으로 본 것이다.

‘저자가 원흉이군.’

저자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생을 할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잔도로 간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한 놈이라도 잃으면 손해가 막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상품들이 대열을 이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벼랑 위의 잔도는 조금만 삐끗해도 천장단애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산길.

단주의 말마따나 애써 납치한 상품을 잃는 것은 손해였기에 칼잡이들은 포승줄을 풀었다.

“잠깐 자유로워졌다고 도망칠 생각은 말어. 여기서 도망칠 데도 없겠지만....”

도망치면 잔도를 벗어나야 하는데, 그럼 바로 천길 낭떠러지였다.

아무리 악귀같은 놈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황천 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마련.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도 위태로운 잔도에 오르기를 택했고, 강엽은 대열의 중간쯤에 섰다.

절벽의 아득한 높이에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투두둑...!

“히익!”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벽에 달라붙었다.

강엽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떨어지면 시체도 못 찾아!’

하지만 살려면 걸어야 한다.

등 뒤에서 칼잡이들이 시퍼런 살기를 뿌리며 어서 걸으라고 종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망설이면 단매를 퍼부었다.

빠악!

“어서 빨리 걷지 못해!? 대열이 늦어지고 있는 게 안 보인단 말이냐!”

단매를 맞은 남자가 발발 떨면서도 일어났다.

곳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엽은 용기를 내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보폭은 최대한 작게, 하지만 벽에 달라붙은 채 빠르게 나아가자 의외로 할 만했다.

‘내려다보지 말자. 내려다보지 말자.’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강엽은 의식적으로 벼랑을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물론 그게 노력한다고 되겠냐만,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집중력이 최고조로 발휘되었다.

그때 강엽의 눈에 무언가 눈에 띄었다.

그처럼 벽에 딱 달라붙어 가면서도 주변의 지형을 살피는지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인영.

‘저 녀석은...?’

짐마차에서 내렸을 때 본 색목인 소녀였다.

‘의외로 잘 걷잖아?’

처음 봤을 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는데, 지금은 긴장했을지언정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강엽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놀랐다.

‘설마 뛰어내리려는 건가?’

뼈도 추리지 못할 높이였다.

벼랑 아래로 강이 흐르긴 하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땅이나 물이나 다를 게 없다.

그때였다.

“위험해!”

쿠구구궁......!

소녀의 머리 위쪽에서 돌덩이가 굴러떨어졌다.

대충 봐도 대여섯 명쯤은 우습게 깔아뭉갤 크기였으니 깔리면 피떡이 되리라.

아직은 거리가 멀지만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소녀가 강엽을 봤다가, 강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굴러떨어지는 돌덩이를 발견하고 사색이 된 소녀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으아악!”

무지막지한 충돌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맞지 않은 사람들도 균형을 잃고 추락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맞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잔도에 진득히 흐르는 핏덩이가 그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주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사고에 선두에서 나아가던 단주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돌덩이에 맞은 줄 알았던 소녀가 잔도 위의 벼랑을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밑으로 쏠렸을 때 벼랑을 기어올라서 탈출하려는 것이다.

“이 계집이 어딜!”

말의 잔등을 박차고 뛴 단주의 신형이 비조처럼 허공을 날아서 소녀를 향해 쭉 쏘아졌다.

소녀가 대경실색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단주가 몇 배는 빨랐다.

순식간에 위쪽을 점한 단주의 발길질이 소녀의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내려찍었다.

“...!”

입을 쩍 벌린 소녀가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돌덩이를 피한 의미도 없이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하지만 허공에서 몸을 휘리릭 반전한 단주가 소녀를 따라잡더니 뒷덜미를 낚아채서 잔도로 던졌다.

직후 벼랑을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수직으로 매달려서 껑충 뛰어올랐다.

코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강엽을 비롯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사람의 움직임이...!’

거친 칼잡이들을 말 한마디로 휘어잡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신선이 구름 속에서 노니는 것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이라니.

강엽은 말로만 듣던 무림의 고수를 실제로 보니 절로 주눅이 들었다.

“맹랑한 계집 같으니. 사고를 이용하면 도망칠 줄 있을 것 같았더냐?”

“....”

소녀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단주를 노려봤다.

칼잡이들이 달려들어 소녀를 억눌렀다.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내가 나서기 전에 네놈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며, 면목이 없습니다.”

칼잡이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도 사고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소녀가 도망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단주가 소녀의 몸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마혈을 짚었으니 움직이지 못할 게다. 상품들 중에 적당한 놈을 골라서 업도록 시켜라.”

“그러다 같이 굴러떨어지면....”

“그럼 네놈들이 업든가.”

칼잡이들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지만 좁고 구불구불한 잔도는 그들에게도 위험했다.

설령 소녀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해도 이런 데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 너 이쪽으로 와라!”

“...저 말입니까?”

강엽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왔다.

칼잡이들이 그를 낙점한 까닭은 간단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잔도를 잘 걷는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눈여겨봤던 것이다.

물론 강엽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도 체력이 별로 좋지는 않은데... 얘를 데리고 무사히 잔도를 통과할 수 있을까?’

강엽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냐?”

“....”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라 잃은 것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게 도망치지 못해서 낙심한 것 같았다.

아니면 강엽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든지.

‘다른 나라에서 왔다면 중원말을 모를 수도 있지.’

어쩌다 노예상인에게 붙잡혔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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